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에서 오물거리는 이야기 사탕
<특재 있는 삼 형제> / <수수께끼 말>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분은 자신만의 ‘음성’과 ‘음색’을 지니셨을 것이다. 우리는 ‘소리’를 통해 듣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목소리를 지니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음성기호를 시각 기호 못지않게 중시하는 것이 우리 일상인 것이다. 아래의 이야기들도 본래 데시벨로 측정되는 사운드였을 것이다. 그 음파의 높낮이는 파도처럼 어디론가 흩어져버렸지만 들리지 않고 다만 보이는 문자를 통해 이렇게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우리의 주문은 다만 이것이다. 그 ‘옛날’이 언제 적을 이르는지 알 길 없다. 다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옛날이 다시 펼쳐질 뿐이다. 주문을 외는 순간부터 감잡을 수 없는 그 오래되었다는 옛날이, 호랑이가 정말 끽연이 가능했던 짐승인지 모를 그 시절이 우리의 귀와 눈을 현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땅에 지층이 있고, 하늘에도 구름층이 있듯이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서사에도 층위가 생기곤 한다. 그 이야기의 단층들을 학자들은 ‘유형’이라고도 하고, ‘각 편’이라고도 하지만, 이곳 신당에서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저 이야기를 이야기로 듣고 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아쉬운 것은 이곳 신전의 이야기들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하간 이야기 하나를 보자.
〈특재(特才) 있는 3형제〉
넷날에 삼형제(三兄弟)가 있넌데 하나는 먼말듣기라는 이름이 있구 또 하나는 야드기라는 이름이 있구 또 하나는 따깍열쇠라는 이름이 있었다. 먼말듣기는 아무리 먼 곳에서 하는 말이라두 다 잘듣는 재간이 있구 야드기는 암만 깊은 강에다 집어넣어두 옅다구 빠자죽디 않구 나오는 재간이 있구 따깍열쇠는 아무리 잘 장가 논 자물쇠라두 딱각 하구 여는 재간이 있었다.
한번은 이 삼형제가 옥에 갇치게 됐다. 하루는 먼말듣기가 가만히 듣어보느꺼니 관속덜이 옥에 갇친 삼형제는 내일 다 쥑이야 한다구 말하는 거이 들렸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느꺼니 따깍열쇠레 고롬 우리 도망가자 하구 옥문에 장가 논 자물쇠를 따깍 따구 야드기만 기테놓고 둘이서 도망텠다. 다음날 관속들이 옥에 와서 옥문을 열어 보느꺼니 하나만 남아 있구 둘은 없어데서 할수없이 야드기만 대동강(大同江)에다 집어넣서 죽일라구 했다. 그런데 야드기를 암만 깊은 데다 집어닣두 빠져죽디 않고 옅다 옅다 하멘 나와서, 사뚜는 할수없이 너덜 재간 용타 하구 놯아 주구 상을 주었다구 한다. (1934년 채록)
임석재(任晳宰, 1903~1998), <임석재전집1권>, 평민사, 1991, 87~88면.
〈특재(特才) 있는 3형제〉라는 제목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에 채록된 옛이야기에는 제목 그대로 삼 형제가 등장한다. 위 이야기에서 형제들의 이목구비, 인상착의가 설명되지는 않지만, 다른 유형들에서는 대체로 ‘쌍둥이’ 형상을 한 형제들로 나타나곤 한다. 아마, 이 친구들도 얼굴은 모두 똑같은 일란성쌍둥이였을 것이다. 관속들이 바꿔치기 한 형제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틀림없이 똑같은 얼굴들을 한 형제이다. 독자 분에 따라서는 이런 형제서사를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으로 접한 분도 계실지 모른다.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형제이야기들의 한 갈래인데, 이들 유형은 우선 재미난 이름이 청자를 사로잡는다.
