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차 오후예요. 3주 전에 머물렀던 공간인데 새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왓따이 공항의 국제선은 이번 여행 때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라오스에 도착한 첫 날도 이른 새벽시간이어서 내리자마자 환전하고 바로 택시에 오른 기억뿐이니까요. 라오스의 맛?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니 들어가 봐야겠어요. 어차피 이틀 뒤 마지막날에 다시 오겠지만 떠나는 날엔 사람들이 많을 테고 그나마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건 어쩌면 지금뿐이지 않을까 싶네요. 특별히 어딜 갈 곳이 있는 것도 누군가 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국제선은 국내선과 동일한 구조라고 해도 확연히 다른 느낌이에요. 기분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선은 국제선 보다더 공간이 협소한데 반해 국제선은 라오스 처음 도착했을 때의 신선함과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지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앤디님은 다른 숙소에서 머무는데 가는 길엔 인드라이브를 타고 간다고 하시며함께 갈 거냐고 그러시길래 저는 그냥 혼자 가겠다고 그랬네요. 함께 하는 여행도 좋지만 그러면 혼자 가는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단 생각이 들어서라죠. 인드라이브? 그러고 보니 라오스로 가는 첫날 라운지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떤 나이 드신 분이 저에게 인드라이브 함께 가실래요?라고 묻길래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하고 거절을 한 기억이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인드라이브를 검색해 보니 태국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던 그랩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빠르게 인드라이브를 다운로드하고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번호가 몇 번이었지 하고 고민하던 차에 휴대폰 갤러리에 저장해 놓은 라오스 첫날에 담아놓은 심카드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서 바로 참고해서 번호를 입력했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 많이 나와봐야 65천 킵이어서 바로 국내선으로 가서 인드라이브 콜을 잡았어요. 이전까진 공항에서 들어갈 땐 7불이나 15만 킵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에 반값이라니요. 제 생각대로 고집을 부렸으면 또 그렇게 15만 킵이나 주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갔을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앤디님 덕분에 더 저렴한 가격으로 숙소에 갈 수 있게 됐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인드라이브 택시를 타고 마지막 숙소로 왔어요. 10만 킵을 건네었는데 역시나 잔돈이 없다네요. 그래서 부랴부랴 예약한 호스텔에 가서 잔돈을 거슬러서 택시로 갔는데 제가 탄 택시와 호스텔 앞에 있던 차가 동일한 차종의 동일한 색상이었던 거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보조석의 문을 열었는데 어떤 분이 놀라는 표정을 짓고 저도 너무 놀래서 순간적으로 두 손바닥을 들고 오 쏘리 아임 베리 쏘리라고 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으니 그 모습을 본 해당 차주가 웃으면서 이해를 하더라고요. 제 표정을 본 거죠.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뒤편에 주차된 택시에게 가서 돈을 지불했더니 고맙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기분 좋게 웃으며 숙소로 돌아왔네요. 숙소에 다 왔다고 너무 마음을 내려놓은 건 아닌가 싶어요. 하하하
예약한 숙소의 잔금을 치르고 타월 데파짓을 위해 1달러를 맡겼어요. 10만 킵을 맡겨야 하는데 10만 킵이 없어서 그냥 달러를 맡겨도 되냐고 하니 문제없다고 하네요. 다행이에요. 가는 날 택시를 미리 예약해도 되냐고 하니 미리 잡기는 어렵기에 가는 날 오전에 다시 해보라고 하네요. 아쉽지만 이곳은 호텔이 아닌 호스텔이어서 그런 것인지 오히려 인드라이브를 잡으라고 권하는 분위기예요. 그래서 택시는 떠나는 날 다시 생각해 보고요. 가방을 메고 받은 타월을 들고 따라 올라가니 화장실과 샤워실을 보여주고 제가 이틀간 머물게 될 공간을 설명하네요. 그러고 바라본 숙소의 공간이에요. 캡슐호텔은 아니지만 예약할 때 넓고 깔끔한 데다 한국인들의 조식리뷰가 일품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예약을 했는데 막상 들어오니 정말 조용하고 쾌적해요. 물론 실내의 조용함을 유지하는 건 여행자 개개인의 몫이기에 저도 빠르게 가방을 옮기고 중요한 물품들은 개인락커에 옮겨놓고 자물쇠를 소리 안 나게 잠그고 샤워를 하러 가야겠어요.
샤워를 하러 가는데 지퍼백에 담아 온 세면도구의 비닐소리가 안 나도록 타월로 감싸서 속옷을 들고 샤워장으로 가는 길이에요. 대낮인데도 조용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데다 루앙프라방에서의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아니라 도자기로 된 인테리어가 흡사전시회에 온 느낌이에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이곳은 수도니까요. 산골짜기 촌 동네 루앙프라방과 같을 순 없지라는 생각도드네요.
샤워장 안 벽면에 옷가지를 걸어두고 온수샤워를 위해 전자식 샤워 보일러라고 해야 하나요. 명칭을 모르겠네요. 온도가 보이더니 이내 따뜻한 물이 나와요.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의 숙소로 안착하기까지 긴장을 했던 것인지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니 노곤해지면서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에요. 같은 호스텔이어도 가격의 차이가 확실히 있네요. 게다가 이곳은 수도의 호스텔이니까요. 샤워를 하고 나서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나니 따뜻함 때문일까요. 바로 침대로 가서 눈 좀 붙여줘야겠어요.
