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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Apr 01. 2024

굽이길이 이야기 골목

<지네각시>가 들려주는 남자들의 판타지

  텔레비전을 켜면 여기저기 채널에서 '돈'과 관련된 방송프로그램들이 눈에 들어온다. <쇼 미더 머니>처럼 아예 대놓고 '돈'을 걸어두고 하는 콘텐츠부터 각종 투자 관련 방송채널들이 그렇고, <진품명품>에서도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의뢰인의 유물이 지닌 사료적 가치보다도 '감정가'가 아닌가 한다. 각종 소셜미디어  SNS는 물론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 OTT, 어디에도 '돈'과 연관되지 않은 콘텐츠가 없을 정도이다. 이 글을 웹에 게시하는 '브런치' 역시 '응원하기'를 통해 독자분들이 작가에게 '돈'으로 후원을 해주실 수가 있다. 우리의 일상은 물론 생로병사에 늘 함께 하는 것은 끝내 '돈'인 것이다. 파묘한 다음 본래 묻혀있던 땅에 던지는 것도 결국 '동전'이고, 행운을 빌며 분수대에 던지는 것도 '코인', 디지털 금융세계에서 '채굴'하는 것도 '비트코인'이다. 여타의 동물과 달리 사람만이 어쩌면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돈'이라는 교환수단을 만들어 사용하며 여기에 웃고 우는 짐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도박에도 '판돈'이 필요하고, 복권에도 '비용'이 지불되어야 한다. 앞날을 알아보는 점술에도 '복비'가 요구된다. 독자분들이 이 글을 보는 중에도 아마 어딘가에서 '통신비'가 지불되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 진리이므로. 우리네 옛이야기 골목에도 사람들의 사정이 담기는 만큼 '돈'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여기 '돈', '자본'과 관련한 기괴하고 으스스한 이야기 한 자락이 있으니 우선 이야기 골목에 숨은 돈이야기 하나 꺼내보련다. 


