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스트 어웨이」
스마트폰 충전하느라 공부하기, 욕 끝에 말 붙이기, 놀아놓고 즐겼다 하기, 화나게 해놓고 자기가 화내기, 부모가 친절하면 까칠하게 나와서 까칠했더니 화내기…. ‘중2병’ 개시 징후는 다채로운데 한결같다.
기분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또 다 아는 건 싫은 모양이다. 우울하냐 물어야 좋을지 놔둬야 좋을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어른이라는 건지 애라는 건지, 내 새끼 맞는지 아닌지, 이건지 저건지…. 사춘기는 외롭지만 부모도 생각보다 외롭다.
날밤이 사춘기는 ‘안 해’로 시작했다. 뭘 들어보지도 않고 안 한단다. ‘그냥’을 얹은 더블콤보도 잦았다. 단절과 거부가 시작된다. 남이면 떼버리겠는데 내 것 같아 그러지 못한다. 내 것이면 뜻대로 하겠는데 타인이니 그러지도 못한다. 나인데 나 아니면서 타인인데 타인 아닌 자녀가 거부와 분리의 강렬한 몸짓을 시작한다. 뭔가 잘못하고 있나. 부모는 불안했다.
자기이자 타인인 존재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불안과 좌절을 보여준 영화가 있었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척 놀랜드(톰 행크스)와 어떤 이의 말싸움을 보자. 척 말고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건드려서도 안 되는 심연의 척을 속속들이 건드리는 놈이 등장한다.
척은 목을 매려고 했다. 태평양의 무인도에 홀로 던져진 지 3년째였다. 밧줄을 넉넉히 꼬았다. 높은 해안 절벽 끄트머리 고목에 밧줄을 걸었다. 두려웠다. 목각 신체를 매달아 테스트를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지가 우지끈 꺾였고 인형은 절벽에 부딪히며 매달렸다. 척은 그냥 더 살았다. 머뭇거리다 실패한 시도는 머리에서 지웠다.
3년 전 독도만 한 무인도에 처음 갇혔을 때 척은 구조대 눈에 띌 확률을 계산했다. 남한 면적 13배 바다의 무인도를 죄다 뒤져야 할 판이었다. 시간의 고통을 흐리는 건 시간뿐이었으나 늘이는 것도 시간뿐이었던 시간이 시작됐다. 시간을 생명으로 여긴 택배 회사원이었던 척에게 세상 전부로부터 밀려난 상실감으로 널브러졌던 구조 불능, 구제 불능의 시간이었다. 마침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려 했던 것이다.
1년을 그냥 더 산 어느 날 간이 화장실용 벽체가 섬에 밀려왔다. 탈출 뗏목의 돛으로 쓸 수 있을 법했다. 먼 바다로 나간다고 구조될까만 그래도 4년 만에 탈출 의지가 샘솟았다. 바람 때를 맞추려면 서둘러 뗏목을 엮어야 했다. 아뿔싸, 밧줄이 모자랐다. ‘윌슨’이 그 절벽 꼭대기의 밧줄을 가져오면 된다고 등 떠밀었다. 척은 절벽에 다시 올라 밧줄을 걷어 왔다. 척을 밑바닥까지 아는 윌슨의 반응은 그런데 신통치 않다.
척 : 이거 봐, 이거, 보여? 응, 이거! 이제 만족해?
윌슨 : ….
척 : 그 일을 자꾸 끄집어낼 거야? 그냥 잊어버리면 안 되겠어?
윌슨 : ….
척 : 응…?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았어. 그 테스트를 해본 건 잘한 거였어. 금방 휙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 자칫 바위에 추락할 수도 있었어. 다리나 등, 아니면 목이 부러졌거나 계속 피를 흘리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도 그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아, 그렇지? 한 1년 전 일이잖아? 그러니 이제 그냥 잊자고.
윌슨 : ….
척 :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윌슨 : ….
척 : 이봐…. 우리 방금 결정한 거 아냐? 넌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나 있어?
윌슨 : ….
