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서 있는 그대 그리고 나
길을 걷다가 무언가 반듯하게 서 있는 건축물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것은 가로수 이거나 전신주일 수 있다. 가로수는 종에 따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무언가를 떨어뜨려주는 나무도 있고, 그저 가지치기의 대상이 되어 여기저기 자신의 조각들을 떨어뜨리는 나무도 있다. 전봇대는 머리통이 너무도 무겁다. 뒤엉킨 전깃줄은 대체 무엇이 어떤 케이블인지 비전문가의 눈으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고압선이라도 흐르면 '위잉'하는 기분 나쁜 소리까지 들리기도 한다. 이들이 아니라면 깜빡이는 신호등 정도가 오늘날 보행자를 마주하는 '기둥'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시절만 하더라도 마을 어귀에는 가로수도 아니고 전신주도 아니며 신호등은 더더욱 아닌 '기괴한 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졌거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 보통이었으며 가슴에는 희한한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흔히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문구로 나뉘거나, 네 방의 방위별 축귀장군(逐鬼將軍) 혹은 상원주장군, 하원당장군 등이 새겨지거나 쓰여 있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시골 어귀, 유명한 사찰의 초입, 대학 캠퍼스 내의 장식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다. 탐라국 제주에 있는 돌하르방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인사동 민속 상품의 대상이 되거나, 식당 입구를 장식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는 장승들. 우리네 옛이야기 속에는 이들 장승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방언[사투리]에 따라 '벅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에라이 벅수 같은 놈"하고 욕설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장승 이야기를 한번 귀 기울여 보자.
아 옛날에 참 옛날 그 참 오래된 옛날인디 모자이 살아요. 그런데 참 가세가 빈안해 그래서 거 아들이 한나 있는데, 그 아들이 그 나무나 허고해서 연맹을 허는디, 이 아들이 그리 변변치 못해 항상 말해야 머 바보라 했았고 이랜다 말이여. [청중:바보온달.] [일동: 웃음] 아 그러는디, 아 이놈이 가마이 생각해봉게,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남처럼 한번도 살아보덜 못허게 생겠거든, 나무장사 해갖고는. 그렁께 하루는 어머이 즈그 어무이 보고, “아 그러먼 내가 무슨 장사를 해야 쓰겄소. 장사헌 사람은 아 기앙 부자가 되고 그러는디 나도 먼 장사를 한 번 해봐야 쓰겄소.” 아 그렁께 즈그 어머이는 당치않는 소리제마는 지가 헌다고 헝께, “그러먼 한 번 해봐라. 그러먼 장사를 먼 장사를 헐래야?” 그렁께, 그 포목장사 요새 그전 같으먼 항해장사(1)[비단장수.]라 안했어요? “그 장사를 한 번 해보겠다.”고. “그 아무케라도(아무것이나) 해라.” 그래서 인자 얼만큼 마련해 가지고 서울 가서 인자 그 비단을 많이 떳단 말이여. 돈대로 그래 가지고 와서는 어무이(어머니) 보고 인자 허닛까(2)[?말하니까?의 略.] 어무이 말씸이, “장사는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폴먼(3)[팔면.] 안된다. 기앙 얼마로 해서 사는 사람안테 폴제, 머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절대 폴아서는 안된다.” “예. 그럴랍니다.” 허고. 그 이튼날 인자 이놈을 가지고 나갔다 말이여! 나가서 대체 인자 그 마을에 들어가먼은 큰집이 가야 포닝까(4)[팔므로.] 가서 인자 물어보먼 모도 식구대로 모여서, “그 을마냐(얼마냐)?”고. 으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고 물건을 보고 헌다 말이여. “어 당신들 말만 헝께 안 폴라요.” 아 그 따악 싸갖고 나가거든, 또 그에 인자 이웃집이 가도 그러그든. 이거 팔릴 것입니까? 그것이 안 팔리제. [청중:엇째 안 남응께 돈이.] [제보자: 어무이(어머니) 말씸이.] [청중:으응.] [제보자: 말많은 사람한테는 팔지 마라.] [조사자:예.] [청중:아하! 