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된 사람들, 사람이 된 동물들
<여우 누이>, <범이 된 사람>, <변신 경쟁>을 통해본 둔갑과 변신
예전에 '애완'동물이라 불리던 동물친구들은 이제 '반려'동물이라 불리며 우리 곁을 맴돈다. 이곳저곳 애견미용실, 동물병원, 펫호텔 등이 생겨나고 캣카페, 애견카페 등 동물과 함께 커피나 독서의 여유를 나눌 수 있는 공간도 늘어났다. 동물을 캐릭터화한 콘텐츠들은 영유아부터 어른까지 즐거움을 주고, 다큐멘터리와 시사보도에서 동물은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로 인해 터전을 잃어가는 지구별의 동료이다.
우리 옛이야기 속에는 동물이 된 사람들도 있고, 사람이 된 동물들도 있으니 사연을 보자.
<여우 누이>
넷날에 한 노친네레 있드랬넌데 큰 기애집을 짓구 잘사는 노친네드랬는데 이 노친네는 아들은 닐굽 형데나 있어두 딸이 하나두 없어서 딸 하나 났으문 하구 늘 원하구 있었드랬는데 하루는 원한 대루 딸을 낳게 됐다. 딸을 낳으느꺼니 여간만 도와하딜 않구 딸만 귀여워하구 아들 같은 거는 죽어두 돟다구 했다. 그런데 이 딸이 낳은 담부터는 이집에 소와 말이 자구 나문 죽구 죽구 해서 아 이거 조화다 하구서리 맏아들과 어드래서 밤사이에 소와 말이 죽는가 디케 보라구 했다. 그래서 맏아들은 제낙을 먹구 마구깐 한 구세기에 가서 숨어서 디케 보구 있었다. 야담붕이 되느꺼니 자기 어린 뉘(누이)가 방문을 살그머니 열구 나오더니 볔에 들어가서 챙기름을 손과 팔에 발르구 간장을 들구 나와서 외양간에 돌우와서 말 미꾸넝에 손을 디밀어 말에 간을 빼서 간장에 꼭 딕어 먹었다. 그리구는 가만히 방안으루 들어갔다. 말은 털석 너머데 죽었다. 맏아덜은 이걸 보구 집에 들어가서 오마니과 본 대루 말을 했다. 오마니는 이 말을 듣구 증이 나서 뉘 하나 있는 걸 못 쥑에서 허튼 소리 한다구 욕지꺼리하멘 당당(당장) 나가라구 내쫓았다. 다음날 오마니는 둘째 아들과 디케 보라구 했다. 둘째 아들은 저낙을 먹구 마굿간에 숨어서 디케 보구 있넌데 한밤둥에 뉘가 나와서 볔에 가서 챙기름을 손과 팔에 발라 개주구 말에 미꾸넝에 디리밀어 말에 간을 빼서 먹구 그리구 방으로 들어갔다. 말은 죽었다. 둘째 아들은 본 대루 뉘가 그래서 말이 죽었다구 말하느꺼니 오마니는 이 말을 듣구 또 증이 나서 뉘 하나 있는 거 쥑이딜 못해서 허튼 소리 한다 하멘 내쫓았다. 그 후 이 뉘는 소와 말의 간을 빼먹구 수타 많은 소와 말이 다 없어디느꺼니 이제는 오마니두 잡아먹구 아바지도 잡아먹구 다른 오래비두 잡아먹구 동네 사람두 잡아먹구 자기 함자 살멘 아무가이던디 오기만 하멘 잡아먹구 그러멘 살구 있었다. 내쫓긴 맏아들은 지향없이 돌아다니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아서 노는 데루 왔다. 거북이가 불상해서 이거를 사서 바다에 다 넣어 주었다. 거북이는 죽을 거를 살레 줘서 고맙다 하멘 신세 갚갔다구 옥으루 만든 함 하나를 줬다. 그리구 이 함은 나오나 하문 머이던지 원하는 거이 다 나오는 함이라구 대줬다. 