먼말듣기, 야드기, 따깍열쇠. 여기서는 이런 이름이다. ‘성씨(姓氏)’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김먼말듣기인지, 최야드기인지, 박따깍열쇠인지. 이들이 무슨 가문의 후예인지, 신분이 어떠한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남형제들인 것 같고, 나이와 얼굴이 비슷할 것이란 추정이 가능할 뿐. 위 이야기는 짧은 유형이라, 대체 형제들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역시 기술되지 않는다. 먼말듣기가 간수들의 수다를 엿들어보니 당장 내일 형 집행을 할 것이란다. 무슨 죄 때문에 포획된 것인지 영문도 알 수 없지만, 어쩌다 사형판결까지 받은 것인지 도 알 수없다. 이들이 아는 것은 ‘내일’ 자신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는 것뿐이다. ‘따깍’, ‘철커덕’, 따깍열쇠가 옥문을 열었다. 야드기만 두고 나머지 형제들은 냅다 도망갔다. 그런데 이들은 비겁한 형제들인 것이 아니다. 아우 야드기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두고 간 것이다. 간수들이 형 집행을 하려고 보니 한 ‘놈’만 있고 두 ‘놈들’은 어디론가 달아난 뒤였다. 남아있는 ‘녀석’이라도 깊은 물에 빠뜨려야겠다. 첨벙! 빠진 곳이 대동강인지, 낙동강인지, 한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배권력이 피지배권력의 캐릭터로 보이는 이들을 아무런 까닭도 없이 깊은 강에 빠뜨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고 얕다, 얕다.” 야드기에게 어떤 수심이라도 목욕탕의 탕에 불과하다. 관에서는 죽이려고 애를 써보지만 민을 상징하는 야드기는 아무리 빠뜨려도 다시 고개를 내밀고 내민다. 민중의 숨을 끊으려고 해도, 민중의 호흡은 들숨과 날숨을 이어가고 또 이어가는 것이다. 사또는 탄압과 학살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도리어 상을 내린다. 민중의 능력을 지배계급이 인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러한 일이 어느 시대, 어느 국가라도 현실에서 발생한 적이 ‘역사’로 기록되던가? 그런 적이 정말 있을 수 있는가? 아마도 반대인 경우가 ‘진실’ 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이 끊임없이 부활해 온 것만큼은 ‘사실’이지 않은가? 성경의 예수도 어쩌면 민중 영웅일지 모른다. 십자가 형틀에서 죽었지만 그 사나이는 끝내 부활하였고, 승천했다고 기록한다. 〈특재 있는 형제들〉 이야기에는 단순히 민담으로 그치기에는 어딘가 기묘하고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들은 어떤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신격을 지닌 존재들이 신격을 잃어가면서 민중 형제로 전락하고, 지배계급의 지배질서에 굴복해야 하는 사정이 발생된 것은 아닐까? 재치 있는 이름은 단순히 이름 모를 구전작가의 작명센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흥미로움으로 말미암아 이 이야기는 강한 기억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쌍둥이들의 생명력만큼이나 끈질긴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막스 뤼티는 그의 작은 논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민담은 인간, 사물, 에피소드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형상들이 서로 낯선 것처럼 모든 형상도 자신에게 낯설다. 민담은 등장인물을 정신적으로도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다.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의 통일성은 쪼개지고 각각의 장면 하나하나는 그 등장인물들의 구성 요소 하나만을 알고 작용시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모든 구성 요소는 결말에 이르러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막스뤼티著·김홍기譯, 「유럽의 민담」, 보림출판사, 2005, 79면.)” 형제들 각자의 기능은 다만 ‘한 가지’ 일뿐이다. 어쩌면 한 뛰어난 존재, 신적인 존재가 갖고 있었을 거대한 능력이 분산되고 분해되어 여러 형제로 나뉘었을지도 모른다. 그 능력은 이들 이야기 안에서 다시 재조립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수수께끼 말〉