말이 많은.] [제보자: 그렁께 지금 어무이 말을 지키느라고 지금.] [청중:아하 응.] [청중:효자제.] [청중:그렇제 효자 효자로구먼.] [청중:여기 있는 양반은 전부 효자 못 되겄네. 가사 말헌다치먼.] 아 그래서 인자 한 사날 이렇게 돌아댕에야 돈이 멋 한 자를 못 팔었어. ?아 이거 어무니 말 듣다가는 큰일났구나? 허고는 인자 사흘만에 집이를 돌아오는디, 물겐은(5)[物件은.] 그대로 카마이(6)[가만히, 그대로.] 있다 말이여. 아 그래 어디 인자 해가 지금 석양이 되았는디 한 반디를(한 곳을) 봉께 사람이 섰거든. 그래서 인자 가서는, “여봇시요. 비단을 좀 삿시요.” 암(아무) 소리 않거던. 아 맻 번 해야 아무 소리가 없어. [청중:아하 예가 팔디로구나.] ?여가 팔 디로구나.? 허고는 거그다 항아짐을(뱃짐을) 인자 부래놨단 말이여. 부래놓고는, 아 인자 ?이놈은 을마요?(7)[얼마요?] 이놈은 을마요?? 아무리 해야 먼 소리가 없어. ?하아 인자 임자는 옳게 만났다.? 아 그러고는 기다릴 수가 없응께는 인자 밤은 깊어가고 그렁게 아 거그다 항아짐을 인자 놔두고 집이로 돌아 왔어. 아 그런디 그것이 멋잉고 허니 장승이덩갑디다. 장승, [청중:아 나무를 깎고잉 즉 말허자먼 지금같으먼 머 이정표제 그것이.] 말을, 말을 헐 수가 있어, 그에서 인자 어무이한테 가서, “아이 거 다….” “다 폴았느냐?” “예 다 팔았읍니다. 아 다른디 강께 저어 이-머 ?비싸네 싸네?허고 ?좋데 굿네? 했샀고 해서 한나도 못 팔았어요. 그래서 오늘 오다가 아 어디를 오닝까 인자 얼마냐고 사라고 해도 말도 않고 이 놈이 좋고 저 놈이 좋다 해도 말도 않고 그래서 거그다 다 두고 왔읍니다.” [청중:부려놓고 갔읍니다.] [일동: 웃음] “돈은 낼(내일) 가서 받기로 했읍니다.” 하이 어무이가 가마이 생각헝게 허멍(허망한)헌일이거든. 속으로만 ?참 허망헌 일이다.? 허는디, 아 그 나무랄 수도 없고…. 아 그래서 인자 그 이튼날 잠을 자고는 거그를 갔단 말이여. 아 가잉까 머시 장승이거든. [청중:그렇지요. 그대로 가마이 있고.] 아 그 밑이 인자 아 그것이 있을 리가 없제. 아 어디로 누가 가지가버렀제. 아 그렁께 이놈이 실망이 대단허제잉. 하 그래서 이것을 어쩔것잉고잉 부홰난디로(화나는대로) 이놈은 한 번 때래서 어뜩게 눕해불(눕혀 놓을) 작정이여. 그래서는 엇뜨게 부홰나든지 ?에기 비러먹을 놈의 장승? 허고 쭈욱 뽑았다 말이여. 긍께 쭉 뽑히거든. 아 그런디 그 뽑힌 속에서 아 기양 누런 금댕이가 기앙, [청중:허어 허.] 막 쏟아지거든. [일동:[웃음.] ] [제보자: 참 이얘기시.] [청중:정성이여.] [청중:그렇제 자기의 부모안테 대한 효심의 발로라고.] 그래서 그놈을 가지고 와서 자기 어무이 모시고 잘 살았다는 옛말이 있읍니다.
<장승에 비단 판 비단장수> , 전라남도 함평군, 1980년, 제보자: 이재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채록
옛이야기 속에서 소금장수는 희대의 '바람둥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비단장수는 또 다른 메타포로 등장하기도 하는가 보다. 보통의 장사꾼 이야기와 달리 위 이야기 속 비단장수는 '바보'에 지남 아니다. 어리석은 천하바보라도 자기 '앞가림'은 해보겠다고 당차게 선언한다.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든든하다. 하여 당부한다. 아들아 절대로 말 많은 손님에게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란다. 그런데 아뿔싸. 엄마의 당부가 아들의 어리석음을 더욱 가열하게 만든다. '얼마입니까?' 당연한 질문에도 아들은 어머니가 들려준 '말 많은 손님'이라 판단하고 물건 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엄마의 당부는 '말만 많고 정작 살 생각이 없는' 그런 '진상고객'만 피하라는 당부였는데 곧이곧대로 들은 우직한(?) 아들은 무슨 말만 붙여도 거리를 둔다. 그러니 아무리 '힙'한 옷감인들 팔 수가 있었겠는가. 터덜터덜 많은 물량을 들고 돌아오는데 어라? 우두커니 비단상인을 기다리는 '고객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비단 사실 겁니까? 아무리 물어도 묵묵 부답이다. 옳거니! 이 분이 바로 엄마가 말씀하신 VVIP 고객이로구나! 완판이다 완판! 말이 판매지 아들은 우두커니 말없이 서계신(?) 그 손님의 팔에 값비싼 비단들을 옷걸이 마냥 걸어두고 돌아왔을 뿐이다. 아이쿠나! 엄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는 것은 엄마뿐. 엄마는 해결사! 아들이 만났다는 그 손님 내가 만나보리다. 하고 달려가보니 이건 벅수, 그러니까 장승 아닌가. 벅수 같은 아들이 귀한 비단을 '바친' 분이 장승님이시라니. 허망하다. 이미 모지리 아들이 걸어둔 비단들은 누군가 다 들고 가 버렸다. 아들이 보니 역시 뒤늦게 화딱지가 솟구친다. 신성한 장승이고 뭐고 에이 뽑아버리자! 뽑아보니 장승 아래 금은보화가 가득하다! 이야기 편에 따라 꿈에 장승이 나와서 금의 위치를 알려주는 유형도 있다.