맏아들은 그 함을 받아 재기구 집두 짓구 색씨두 얻구 해서 잘살드랬는데 전에 살던 집 생각이 나서 그래서 한본 가보갔다구 색시과 말을 하느꺼니 색시는 가디 말라구 말렸다. “와 말리네. 내레 꼭 한본 가보구 오갔다”구 세게 말했다. 그러느꺼니 색시두 덩 그렇게 가보구푸믄 갔다 오라구 했다. 그러멘 쌔한 단대기(단지) 노란 단대기 빨간 단대기 이렇게 서이를 주멘 무슨 급한 일이 있으문 이 단대기 하나식 던디라구 했다. 맏아들은 단대기 서이 개를 개지구 전에 살던 집에 찾아갔다. 가보느꺼니 동네두 없구 사람두 없구 저에 집두 없구 그런데 어드메서 구무여우가 나오더니 아이구 오래비 온다 하멘 반가이 맞았다. 그리구 집에 들어가자구 했다. 오래비는 집안으로 끌레서 들어갔더니 뉘는 오라바니 밥 짓갔다구 하멘 볔에루 들어갔다. 오래비는 가만히 살페보느꺼니 암만 해두 데 뉘가 자기를 잡아먹을 거 같아서 이거 야단났다 하구 집안에서 뛰테나왔다. 그리구 마구 뛨다. 그러느꺼니 뉘두 뛰테서 자꾸 딸아왔다. 그래서 거이거이 딸아붙게 됐다. 오라비는 쌔한 단대기를 팡가텠다. 그러느꺼니 가시넝쿨이 쫙 깔레서 구무여우는 가시넝쿨 사이 파묻헤서 딸아오딜 못하게 됐다. 이 짬에 오래비는 멀리 뛔가게 됐다. 그런데 뉘는 그 가시넝쿨을 벗어나서 또 딸아왔다. 그래서 거이거이 딸아붙게 됐다. 오래비는 이젠 노랑 단대기를 팡가텠다. 그러느꺼니 그 아근은 물바다가 됐다. 뉘는 물에 따데서 딸아오디 못하게 됐다. 오라비는 그짬에 멀리 달레가게 됐다. 그런데 뉘는 그 바다물을 헤티구 나와서 달아뛔서 오라비를 쫓아갔다. 거이거이 딸아붙게 됐넌데 오라비는 이번에는 빨간 단대기를 팡가텠다. 그러느꺼니 불이 활활 타올라서 그 아근은 불바다가 됐다. 구무여우는 그 불에 타서 죽구 맏아들은 집에 돌아와서 잘살았다구 한다.
1935년 평안북도 채록, 임석재, <임석재전집>2, 평민사, 1989, 53~55면,
어릴적 우리형제에게 엄마가 거실 탁자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여우누이>였다. 오빠를 뒤따라 달려오는 여우뉘의 구절은 형제에게 오싹함을 안겼다. 학자들 중에는 이 이야기에서 부모의 응석받이로 자란 고명딸에 주목하여 분석하거나, 둔갑과 변신의 자취 속에 악마화된 여성상을 분석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다분히 '민담적' 구성을 갖춘 구전서사이다. 전국에 널리 퍼진 광포설화로 흔하게 채록되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우누이>에는 민중적 보편적 시각이 짙게 남아있다고 하겠다. 보통 전근대서사라고 하면 아들을 원하고, 아들만 위하는 정서로 가득할 것이라 여기겠지만 이 이야기는 '딸바보'서사라 할 만큼 특이점을 갖는다. 설화 속 부모는 딸을 원한다. 하여 어렵사리 딸을 얻었으니 막내딸이다. 민담에서 막내딸은 문제를 해결하고, 쓰러져가던 가문을 잃으키고, 넓은 아량을 지닌 주인공이 보통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막내딸은 주인공이 아니라 '서브'캐릭터에 심지어 악녀로 설정되어 집안은 물론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파괴한다.