<지네미인과 만난 사람>

넷날에 서울에 낭(양) 정승이 있드랬넌데 이 사람은 첨에는 재산두 많구 돈두 많았넌데 차차 살림이 구차해데서 살 수 없게 되느꺼니 마누라랑 아덜딸덜은 동낭을 하게 됐다. 낭정승은 고만 기가 맥혀서 이제는 죽어야갔다 하구 밤에 몰래 집을 나와서 가다가 깊은 山둥으루 들어갔다. 山둥에서 멫 끼를 굶어가면서 산둥을 헤매넌데 한 곳에 가느꺼니 고래등 같은 큰 기와집이 있었다. 낭정승은 그 집이 가서 쥔을 찾으느꺼니 곤 색시가 나왔다. 낭정승은 자리 좀 붓자구 하느꺼니 첨에는 안 된다구 하더니 이 사람이 자꾸 사정허느꺼니 그카라 했다. 집안에 들어가느꺼니 색시는 돟은 음식도 갲다 주구 돟은 입성도 개저다 주었다. 그렁그렁 지내는 동안에 낭정승은 그 색시와 부부가 돼서 살게 됐다. 얼마 동안 살고 있넌데 낭정승은 집생각이 나서 가고푼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낭정승은 색시과 자기가 여기꺼정 오게 된 말을 다 하구 내가 집을 나온 후 가족덜이 어찌 됐능가 알아 보게 한 번 가보구푸다구 말했다. 그러느꺼니 색시는 본집에 돈을 보내서 잘살게 해줄 터이니 가디 말구 안심하구 여기 있으라구 했다. 그래서 낭정승은 고롬 그카갔다 하구 그대루 있었넌데 얼마를 지낸 후에 아무래두 한번 가보구푼 생각이 왈칵 일어났다. 그래서 색시과 다시 한번 본집에 갔다 오갔다구 했다. 색시는 고롬 다녀오라구 했다. 낭정승은 서울에 와서 전에 사런 집을 찾아가서 마누라보구 헹펜이 어떤가 하구 물었다. 마누라는 당달마다 원 사람이 돈을 많이 갲다 주구 주구 해서 이제는 논두 사구 밭두 사구 해서 아무 걱정 없이 잘살구 있다구 했다. 낭정승은 메칠 있다가 색시집으루 떠나갔다. 가다가 한 곳에 당도하느꺼니 갑재기 우레(우뢰) 소리가 나구 비가 오더니 하늘서 웬 사람이 내려와서 님제는 아무 데 색시한테 가는 사람 아닝가 하구 물었다. 그렇다구 하느꺼니 그 색시는 사람이 아니구 왕지넨데 너 내가 하라는 대루 하야디 하디 않으문 너는 그 색시한테 죽는다구 말했다. 그리구 여기서 좀 가면 돟은 담배대가 있을 터이니 그걸 개지구 가구 좀더 가문 돟은 담배 세 니파리가 있을 터이니 그것두 개지구 가서 색시집에 가서는 방문을 다 닫구 담배대에 담배를 넣서 피워야디 그라느문 너는 죽는다구 말하구 하늘루 올라갔다. 낭정승은 그런 말을 듣구 가넌데 좀 가느꺼니 돟은 담배대가 있었다. 이 담배를 개지구 가느꺼니 담배 세 닢이 있었다. 이것두 개지구 색시집에 들어갔다. 색씨는 새파래 개지구 아레굿에 웅쿠리구 있었다. 낭정승이 와 그러구 있능가 물어두 색시는 아무 말두 안했다. 낭정승은 문을 다 닫아 걸구 담배를 한 닢 피웠다. 그랬더니 색시는 구들 우에 쓰러뎄다. 정승은 또 한 닢 피웠다. 방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해지구 색시는 죽어 가구 있었다. 정승은 세채 담배닢을 피울라구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본즉 저에 본집이 살게 된 것이 이 색시 때문인데 이런 색시를 죽게 해서 쓰겠능가, 차라리 내가 죽구 이 색시를 살리야갔구 하구 담배닢을 내던지구 방문을 활작 열구 담배연기를 모주리 빠져나가게 했다. 그랬더니 색시는 살아났다. 낭정승은 여기 오는 도둥에서 웬 사람을 만나구 담배를 피우라는 말을 다 했다. 그러느꺼니 색시는 그 사람이란게 원은 산무이(구렁이 별칭)인데 그놈은 나와 서루 천년도(千年道)를 닦기 내기해서 누구레 먼제 사람 백(百)을 얻어서 사람이 되는가 하는 내기를 하구 있넌데 그놈두 사람 아흔 아홉 나두 사람 아흔 아홉 얻어 놓구 있넌데 나에게는 당신이 와서 百이 와서 百이 돼서 그놈이 지게 되느꺼니 나를 쥑일려구 담배연기를 피워서 나를 쥑일 수단을 쓰구 있어요, 하구 말했다. 그리구 낼 그 산무니와 쌈을 할 꺼이느꺼니 쌈할 때 당신은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구 하늘이 무너지는 큰 소리가 나더래두 절대루 밖에 나오디두 말구 또 내다보디두 말라구 했다. 다음날 색시가 나가서 산무니와 싸우넌데 하늘이 따와 부디티는 것같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조금 있으느꺼니 색시가 들어왔다. 산무니가 있던 곳에 가보느꺼니 큰 굴이 있구 그 옆에는 큰 구렁이가 죽은 시테가 있었다. 색시는 색시 살던 집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싸개지구 정승에 본집으루 가드랬넌데 가멘서 정승이 돌아다보느꺼니 그 큰 기와집은 간데없구 큰 팡구만이 보였다. 

(1937년 평안북도 채록)     

임석재, <임석재전집>1, 평민사, 1991, 81~83면


  위 옛이야기는 결코 끽연을 권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담배는 청소년에게만 유해한 것이 아니라, 성인에게도 유해한 것은 마찬가지. 더구나 <지네각시> 이야기에서 담배는 색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살상' 물질로 등장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권하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지네각시>에서 주인공은 놀랍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살미수에 그쳤다는 것.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네각시' 덕분이다. '담배'와 '자살'같은 어딘가 자극적인 소재가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런 자극적인 요소가 아니라 다름 아닌 '신의(信義)'이다. 말 그대로 믿음과 의리. 전국에서 채집되는 <지네각시> 이야기들은 대체로 행복한 결말을 맺는 민담으로 꾸려진다. 이 서사군에 비극이 자리하지 않는 주된 비결은 바로 '신의'에 있지 않을까 싶다. 

  옛이야기에서 이렇게 절박하고 절실한, 나아가 섬뜩하기까지 한 오프닝은 극히 드물다. 주인공은 대체로 기혼남성이다. 혼례만 올린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릴 능력이 충분하다면 이런 소름 돋는 오프닝은 없었을 터. 허나 그는 처자식을 먹여 살릴 능력이 충분치 못하다. 가장으로서는 빵점 아비인 샘이다. 그의 가슴에 죄책감이 밀려들고 무능으로 인한 우울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산으로 옮긴다. 눈빛은 이미 저세상에 간듯하였을 것이다. 나무에 목을 메어 넋을 달리하려고 하는 순간! 한 여인이 나타난다. 이야기에 따라 이 구절은 '부유한 기와집을 발견'하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위 이야기에서는 죽으러 가는 도중에 부유한 집을 발견하고 마음을 달리하게 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대궐 같은 집에 여인이 홀로 사는데, 대체로 이들 여성은 '과부'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둘은 동숙을 시작하고 일종의 '사실혼' 관계에 이르게 된다. 기혼남성의 재가와 과부의 재취가 등장하는 이야기인 것. 이러한 혼인형태가 <지네각시>에 나타나는 까닭도 따로 있을 듯싶다. 여하간 부유한 '세컨드' 여인을 만나면서 무능한 기혼가장의 주머니는 넉넉해지고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설화에 따라서 아예 지네각시가 많은 용돈을 쥐어주면서 나가서 놀다 오시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인공 설정이 '한량'으로 되어 있을 정도이다. 풍족해진 덕에 넉넉한 제2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에도 남자의 마음 한 켠에는 두고 온 처자식이 걸린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사내다. 그리고 그 지난 것이 그리워진다. 