넷날 시골 사는 사람 하나이 과개보갔다구 서울루 가드랬는데 피양 지나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황주지경(黃州地境)에 오너꺼이 어떤 이팔(二八) 체네가 모캐(목화)를 따구 있었다. 그래서 모캐두 많이 됐구나 하멘 말을 건느꺼니 그 체네는 부담마라구 했다. 이 말을 듣구 이 사람은 무슨 말인디 알 수 없어 길을 가멘서 그 말으 뜻을 생각했다. 그룬데 종내 알 수가 없어서 평산(平山)서 자멘서 그 집 쥔 노친네과 그 말을 하구 부담마가 무슨 말인가 물었다. 노친네는 웃으멘 삼태기라구 했다. 이 사람은 또 알 수레 없어 가멘 그 뜻을 알라구 했넌데 알 수레 없었다. 그러다가 개성(開城)에 와서 어떤 넝감과 그 말을 하구 삼태기가 무슨 뜻인가 물었다. 넝감은 논두뱀이라구 했다. 이 사람은 또 몰라서 가멘 생각해 봐두 알 수가 없었다. 모화관(慕華館) 역게 와서 아르넉 사람 하나를 만나서 그 말을 하구 그 뜻을 물어 봤다. 그러느꺼니 그 사람은 ‘과개하갔다구 불원천리(不遠千里) 온 사람이 그런 것두 무르구 과개보겠다구 하능가. 부담마라는 것은 다래가 없다는 말이구 사태기라는 것은 재담이란 말이구 논두뱀이는 답답하단 말이다’라구 말해 주었다. 이 사람은 그 말을 듣구 그런 말 하나투 모르멘서 과개보겄다구 서울에 온 거이 부끄러워서 고만에 집이루 돌아오구 말았다구 한다. (1936년 채록)
임석재(任晳宰, 1903~1998), <임석재전집1권>, 평민사, 1991, 303면.
정지은 선생은 퐁티의 저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주요 저서인 「지각의 현상학」에서 ‘노래하듯이 말한다’고 쓴다. 이 문장을 비유나 은유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철학자는 말하는 주체와 노래하는 주체가 같다고, 또는 말의 바탕에 노래가 깔려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몸의 철학자로 알려진 메를로 퐁티는 의지적이건 무의지적이건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몸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몸의 의식을 육화 된 의식이라고 명명한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내 안에는 한결같은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체성은 낱말도, 낱말의 의미도 의지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이 주체성은 노래하듯이 말하는데, 세계 속에서 살아 있는 몸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거주하는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낱말이 탄생하고 낱말의 의미가 생겨나는 것을 즐긴다. 노래하듯이 말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세계에 거주하면서 타인과 교류하는 몸을 지녀야 하고, 즐거운 감정을 가져야 한다. (정지은, 「배반 인문학 말」, 은행나무, 2023, 10면.)”
노래한다. 노래하듯 말한다. 말이란 노래의 다른 표현인가? 노랫말처럼. 말귀를 알아들어야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새들의 지저귐은 새들의 노래는 새들의 언어이고, 고래의 노래 역시 고래들의 언어이다. 사람의 노래는 사람의 사연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을 알아야 음식을 떠먹는다.
과거 보러 상경한 촌사람의 사연을 담고 있는 〈수수께끼 말〉에는 언어의 비밀이 담겨있는 듯하다. 옛 평양에서 옛 한양땅까지 가는 동안 세 번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부담마’, ‘삼태기’, ‘논두뱀’ 이 삼음절을 사내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릇을 모르니, 떠먹을 수도, 퍼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을 먹을 줄 모른다. 말을 삼킬 줄 모르니 말을 내뱉는 줄도 모른다. ‘모화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석자를 만나 말귀를 열게 된다. 아, 그런 뜻이었구나! 탄식에 이른다.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국가고시를 보려는 수험생이 이렇게 이해력이 뒤떨어져서야 원! 스스로 반성하는 뜻에 과거를 포기한다. 그래도 이 옛이야기 속 사내는 적어도 ‘양심’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 말귀를 못 알아들을수록 보다 큰 소리를 떵떵거리지 않던가? 귀는 닫고 입만 열고 속사포로 맹공격을 퍼붓지 않던가?
우리는 같은 나라에 속하고, 동일한 언어권에 속한다고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쑤께끼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풀이가 없이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옛이야기를 전하는 샤먼의 신당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샤먼 역시 방언이 터지기 전에 우선 귀부터 열어둘 일이다. 입 속에 이야기사탕을 오물거린다. 기억으로 사르르 녹아들 사탕들을 하나 둘 꺼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