이 민담에서 오빠는 대체로 둘 혹은 셋이다. 이들은 '목격자'이자 '증언자'로 설정된다. 딸이 무럭무럭 자랄수록 집안의 가축들이 죽어나간다. 이 무슨 변고인가, 부모는 자신들의 눈 대신 아들들의 눈으로 위협을 확인케 한다. 부모는 고명딸에 대한 애착으로 눈이 먼 상태이다. 눈밖의 아들들은 부모 눈속의 딸이 하는 '만행'을 그만 맨눈으로 보고만다. 차마 형용키도 어려운 괴변을 여동생은 천연덕스럽게 장난치듯 쉬이 행한다. 어이쿠야! 부모에게 고하지만 부모의 귀는 눈만큼이나 막혀있다. 아들들은 추방된다. 설화학자, 국문학자 중에는 민담에 나오는 '집떠남'이 의미심장하다는 분들이 계신다. 얼핏보면 집을 떠나야만 서사가 시작되고 영웅성이 증명된다. 그러나 조금더 보면 <여우누이>는 회귀에 대한 서사이며 무너지고 파괴된 보금자리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우뉘는 여전하다. 오라버니들도 잡아먹어야 욕망의 일면이 사그라들 지경이다. 주린 배를 채우겠다는 것뿐이다. 여우뉘는 일시적 둔갑에 머울뿐 항구 한 변신에 이르지 못하고는 주인공 오빠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 존속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가 서슴없이 벌어지고 끝내 가족에 의해 죽게 되는 여우뉘는 특정국가에서 벌어지는 명예살인 같은 가부장제의 희생양일까?
장자는 집으로 복귀하여 삶을 재건한다. 막내딸은 평온한 가정에 '침투'한 외물이자 요괴에 지남 아니다. 침입한 침입자를 추방하는 것은 본디 주인의 몫이다. 잠시 머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세 단계에 걸쳐 내몬다. 친정과 시댁의 재산을 탐하는 여인들이 있다. 이들은 아내, 며느리, 시모, 장모 등의 역할로 '둔갑'하고서도 그 욕망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사이에 집안남성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돈을 노린 여성범법자들의 살인에 <여우누이> 서사가 깃들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수갑 찬 여인들은 여우 뉘었다. 조선의 국모라고 대중화된 명성황후시해 작전의 이름에도 여우가 들어간다.
"여우사냥(Fox hunting)"이라는 작전명이었으니.
어쩌다 민비는 일본 낭인들에게 여우로 전락했던가.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늘 대립각을 내세우던 여인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조선의 국모이지만 도대체 대한제국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역사적 가치를 추리하기 힘들다. 무속을 좋아하여 무속신앙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그녀는 <여우누이>의 뉘였을까? 그래서 '제거'된 것일까? 친정 민 씨 집안을 끌어들여와서 조선궁궐은 쑥밭이 되었다. 아들 순종에 대한 야사들은 차마 듣기 어려운 것들도 적지 않다.
욕망을 탐하는 이들은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민담 속 여우뉘가 아닐까.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도 그런 것이 담겼던가. 오늘도 오빠들은 여러 번 '목격'하고, 눈과 귀가 먼 부모들은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 사이에 국가는 난장판이 되고 보다 못한 민중은 여우뉘를 '탄핵'하기도 했다. 사람은 함부로 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골조는 이것 아닐지. 동물 여우는 어쩌다 '여시'가 되고 구미호가 된 것일까. 정작 여우들은 영문을 모를 것이다. '키츠네'는 브랜드도 되고, 역사적 악마의 망이 씌어지기도 한다.
<범이 된 사람>
옛날에 안주(安州) 어느 몰에 김선달이라는 사람이 있드랬넌데 이 사람은 송을 왜서 밤이면 범이 돼서 산둥으루 들어가디기루 하구 몰 아근에 가이두 혼내 주기두 했다. 김선달(金先達)에 댕내는 이거이 너무너무 미서워서 하루는 김선달이 송을 외워서 범이 돼서 나간 짬에 송을 써놓은 책(冊)을 모주리 불태웠다. 범이 된 김선달은 사람으루 다시 돌라문 책 보구 송을 외와야 하넌데 그 책이 없어데서 고만에 김선달은 사람으루 되지 못했다. 범이 된 김선달은 할수없이 몰로 돌아다니멘 동네 사람으 돼지두 잡아먹구 가이두 잡아먹구 달두 잡아먹구 살았넌데 그것만우루는 실차디(양이 차지) 않아서 마감에는(나중에는) 친구를 문밖에 불러내 개지구 잡아먹군 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덜은 이 범을 잡아쥑일라구 벨애벨 게구를 다 했넌데두 도무지 잡아쥑이디 못했다. 이 범은 근냥 해만 티구 다니었넌데 그 후에 제절루 죽었넌지 나타나디 안했다.
