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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Mar 18. 2024

Round 2. 맷집 약한 아빠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저번에 참 좋았잖아!” 날밤이는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갓 고등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다. 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번 대화는 서로 괜찮았잖아. 근데 왜 또 도루묵?’ 정도가 담긴 말이었다.


일상적 수다나 공감 외에도, 10대 초반까지 우리 대화에는 내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자주 섞여들곤 했다. 산파술이라도 부리려 했던 걸까. 가만히 듣고 있다가 스스로 고민하도록 하는 데 제일 적합하다고 여긴 질문을 연이어 던지곤 했다. 어릴 때까지는 꽤 효과 있는 ‘유도’법이라 여겼다.


의도했든 안 했든 질문의 연쇄고리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0년 눈칫밥을 먹은 녀석도 캐치하는 듯했다. 아빠 말을 하려는 숨은 방식일 뿐이라고. 그 이후 날밤의 말수는 조금씩 줄어갔다. 의도와 유도보다 표현과 치유를 원하는 듯했다.


오늘 그냥 이랬어, 그때 저랬어 같은 내 경험담을 늘려봤다. 답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이번엔 내가 편하지 않았다. 자기검열 때문이었다. 들려줘도 될 일, 들려주면 좋을 일, 들려주면 안 될 일, 들려주기 ‘쪽팔리는’ 일을 구분해야 할 부담 때문이었다. 자기검열 속 사례담에도 숨은 무게가 얹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원하는 피드백이 있다.


‘안물안궁’의 문제도 있었다. ‘라떼’족 되기 딱 좋았다. 어릴 때는 그저 들어주기, 리액션하기, 아이 적신호에 민감하기로 충분할 수 있다. 자라게 되면 공감해줄 말과 몸짓 자체를 건네지 않는다. 오죽하면 주변에다 ‘머리 검은 고등학생 거두는 거 아냐. 무조건 기숙학교 찾아봐’라고 떠들고 다녔을까.


공부 부담과 또래 집단 속에서 하루하루 세상과 대결 중인 자녀 앞에서 그래도 뭔가를 나누고 싶어하는 부모 마음과 견줄 만한 게, 월드컵 한일전 국내파 감독의 심경 외에 또 뭐가 있을까. 산을 뽑을 힘과 세상을 덮을 기세를 지녔건만 사면초가에 빠져 무력해졌던 항우의 심정 정도?


어느 날부터 포기했다. 가끔 뭐라 하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어깨만 두드렸다. “저번에 참 좋았잖아!”에서 ‘저번’은 그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 사면초가에 빠졌었다. 하고 싶은 말은 홍수 같았지만 꺼림칙한 게 많아 제방만 쌓느라 애태우던 때였다. 날밤이를 불러 ‘이 말만은, 이런저런 식으로 꼭 해 줄까’ 수없이 망설이다 말았던 대화였다. 그 ‘저번’이 참 좋았다는 것이다.


날밤이는 내가 겪지 못한 미래를 살 것이다. 매년 역대급 최악을 갱신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대화 방식이나 표현법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말수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소중한 상대일수록 말을 줄여야 하나 보다. 얼마나 줄여야 하냐고? 글쎄, 그날 이후 ‘날밤이보다 적게’가 모토였다. 몇 살이든, 말수가 많든 적든 딱 그 아이보다는 적게. 자녀는 그저 부모 뒷모습으로 자란다니.




해결된 걸까, 대화 솔루션? 한참 모자랐다. 진짜 문제가 시작됐다. 부모에게 말이다. 하늘이 내려준 찰떡궁합 부모-자녀가 아닌 다음에야, ‘입틀막, 귀틀막’을 견뎌야 하는 부모의 심경 말이다. 패싱 당하는 것 같은 모욕감과 배신감도 들었다.


그저 받아들여야지 말하면 안 되는 상대. 말해도 꿈쩍도 안 할 법하며 가끔 그런 마음마저 무참하게 짓밟는 듯한 외계생명체. 감정의 동물이 그 생명체로부터 받는 괘씸함, 답답함, 모욕감, 그리고 보답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배신감을 감내하는 인내, 이렇게 영원히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래서 대화 솔루션을 단번에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르는 아슬아슬하고 괴로운 사랑.


