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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J Apr 14. 2024

불행의 철학

해야하는 일을 한다

나는 책을 잘 읽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고개를 숙여 책을 읽는 행위를 오랫동안 할 수 없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어느 밤 뒷목에서 전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며 옆으로 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른쪽으로 넘어진 통에 오른 어께가 아파왔다. 한국에서 한 번, 미국에서 다시 한 번 쓰러지고 나서야 내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반 시간 책을 읽으면, 한 시간여 목을 풀어야 겨우 조금 나아지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책 읽는 것을 지독하게 좋아했었다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을 앞둔 고3 시절, 어머니께서는 공부를 해야한다며 내 방에 책을 치워버리셨다. 나는 몰래 삼국지연의 몇권을 숨겨 밤새 읽거나, 그 당시 유행하던 무협지를 빌려 몰래 읽었다. 그 시절 나의 어머니께서는 유난히도 엄격하셔서, 그렇게 몰래 책을 읽던 것을 발견하시면, 어떤 책이든 간에, 그 책을 찢어버리시고 회초리를 드셨다. 


의사들이 늘 만성피로라고 부르던 것의 정체가 내 목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른살을 넘어 삼십대 중반으로 가던 시기였다. 더 이상은 효과가 없던 한방병원의 침과 추나를 중단하고 신사역에 있던 재활의학과를 찾았다. 재활의학과와 필라테스 스튜디오들이 하나씩 생겨나던 시기였다. 이제는 의미있는 고생만 하리라 생각하던 나는, 더 이상 열심히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허탈했다.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요즘 가장 공감하는 말은 "해야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따뜻한 이불 안 달콤한 잠에서 벗어나 아침운동을 하고, 내가 꿈꿔왔던 내 회사의 성공을 위해 그렇게도 싫어하던 일을, 예컨대 자료 번역을, 하며, 내 집을 위해 재활용 쓰레기를 치운다. 지금은 잘 느끼지 못하는, Euphoria/희열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고통 후에 찾아온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어 나는 불행하다. 하지만, 더 큰 불행을 피하고 있다. 책을 반시간여 읽었더라면 내일까지도 그 목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당장 지독한 멀미에 시달린다. 아침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 위장이 어제의 음주를 해결하지 못해 하루 종일 괴로웠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의 불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작은 불행을 지속해야 한다. 큰 행복은 대부분 지속되기 어렵다. 그렇기에, 연속된 작은 불행 끝의 만족감을, 그 잔잔한 행복을 목표로 한다.


"다른 사람이 그대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면, 그대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세네카)


작은 불행들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는 부러움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뒤쳐져 있다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더 잘되기 위한 노력은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뒤쳐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과로일 수도 있고, 과소비일 수도 있다. 우리가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는 어떤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더 뒤쳐지게 할 수 있다.  


나는 남들보다 이직을 자주, 많이 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아 떠나기보다는,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나보다 좋은 직장에 있는 이들이 부러워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직을 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내 일을 가장 사랑하던 시기는 연봉이 낮은 시기였고, 가장 높은 연봉을 받던 시기에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사소한 불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정보다는 논리가 필요한 때였다.  


현대 한국인은 결코 신분이 높은 왕이나 귀족이 될 수 없다. 누군가 사소한 불행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운이 좋거나 나쁜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운에 달려 있다. 우리가 행동을 통해 행복이라는 감정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젠가의 희열을 위해 지금의 사소한 불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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