1935년 평안북도 채록, 임석재, <임석재전집>1, 평민사, 1991, 74면.
여기서 김선달은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벼슬은 하지 않은 선달이다. 유명한 사기꾼, 트릭스터 캐릭터인 김선달이다. 그러나 그저 부르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여 김선달로 설정되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김선달은 동물변신에 능하다. 다만 암기를 못한 탓인지 반드시 책을 보고 주문을 외어야 한다. 남편의 실체를 아는 이는 이름모를 아내 뿐인데, 아마도 그녀는 까막눈이었을 것이다. 그저 호랑이로 변하는 남편이 무섭기만 했다. 하여 남편이 범이 된 사이에 주술책을 모조리 불살랐다. 아뿔싸! 이제 남편은 사람될 길을 잃었다. 금수의 몸으로 남은 생애를 감당해야한다.
오랜 친구까지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미 사람다움은 진작에 포기했다. 인성을 상실한 곳에는 수성만 가득할 뿐. 송곳니로 물어 뜯어먹는 맹수의 삶이 전부가 되었다. 남편은 악의적 목적으로 범으로 화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나름 지역사회를 수호하던 인격지닌 짐승으로 잠깐 잠깐 '둔갑'을 했던 것인데, 아내의 불사름으로 그만 항구한 변신이 되어버렸다. 현부우녀의 결말은 참혹하다!
우리 주변에도 범으로 변해야만 기업과 가정을 간신히 지킬 수 있고 수호할 수 있는 남편과 아비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싸울아비가 된다. 지역사회를 지키기위해 송을 외고 범이 된다.
그러나 그런 남성들이 그저 무섭다. '한남(한국남자라는 혐오표현)'에 지나지 않다. 짐승으로 살아라. 그들의 주문서를 불사른다. 사람으로 돌아올 기회를 잃은 이들은 사나운 호랑이로 남은 일생을 살다 떠난다.
산중호걸이 없는 숲속에는 오소리와 멧돼지가 난장판을 만들어놓을지도 모른다. 옳은소리, 바른소리하는 선생들은 학부모들의 불법녹취에 그만 범으로 멈추고 만다. 따끔한 올바른 소리대신 달콤한 그릇된 소리만 세상천지 가득하니, 요지경이 되고 만다.
호랑이가 사람이 될 수 있게 주술책을 복원해야 한다.
알아보려고, 까막눈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공부 아닌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어흥! 그들에게 돌려줄 것은 떡이 아니고, 담배가 아니고, 책이다. 문명이다. 문화다.
<변신(變身) 경쟁>
넷날에 한 노친네레 아덜을 길르는데 하루는 중이 와서 이 아를 보구서리 이 아는 잘생겼다마는 죽을 날이 메칠 남지 안했다구 했다. 오마니는 이 말을 듣구 깜작 놀라 어카문 오래 살게 할 수 없능가 하구 물었다. 중은 나를 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덜을 주는 거이 슬펐지마는 오래 살 수 있다면야 할수없다 하구 아들을 중에게 주었다. 중은 산둥 절루 데불구 가서 거기서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켰다. 이 아레 하루 나즈는 자다가 잠이 깨서 보느꺼니 자던 중이 밖으루 나갔다. 그래서 이 아는 그 뒤를 모르게 가만가만 따라가느꺼니 중은 큰 팡구 우에 가더니 옷을 벗구 그 밑에 있는 강으루 들어가서 용이 돼서 꼬리를 치며 놀다가 나와서 옷을 입구 팡구 밑에 있는 물을 마시구 새가 돼서 날아갔다. 이 아이도 팡구 밑이 있는 물을 마시구 새가 돼서 날아갔다. 이 아이도 팡구 밑이 있느 물을 마셨더니 새가 됐다. 얼른 날라서 와서 자리네 누어서 자는 테하구 있었다. 조금 있더니 중이 돌아왔다. 다음날 밤에 중은 또 밖으루 나갔다. 