‘있는 그대로 품기, 조건 없는 이해와 사랑, 넓고 든든한 울타리로 만족하기, 그러지 못하는 자기를 성찰하기’ - 이런 말들과 발가벗은 채 대결해야 했다. 인정과 보답에 매여 있음을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성찰의 절대적 가이드라인을 확신하지 못하면서, 내 사랑과 이해가 진실로 진실한지 어떻게 투명하게 비춰볼 수 있다는 말일까. 긴 여행을 마칠 무렵 진실한 대화와 사랑의 서약을 이행하고 떠나노라고, 있는 그대로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자신할 이 누구란 말일까.


그래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덮지 못했다. 세상과 인간의 정념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담겼다는 이 소설에서, 무조건적 사랑을 염원하는 이의 눈물 그리고 구원을 향한 깊숙한 질문들이 굴비 엮듯 딸려 나왔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호흘라코바 부인 vs 조지마 장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수한 사상가와 문호로부터 ‘소설가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다. 그의 최고의 소설이며 프로이트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평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심한 신체장애가 있는 어린 딸을 키우는 호흘라코바 부인은 늘 괴로워한다. 그녀는 딸을 위해 기도해주던 조지마 장로에게, 이 불행한 삶을 벗어나게 해줄 죽음 뒤의 천국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하려 한다. 오랫동안 영원불멸의 내세를 믿으며 버텨왔지만, 막상 죽고 난 뒤에 무덤의 잔디만 무성해질 뿐이라면 과연 어떨지 생각만 해도 죽도록 괴롭고 두렵다는 것이다.


조지마 장로는 그 고통에 공감하면서 내세를 증명하진 못해도 확신할 수는 있다고 위로한다. 주변 사람을 향한 완전한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힘겹겠지만 그런 사랑을 실천한다면 곧 신의 절대적 사랑에 가까워지는 것이니, 그렇게 신의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오직 그럴 때만 우리는 신의 존재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신이 안배한 영원불멸의 신국에 대해 어떤 의심도 깃들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호흘라코바는 평소 사랑과 희생을 행하고 있지만 천국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은 여전하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보상과 인정에 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고 조건 없는 절대적 사랑을 계속할 수 있느냐고 발작하듯 항변한다.


호흘라코바 부인  :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요! (…) 눈을 감고 이렇게 자문한답니다. ‘내 인도적 봉사를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아예 알아주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며 괴롭히거나 심지어 힘 있는 기관에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땐 어찌 될까? 사랑을 계속 실천할 수 있을까 아닐까? (…) 나도 결국 피고용인이야. 당장 대가를 원해. 그러니까 칭찬 말이야.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보답(repayment)해 주길 원한단 말이야. 나는 다른 식으로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해!’
조지마 장로  :  그건 오래전에 어떤 의사가 제게 한 이야기와 똑같군요. (…) 꿈속에서야 (…) 정말로 필요하다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라도 걸머지겠다고 각오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실제로는 단 이틀도 그와 같은 방에서 지내기 힘들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 누구는 식사를 너무 오래 해서, 또 누구는 감기에 걸려 코를 계속 풀어대니까 말입니다. 누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나는 곧 적대적으로 변해버리지요. 하지만 언제나 개개인을 더 많이 증오하게 될수록 반대로 전체 인간성에 대한 사랑은 더욱 불타오르더라고 말하더군요.
호흘라코바  :  (…) 그럴 때는 어떻게 하냐고요? 결국 절망(despair)에 빠져야 하는 건가요?


딸에 대한 사랑이 고통스러웠던 호흘라코바는 불안과 절망을 넘어 다다를 수 있는 매끈한 평지를 원했고, 소심한 사랑의 둔덕 너머에 높이 솟은 무조건적 사랑의 봉우리에서 휴식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 봉우리는 없는 건지 묻는 것이었다. 조지마 장로는 이렇게 답했다.