  만류하는 여인을 설득해서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사내. 고향을 가보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쓰러져가던 집은 재건축 레노베이션이 되어 있고, 아이들과 아내는 브랜드 옷을 입은 듯이 겉모습이 달라졌다. 이들의 삶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사내의 '새'여인 곧 지네각시 덕분이다. 지네각시가 남성의 전처 가정에 매달 큰돈을 보내왔던 것이다. 아이고 고마워라! 남성은 안심이 된다. 본처는 오히려 남자에게 얼른 후처에게 돌아가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돌아오는 길, 남자는 신이한 존재를 만난다. 조상신, 아버지, 신령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되는데 하여튼 이들이 사내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다. '너 요즘 편치? 네가 만나는 그 여자, 지네야! 그 여자랑 살면 너는 제 명에 살지 못하지! 담배를 태워서 여인을 죽여야만 해! 그래야 네가 살아!' 이런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유형에 따라 의심을 품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훔쳐본' 결과 후처가 각시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지 않겠는가! 끔찍하게 생긴, 흉물 지네가 지금 내게 유복한 삶을 주는 후처라니! 냉큼 죽여야 내가 살겠구나. 뻐끔뻐끔! 니코틴을 잔뜩 충전한다. 지네여인은 사내의 끽연에 두려워한다. 여인의 목숨이 끊어지려는 찰나! 남자는 정신을 차린다. 앗차! 이 여인 덕에 내가 살게 되었고, 본처 식솔들도 생계걱정을 덜게 되었지 않은가! 에이, 차라리 내가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자. 이처럼 '진국'의 각성을 하기란 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에 의존하여 '기생'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대체로 '배은망덕'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경에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 그들은 도리어 너를 물려고 들것이다'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남성은 결코 그렇게 배은망덕한 존재가 아니었다. 후처를 들인 셈이지만, 남녀관계를 떠나 부부로서의 신의를 마땅히 지켜야 할 노릇이다. 그저 몸과 마음이 즐겁기만 한 것이 부부는 아니다. 그것은 비현실일 뿐이다. 그렇게 각성을 하니, 진실을 알게 된다. 

  귀가하던 도중에 만난 존재는 지네각시와 변신경쟁 중인 구렁이다. 남자가 신의를 지킨 덕에 지네각시는 구렁이와의 변신경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여기에서 설화 유형에 따라 용이 되어 승천하거나 완전한 여성이 되어 남성과 백년해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본 글에서 '모셔온' 이야기에는 지네각시가 후처로 자리매김을 하고자 금은보화를 들고 남성과 본처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나온다. 남자는 모든 것을 얻어 돌아오는 승자의 모습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 이야기에 당대 남성들의 판타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하곤 한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단순히 남자들의 판타지로 그치기에는 어딘가 심상치 않은 설정들이 해당 이야기에 놓여 있다. 우리네 옛이야기 골목은 어디까지나 민초들이 만든 민간서사의 돌담길이다. 그러니 설정과 구성이 성글고, 단순하며,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 이러한 옛이야기를 남다른 눈으로 들여다보면 또 남다른 무엇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거담제로 쓰이는 한약재 '오공'이 곧 지네이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서 학계에 학술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학술적인 시선보다도 <지네각시> 이야기는 지갑과 통장이 서운해질 때쯤이면 떠오르곤 하는 옛이야기이다. 이야기 속 남자처럼 필자 역시 독자들과의 '신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 연재날짜를 지키는 것이 그것 일터. 우리가 신용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뜻밖의 부귀영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복권을 사러 갈 때의 마음 같은 희망이 <지네각시>에는 깃들어 있다. 방 한켠에 '돈벌레'가 지나간다. 아이고 흉측해라, 하지만 때려잡지 않으련다. 혹여 돈복이 날아갈까 무서워 말이다. 혹시 아는가, 저 흉물스러운 그리마 돈벌레도 지네각시의 사촌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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