이 아는 또 뒤따라갔다. 중은 팡구 우에서 옷을 벗구 강에 들어가 용이 돼서 놀다가 나와서 옷을 입구 팡구 밑에 가서 물을 마섰다. 물을 마시면서 “아 요놈이 언제 와서 물을 마섰구나. 요놈을 죽여야디 큰일 나갔다” 하구 혼자 말했다. 그리구 새가 돼서 날라갔다. 이 아이는 팡구 밑에 물을 마시구 새가 돼서 오마니 있는 데루 가서 중이 와서 내가 왔능가 물으먼 모른다구 하라구 말하구서 송아지가 돼서 마구간에 가 있었다. 다음날 중이 와서 오마니과 아덜이 왔능가 물었다. 오디 안했다구 하느꺼니 중은 칼을 내들구 바른대루 말하야디 그라느문 쥑인다구 했다. 오마니는 겁이 나서 더기 송아지가 돼 있다구 했다. 중은 송아지를 끌구 산으루 올라갔다. 이 아이는 가다가 꿩이 돼서 날아갔다. 그러느꺼니 중은 마이레 돼서 뒤쫓아왔다. 이 아는 메캐(목화솜)가 돼서 체네가 메캐를 따는 데 가 있었다. 그랬더니 체네는 이 메캐를 품속에다 닣구 있었다. 중이 와서 여기 색다른 메캐가 있으문 달라구 했다. 체네는 메캐를 다 내보이멘 색다른 메캐는 없다구 했다. 중은 없을 리가 없다, 어서 내놓으라구 성화멕였다. 체네는 할수없이 품안에서 목화(木花)를 꺼내 주었다. 중이 이 메캐를 받으레 하느꺼니 메캐는 깨가 돼서 따에 떨어뎄다. 중은 달이 돼서 그 깨를 쫄라구 했다. 이때 깨는 광이레 돼서 달을 잡아먹었다.
1936년 평안북도 채록, 임석재, <임석재전집>1, 평민사, 1991, 74~75면.
누군가는 백년을 살아보니라고 이야기한다지만 사람의 수명은 200년도, 150년도 아니다. 아무리 백세시대라도 그 백세를 건강하게 살아내는 것은 철저히 운에 달렸을 뿐이다.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도 사고사로 운을 달리할 수 있는, 그 허망과 허무가 삶의 본질인 까닭에 그러하다.
어느 부모가 자녀의 단명을 바랄까. 스님의 한마디에 어머니의 모든 감관이 마비된다. 아드님이 미남자인데 단명하겠수! 뭐라고요? 나랑 지내야 장수하오!
어머니는 아들은 스님에게 보낸다. 아이는 스승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마법사의 제자>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너머로 스님의 변신술을 벤치마킹한다.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본인은 아이의 단명을 본 중이었다. 그는 스님이 아니라 중이었다. 제자가 자신만의 성소를 침범하기 시작했다고 느낀 스승은 아이를 죽이기로 한다. 요놈 많이 컸구나! 언젠가 내 자리를 위협하겠구나! 하여 시작된 사제간의 변신경쟁이다. 육해공 모든 영역에서 다툼이 벌어진다. 목화가 되어 처녀품속에 들어간 소년은 깨가 되었고, 닭으로 변한 중을 고양이가 되어 잡아먹는다. 결과적으로는 중 곁에 있던 덕에 사지로 내몰 뻔한 장본인을 제거할 수 있었고 덕분에 단명을 피한 아들이다.
우리는 세포분열처럼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짐승이나 식물으로의 하강변신이거나, 동물이 사람 되는 상승변신이거나 우리는 변화를 바란다. 지방을 흡입하고 성형을 하며 변화를 꾀한다. 고양이상, 개상, 관상에도 동물을 기준 삼는다.
동물원에 가면 우울한 눈빛을 한 그들을 본다. 우리에 갇힌 그들을 관람하는 우리는 그들을 반려동물이라고 제멋대로 칭하고는 보호종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우리도 사실은 동물에, 짐승에 지남 아니다.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한 일물이다. 나라는 짐승은 어떻게 사람이 되어가는가? 옛이야기 속 동물과 변신신화를 보며 물어본다. 나는 짐승 같은 동물인가, 아니면 사람 동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