일어나니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에요. 대략 4시간 정도 잠에 취해서 잔 것 같아요. 마저 자도 되지만 도착했으니 저녁시간의 메콩강이라도 둘러보게요. 게다가 숙소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야 하기에 메콩강으로 가는 길 사이사이를 사진으로 담을까도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근처 사설환전소도 발견하거든 환전도 하게요. 숙소를 나오면서 만약을 대비해서 마스크를 챙겨 나왔어요. 하늘이 너무 이뻐요. 그런데 퇴근 시간인 건지 차들이 한가득서있다 보니 덥지만 한국에서 챙겨 온 검은색 일회용 마스크를 쓰니 매연 냄새가 안 나서 좋네요. 루앙프라방에선 마스크가 오히려 짐이었는데 역시나 비엔티안은 예외예요. 차가 서있는 사이에 차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길을 건넜어요. 물론 혹시 몰라 사이사이 사진으로 담아요. 시간이 더 늦어지면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헤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길이 단순해서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10년 전에 처음 비엔티안에 왔을 때 보았던 메콩강의 야경이 그리웠거든요. 3주 전에 왔을 땐 그 모습을 못 보고 유원지와 같은 놀이공원만 보고 실망을 했었는데 한참을 놀이공원에서 반대편 방향으로 걷다 보니 10 년 전에 보았던 그 메콩강의 야경이 보여요. 다행이에요. 그때 그 야경이그리웠거든요. 이제 남은 건 남은 시간 잘 쉬었다가 마무리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왔으니 잔잔한 야경 옆의 유원지라고 해야 할까요. 진정 소음에 가까운 음악소리에
얼굴이 찌푸려지지만 뭐 이것도 라오스의 한 부분이니까요. 가족들과 함께 온 이들도 보이고 커플과 친구들도 보여요. 다들 표정이 즐거워 보이네요. 놀이기구를 보니 어릴 적에 동네에 어떤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아이들만 탈 수 있는 미니 관람차를 끌고 온 걸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이 있거든요. 갑자기 자연농원의 대관람차도 생각이 나네요. 글쎄요 10년 뒤엔 라오스에도 유원지가 아닌 테마파크가 생기려나요.
배가 출출한데 미리 환전하지 않았던 탓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도 다 그림의 떡이에요. 돈이 있어도 사 먹지 못하니 이거 참 난감하네요. 주머니 속에 넣어온 편지봉투 안에 잠자고 있는 달러를 조심스럽게 다시 가져가는 수밖에 없겠어요. 일단 아쉽지만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팍슨몰에 가면 환전이 좋다는 말이 있기에 생각해 봐야겠네요. 게다가 확실히 아직 이틀이란 시간이 더 있다고 생각이 드니 마음이 편하고 좋아요. 돌아오는 길에 인터넷카페를 발견했어요. 20여 년 전에 하노이에서 보았던 그런 인터넷 카페와 닮은 것 같아요. 빛바랜 비닐로 덮인 인터넷 카페의 모습에 90년대 홍콩영화의 한 장면도 생각이 나네요. 피곤했던 것인지 컴퓨터 앞에서 잠을 청하는 이도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미장센이라고 봐도 충분할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도 한때는 이런 분위기가 당연할 때가 있었지요. 동남아 국가에 오면 종종 이렇게 특정한 순간에 담은 사진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온 느낌이 들어요.
나갔다가 들어왔으니 다시 샤워를 하고요. 다들 잠을 청하는 분위기라 저도 침대로 다이빙을 했는데 잠이 안 오네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어야 했는데 뜨거운 물로 했더니 그 여파가 있는가 봐요. 그래서 가저온 탭을 보며 유튜브를 보는 중인데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어서 다시 1층으로 내려왔어요. 정수기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을 마시러 가니 밤 근무자도 목이 말랐던 것인지 연거푸 유리컵 한가득 두 잔을 마시길래 저도 잠시 순서를 기다렸다가 마셨다지요. 그러고 뒤돌아 보니 보이는 1층 로비의 아늑한 모습이에요. 따뜻한 외부 조명 때문일까요. 아마도 이런 따뜻한 장면을 본 사람은 손에 꼽지 않을까 싶어요. 어둠이 뒤덮인 이 시간에 굳이 물을 마시려고 3층에서 1층으로 혹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사진으로 담고 나서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것 같아요.
동이 트는 새 벽 녘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생각이 났어요. 지금 제 삶의 위치란 생각도 들었고요. 인생 2막으로 가는 삶의 여정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에 놓여있다고 생각을 하며 쉼을 위해 찾은 라오스 여행이니까요. 그런 어둠 속에 살며시 스며든 따스한 조명에 생각지도 않게 그간 살아내 온 힘들었던 삶에 대한 위로의 느낌을 받았어요. 첫 번째로 받았던 위로는 23년 5월에 찾아간 본화랑에서의 김윤경작가의 위로의 순간이란 전시회였거든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24년 9월 먼 타국인 라오스에 와서 우연히 마주한 따스함과 아늑함 사이에서 느낀 두 번째 위로의 순간이라니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끔은 많은 말들보다도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위로가 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