2011년 겨울, 한계에 다다랐다. 1월의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일을 시작해 여름의 더운 밤바람을 지나 다시 쌀쌀해진 바람에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회식과 야근, 그리고 출장으로 내 인생엔 회사업무 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시차적응에 몸이 망가져 갔고, 또 한 번의 진지한 사랑에 실패했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매일같이 새벽까지 영어로 통화를 해야했다. 나는 내가 잘하는 일을 좋아한다. 해외투자는 겉으로 멋져보일 수 있었겠지만, 내게는 아무런 매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에 온 스무 살 무렵엔 지하철 타는 것도 힘들었다. 처음 한 시간 가까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신촌까지 갔을 때,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덧 십여 년이 지나 서울살이에 적응하고, 이제는 서울이 아닌 모든 곳이 어색한 서울시민이 되었지만, 열 시간이 넘는 비행 후 외국인들과 협상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해외 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다. 모두가 투박했고, 아무도 해 본 적이 없어 그 일을 어떻게 하는 지 규정부터 만들어야 했다. 돌이켜 보면, 주변 모든 이들이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었다.
11월, 일주일 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작은 팀이었고, 업무량을 볼 때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팀장님은 그럴 때가 되었다며 담담하게 승인해 주었다. 곧장 비행기를 잡아타고 프라하로 떠났다. 꼭 프라하일 필요는 없었다. 대학시절, 카를교의 야경 사진을 보고, 어린 마음에 꼭 한 번을 보러 가리라 생각했었다. 변변한 패딩 하나 없이 도착한 프라하의 11월 밤은 추웠다. 한 밤에 도착해 현지인의 친절에 기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들어선 호텔은, 카를고 서쪽, 언제 지어진 지 모를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다. 방에서 창문을 열면 블타바 강과, 한 쪽으로 카를교가 보였다. 창에 걸터앉아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물안개 낀 블타바를 바라보는 것이 아침 일과였다.
랩탑은 가져왔고 인터넷이 되는 것도 확인했지만, 한 구석에 두고 켜지 않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프라하를 가봤을까? 프라하성부터 신시가지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아름다운 곳이다. 음식은 싸고 맛있었고, 유명한 체코 필스너는 짭짤한 감자튀김과 함께 끊임없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체코필하모닉의 공연을 듣고, 계속해서 걸었다. 걷다 지칠 때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시장의 낯선 이들과 모자란 영어를 주고받으며 혼자임을 즐겼다. 그렇게 몇 일을 보내고 나니,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도 잊고, 프라하의 사람들 사이에 숨어 마치 프라하에 오래 산 사람처럼 굴게 되는 것이었다. 숨기에 좋은 곳이었다.
일주일을 그 아름다운 도시에 숨어 좋은 음식과 맥주만을 즐기고 오니, 사실 너무 추워서 현지에서 목도리와 장갑을 사야했는데도, 숨이 쉬어졌다. 회의를 마치고 주변 경치를 볼 새도 없이 공항에 도착해 햄버거를 물며 돌아다닌 출장과는 달랐다. 수없이 많은 출장을 다녔고, 수조원에 이르는 투자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내 개인을 위한 여행을 갈 여유는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와 백불 남짓한 출장 예산을 조금이라도 올려보기 위해 계속해서 싸웠지만, 출장이 직업이 아닌 이들은 해외출장은 혜택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늘 내 돈을 써야 했다.
프라하와 오랜 출장 뒤로 나는 많이 변했다. 뉴욕, 런던,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할 때 쯤 마음이 편해진다. 스테이크나 파인다이닝 식당보다는 일본인이 하는 동네 가게에서 우동 한 그릇을 먹어야만 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근처 카페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현지인인 양 편안한 마음으로 반복되는 하루 일과를 즐기며 몇일을 보낸다. 어느 곳에서도 당황하지 않지만, 설레는 일도 드물다. 다만, 나의 작은 방황이 나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아는 이를 피해 낯선 곳에 숨어 몇일을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여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