척 : 이런, 네가 뭐라든 저 바다로 나가는 모험을 걸겠어. 그게 여기 앉아 이 빌어먹을 섬에서 죽는 거보다 나아. 내 남은 인생을 엿 같은 배구공과 이야기나 하며 보낼 순 없다고! 입 닥쳐!
아시다시피 윌슨(Wilson)은 배구공이다. 척과 윌슨은 유일한 친구였다. 윌슨에게 기댔고 짜증냈고 자랑했고 절망마저 함께 했다. 자존감을 놔버린 자살 시도도 함께 목격했다. 거기서 도망쳤던 순간마저도 목격했다. 배구공이지만 척과 다름없는 윌슨.
척은 절대 절벽에 안 갈 작정이었다. 희망을 품고 탈출하려는 차에 뭐 하러 그때의 척과 만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밧줄을 걷어 왔을 때, 윌슨은 ‘거기 가보니 어때?’ 하며 어두운 기억을 상기시킨다. ‘뭔가 해 보려다 그냥 도망쳤잖아?’라고 꼬집는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라며 반문하더니 이어서 ‘먼 바다로 나간들 죽기 십상인데, 이번이라고 제대로 하겠어?’라며 비꼬기도 한다. 척은 슬슬 윌슨을 탓한다. 너야말로 그동안 아무 생각 없지 않았냐고. 윌슨이 빼도 박도 못하는 비아냥을 날린다. ‘희망을 놔버렸던 게 누구시더라?'
“입 닥쳐!” 척은 폭발한다. 자기를 붙든 배구공 윌슨을 내차버린다. 너덜너덜했던 척을 본 윌슨을, 자살과 테스트를 부추긴 윌슨을, 그러면서도 비웃는 윌슨을, 척을 비하하며 탈출을 비관하는 윌슨을, 척만 손댈 수 있는 심연을 속속들이 건드리는 윌슨이자 척을 발로 빵 차버린다.
척은 곧바로 소스라치게 놀란다. 정신없이 윌슨을 찾아 헤맨다. 간신히 윌슨을 찾아내자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껴안고 운다. 오랜만에 분칠해주며 보듬는다. 거울 속 자기가 꼴 보기 싫을 때도, 눈썹이 짙어 검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눈이 초롱초롱해 밝은 인상을 준다고 목소리가 또랑또랑해 전달력이 있다고 격려하듯 윌슨을 품어 기어이 한 자리 내어준다. 윌슨은 척을 차지하고 있다.
후반부에 윌슨을 잃고 절망에 빠지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척은 뗏목을 타고 간신히 먼 바다로 나갔지만 척이 잠든 새 윌슨이 바다에 떠내려간다. 윌슨을 부르며 허겁지겁 바다로 뛰어든다. 폭풍우에 시달린 몸이라 윌슨에게 닿지 못한다. 가망이 없어지자 12번의 “윌슨!”과 7번의 “미안해!”만 담긴 대사를 터뜨리며 오열한다.
노를 바다에 던져 버린다. 낚시도 팽개치고 뗏목에서 쓰러진다. 섬에서는 목매달기 주저했지만 그런 자기를 손가락질하던 윌슨을 상실하고는 마지막 생명줄을 주저 없이 버린다. 정말로 삶을 놓는다. 자기를 갈구는 분신을 내차버렸다가 황급히 다시 품더니, 돌이킬 수 없이 상실했을 때 삶을 놓는다.
자녀를 열 손가락에 빗대지만 주식에 빗대도 용서하시길. 한때 수익률 200%를 찍었던 주식 1,000주가 있다. 그걸 반의 반 토막으로 팔 수 밖에 없게 됐다면 어떨까. “내 애 아닌 것 같아.” 사춘기 자녀의 부모끼리 늘 나누는 말인데 생략된 말도 있다. ‘200% 사랑스럽고 살갑던 애가….’
살갑던 교감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제스처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의 중심에서 독립을 외쳐도’ 양육자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 덕분(?)일까. 단단히 붙은 걸 떼 내려면 힘도 그만큼 더 줘야 하듯 애착이 강했을수록 분리의 몸짓도 강하더라. 사춘기 자녀가 강하게 떼 내면 부모도 강하게 뜯겨 나간다.