#제보자 : 어디가나 마을에 보면은 당산목처럼 사당도 있고 신목으로 이렇게 하는 곳이 수호신으로 많이 이렇게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 우리 웅천땅 연도에도 보면은 신목이 하나 있는데요. 사당은 그 주변이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성시 되었고 바닷가에 있는 신목은 느티나무와 팽나무 포구나무라고 그러죠. 그 해변쪽에 벅수골에 자라서 얽혀서 한 나무처럼 멀리서 보면은 이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한 나무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이 나무는 함부러 손 댈 수도 없고 가지를 꺾어서도 안되고 누구도 손을 대서는 안되는데 어느 날 이 나무에 어린아들이 늘 매달려서 놀기 때문에 어른들은 항상 그걸 제지를 해도 애들은 애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안듣게 되자 그냥 내버려뒀는데 어느날 한 어부가 이제 추로를 하기전에 위험하게 늘어진 가지가 이렇게 있는 것을 자기가 그냥 꺾어버렸답니다. 벌써 이야기는 예견해서 오죠. 그러고는 전라도 연해에 가서 다른 때와 여념없이 고기를 잡으러 나갔는데 그날따라 고기가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묻구리를 해보았더니 마을의 신목은 어린아이들은 천진하고 이렇기 때문에 손이 닿아도 괜찮지만은 어른은 손을 대어선 안돼. 그런데 가지를 있는 대로 내버려뒀으면 됐는데 그걸 꺾어버렸다고 해서 그걸 부정을 탄 거죠. 그래서 그 어부는 연도로 돌아가서 고사를 지내고 다시 추를 냈더니 다른 날들과 똑같이 고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어느 젊은 부인이 그 뭣 모르고 산 위에 있는 사당 둘레에 나뭇가지를 꺾어서 땔나무를 사용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집안은 어떻겠어요. @조사자 : 풍비박산 났어요. #제보자 : 그렇죠. 불길한 일이 계속 일어나고 뭐 건강도 안 좋고 뭐, 늘 그랬던 거죠. 그래서 세월이 흘러 바닷가 신목은 태풍으로 죽었고, 다른 나무로 대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서, 그대로 두고 있다가 어느 기독교 신자에 의해서 죽은 나무를 들어내고 그곳에다 느티나무 두 그루를 그 자리에 새로 심어서 지금 나무의 보호수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뭐 그쪽으로 가서 한 번 더 설명 들으시면,... 이런 이야기 해주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벅수골 신목> 경남 창원시 진해구, 2014년, 제보자: 이동순, 한국학중앙연구원 채록
바보아들에게 금은보화를 안겨준 장승은 신성한 나무, 즉 '신목'이다. 신목 알아보는 안목이 없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저주'가 내리는지 <벅수골 신목> 이야기는 잘 들려주고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닿아도 된다. 그러나 때 묻은 어른들은 함부로 '터치'해서는 안 될 일이다. 노다지[No touch]의 대상인 것이다. 신목을 우연히 알아본(?) 바보 아들에게는 정말로 노다지 금광을 안겨주었던 벅수건만 이 이야기에서는 함부로 땔나무로 쓴 집안을 풍비박살 내는 장승이올시다. 신목은 천연의 장승이다. 자연이 내린 나무를 제멋대로 부리려다가 벌 받은 이야기가 위 이야기인 것이다. 나무라하여도 같은 나무가 아니다. 이 나무는 신성한 나무인 것이다. 콘크리트라고 다 같은 콘크리트가 아니다. 1920년대부터 들어선 전신주는 오늘날 전국에 700만 주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전보(電報)'에서 유래한 전신주는 현대의 장승이다. 귀한 전기를 곳곳에 날라주며 마을을 지켜주는 철근 콘크리트 장승말이다. 그러니 이 전봇대 역시 신성하게 여길 일이다. 한국전력공사가 전기라는 신출귀몰한 존재를 담당하고 있다.