조지마  :  아닙니다. 부인께서 이처럼 상심하신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보답은 뒤따를 겁니다. 부인께서는 그토록 깊이 진실하게 자기를 알고 계시니까 이미 많은 것을 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만약 부인의 진지함이 그저 부인의 솔직함에 대한 저의 칭찬을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면 진실한 사랑이라는 성과를 하나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건 그저 부인의 헛된 상상 속에만 머물 것이며 삶 자체도 환영처럼 아른거리며 흐려져 버릴 겁니다. (…)
호흘라코바  :  잔인하게 짓밟으시는군요. (…)  장로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바로 이 순간에야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배신을 참을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릴 때 정말로 장로님으로부터 제 진실성을 칭찬받길 원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조지마  :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 다른 사람에 대해서건 자신에 대해서건 사악해지지 마십시오. 부인의 마음속의 추잡함은 부인께서 이미 마음속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정화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도 역시 피하십시오. 두려움이란 그저 온갖 거짓의 결과일 뿐입니다. 사랑을 성취하려 할 때는 자기의 소심함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사랑을 실천할 때 자신의 어떤 어리석은 행동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사랑을 실천한다는 건 몽상적 사랑에 비해 가혹하고 두려운(harsh and dreadful) 것이니까요. (…)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에게는 말하자면 완벽한 학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하자면, 부인께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졌음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될 순간, 말씀드렸듯 바로 그 순간에 부인은 갑자기 원하는 곳까지 도달했음을 아시게 될 것이며, 언제나 부인을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셨던 하느님의 기적적인 힘과 마주칠 겁니다.



조금씩, 천천히, 여전히 사랑하기


조지마 장로는 자신에게든 상대에게든 남에게든 사랑을 전시하는 것은 몽상이며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매끈하게 다듬어 내보일 수 있는 종류의 괴로움이 아니다. 그러니 제 사랑의 못생김에 진정으로 상심하면서 두려움의 눈물을 떨구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그 가혹함을 버틸 때에야 비로소 진실한 사랑이 말을 걸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사랑이란 정말 그런 것일까. 매 순간 자기를 비춰보는 괴로운 활동성인 것일까. 사랑이 결코 무게로 다가가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이 고스란히 담기기엔 나와 너의 그릇은 비좁을 수밖에 없는 탓에, 스스로를 향해 그 많은 욕을 다 쏟아내고서야, 그러고도 상대를 향해 자기를 닫지 않은 채 스스로 더 많은 욕을 받아내려는 순간에야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것일까. 그토록 무거운 것일까. 그 무게 속에서야 기어이 깃털 같은 기쁨과 참된 위트가 배어 나오는 삶의 기적일까. 함석헌 선생은 그래서, 눈에 눈물이 고이면 그 렌즈로 하늘나라가 비친다 하셨을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다만 이미 사랑하게 된 자 각오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랑 그거 모르니, 앞으로도 오래 그럴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자고…. 사랑이 뭔지 증명하지 못하지만 사랑에 잡혔음은 느낀다. 날밤이를 향한 마음을 앞에 두고 사전에서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단어를 하나씩 대입하며 지워나갔다. 끝까지 남은 단어는 사랑 하나뿐이었다.


있는 그대로 껴안는다는 사랑, 급하게 찾으려니 만만하지 않았다. 상대를 위한다는 몸짓 모두를 상대는 ‘요구’로 느낄 수 있음도 받아들여야 했다. 급한 사랑과 애정의 시절은 열정적이었지만 자유롭지 못했다. 그게 클수록 후폭풍도 감당하기 어렵다. 자칫 다른 사람조차 만나기 힘들어진다. 사랑도 대화도 한 번에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기보다 조금씩, 천천히, 무엇보다 여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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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사랑 #대화법

인용 대사 출처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880, 러시아. Part 1 book 2 chapter 4. 발췌 번역 인용.

이 작품에 담긴 수많은 질문은 천천히 몇 차례로 나누어 전해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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