날밤이와 질 좋은 애착 관계였다고 여겼기에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 다 잘 될 거라고만 믿었던 것이다. 거부의 몸짓이 완연해질 무렵 과대망상은 피해의식으로 나아갔다. 내 아이는 다르게 자랄 거라는 확신의 크기만 한 상실감이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 더 불안했다. 영원히 밀어내는 거 아닌가. 이상한 길로 가버리는 거 아닌가. 시간을 더 내야 하는 걸까…. 떨어질 계절에 떨어지는 자녀를 두고 부채감과 오지랖만 발동했다. 정신분석학 가라사대 부모의 분리 불안이었다.
상실과 부재를 염려하는 불안이었던 같다. 내 것이라 여긴 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와 그걸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예감이었다. ‘살가운 아이였어. 나 하기 나름이야. 다시 마음을 훔칠 수 있을 거야.’ 자녀의 분리 몸짓은 더 세졌고 부모의 불안도 따라 커졌다.
가끔 내차버리고 싶을 만큼 육아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부모였어도 자녀가 자기 분신인 한 격렬한 분리를 직면하는 건 쉽지 않다. 못생겼어도 내 것이었던 다리가 뜯길 때와 비슷할까. 『1984』 속 빅브라더 국가의 3대 구호 가운데 하나는 ‘자유란 구속(slavery)’이다. 빅브라더의 질서와 권위에 묶이지 않은 채 스스로 절대로 자유로운 상태를 감당하겠냐는 물음이다. 사르트르도 『존재와 무』에서 완전한 자유란 아무것도 없는 무일 뿐이기에 그 불안한 현기증을 견딜 수 없다고도 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밀려나나?’ 부모의 현기증을 사춘기 자녀가 이해하는 건 무리였다. 자녀는 제 길을 가며 시행착오를 겪을 뿐이었다. 종류가 다른 스트레스였다. 자기와 다름없던 것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분리 불안 vs 신세계를 섭렵하는 자녀의 소화불량 불안. 완전히 다른 불안의 충돌, 그게 사춘기 갈등이었다.
자기만 손댈 수 있는 자기가 있다. 자녀도 그런 존재 같다. 자기 일부 같을 때가 있다. 출산은 외화된 자기와 만나는 일 같다. 또 한편 독립적 존재다. 미래를 살 자녀기에 나를 넘어선 타인이다. 출산은 내가 아니려는 나와의 상견례 약속이기도 하다. 살 비비며 품고 살았던 애착 시기가 지나면 불편한 약속은 현실이 된다.
사춘기 반항이 토닥여줄 일이라면 부모의 상실감도 토닥일 일이었다. 일상의 성취와는 격이 다른 자기 것을 잃는 분리 불안을 견디면서 부모도 자라니 말이다. 일찍이 자궁에서 떨어져 나왔고 젖을 뗐고 집을 떠나며 자라왔듯 자녀를 어려운 손님으로 상실하는 허망한 불안을 견디며 또 한 번 부쩍 성장한다.
왕자를 만난 인어공주는 살갑던 바다를 떠나 뭍으로 올라왔다. 다리를 얻으려니 목소리와 인어 지느러미를 잃어야 했다. 언니들이 날카로운 칼을 줬다. 왕자를 찌르고 바다 속 살가움으로 돌아오라고 유혹한다. 그녀는 무수한 상실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인어공주와 왕자는 불멸의 정령이 된다.
척 속의 척조차 척 마음 같지 않은데 사춘기 자녀가 어찌 내 것으로 자랄까. 사춘기를 꿋꿋이 견딘 부모는 인어 지느러미를 잃은 듯하지만 다리를 얻는다. 그건 퇴화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조개는 진주를 품는다. 새로운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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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부모의 분리 불안 #사춘기 부모의 성장
인용 대사 출처 :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세기폭스, 2000. (각본 윌리엄 브로일즈 Jr. /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