[제1부] 때는 어느 때인지 모르나 평안도 월경촌에 사는 옹녀는 용모와 자색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사주팔자에 청상살이 겹겹이 쌓인 옹녀는 기구한 팔자대로 콩 주워먹듯이 서방을 잃는다. 서방뿐 아니라 옹녀의 색을 탐한 남자는 모두 황천길로 떠나니 동네 아낙네들은 옹녀를 마을에서 쫓아낼 작당을 한다. 아녀자들의 악다구니에 지친 옹녀는 자진해서 마을을 떠난다. 한편 경상도 어느 지방에 사는 건달 변강쇠는 동네에서 저지른 횡포로 말미암아 몽둥이 세례를 받아 마을에서 도망나오다 같은 처지인 옹녀를 길에서 만난다. 응큼한 변강쇠는 옹녀를 보자마자 속궁합부터 보자고 하고 천하의 색녀 옹녀도 선뜻 수락한다. 천생연분임을 알게된 이들은 함게 도방살이에 오른다. 게으름뱅이 변강쇠가 돈을 전부 탕진하자 보다못한 옹녀는 산에 들어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지리산에서 심기일신한 변강쇠는 나무를 하러간다. 배운 것이 없고 게으른 변강쇠는 마을의 수호신 장승을 땔감으로 패온다. 옹녀의 지청구도 잠깐, 변강쇠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장승들에 의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는 장승 동티로 죽는다. 다시 과부가 된 옹녀. 언체인드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변강쇠는 영혼으로 다시 등장한다.
[제2부] 옹녀는 변강쇠 장례치를 돈이 없어 변강쇠를 치워주면 같이 살겠다는 조건을 건다. 옹녀에 반한 승려, 초랑이, 가객, 사물패가 덤벼들지만 변강쇠 영혼이 주문을 걸어 모두를 죽인다. 이때 옹녀의 자태에 매혹당한 진행자가 급살맞은 여덟 송장을 각설이패와 함께 치우겠다고 나선다. 길을 가다 쉬려고 송장을 내려놓지만 송장과 각설이패 모두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송장은 천근만근, 꿈쩍도 안한다. 자기네 참외를 서리할까 싶어 급습한 움생원도 상관초를 얻어피우려다 송장에 붙어버리고 무리지어 들어온 사당패, 엿장수도 연이어 붙는다.(나중엔 관객까지 동원해 거대한 인간 고리를 만들어낸다.) 계속 장난치는 변강쇠 영혼은 보다 못해 옹녀가 용한 무당을 데려와 해원굿을 열자 변강쇠 송장만 빼고 다 떨어진다. 옹녀의 간곡한 부탁으로 변강쇠는 옹녀에 대한 미련을 접고 떨어져 나간다. 변강쇠, 세상만사 번뇌를 잊고 자기 장례식을 흥겹고 화려한 놀이판으로 장식한다.
KCISA한국문화정보원, 문화체육관광부, >문화포털-예술지식백과 <마당놀이 변강쇠전> 누리집
신목을 함부로 여긴 것은 정력 좋다는 변강쇠 놈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그만 '동티'가 나버렸고, 험한 것이 나와 버렸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 등으로 현대적으로 각색되기도 하는 <변강쇠전>에도 어김없이 장승이 등장한다. 팔도 장승이 모두 모여 변강쇠를 죽음으로 내몬다. 옴므파탈 변강쇠와 팜므파탈 옹녀의 사이에 놓인 장승들. 향토연구가 김두하 선생님은 90년대부터 장승 관련 서적들을 출간했다. 장승에 대해 궁금한 독자분들은 김두하 선생님의 책을 구해보면 궁금증의 상당 부분이 풀릴 것이다. 장승은 다분히 민속적인 문화재이다. 그러나 오래되고 낡은 유물에 지나지 않은 존재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귀한 손님'으로의 상징이 장승인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우두커니 험한 세상에 반듯이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 어떠한 경우라도 회피하지 않고 그 고민의 어귀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존재가 곧 살아있는 장승이다. 벅수 같은 놈이라 욕할 것이 아니다. 장승같은 사람은 도리어 신성시되어야 할 분이다. 조금만 어렵고 힘들어도 냅다 도망가기 바쁘다. 내 책임 아니라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 바쁜 현대인들이다. 내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누군가 내 곁에 우두커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면 그가 곧 귀인이리라. 장승을 주인공 삼은 옛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민속적인 장승의 상징이나 역사, 유래가 아니다. 벅수 같은 놈들을 지켜주는 참 벅수. 누가 손가락질해도 그 곁에 우두커니 지켜줄 수 있는 우직한 이. 그 뚝심을 옛이야기는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알량한 마음으로 금은보화를 얻고자 우두커니 서 있는 장승에게 비단을 '일부러' 걸었다가는 '이웃집 혹부리영감'의 처지가 될 것이다. 나는 부초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벅수처럼 미련스럽게도 굳건히 무언가 나만의 신념을 지키고 우두커니 서있는 벅수같은 존재인가? 오늘도 장승들은 말없이 서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