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컬렉티드 스토리즈』
“왜 눈알을 파먹어?” 갓 초등 무렵의 날밤이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뭘 먹는 줄도 모른 채 눈앞이 뿌예졌다.
총총걸음으로 퇴근길에 오른 건 굴비구이가 생각나서가 절대로 아니었다. 아빠표 저녁을 기다리는 날밤이가 걱정됐을 뿐이지 소금 간이 흐뭇하게 밴 모락모락하는 새하얀 조기살이 아른거린 탓이 결단코 아니었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급한 발걸음을 파고든 어김없는 시장기가 내 탓도 아니었고.
아! 야속하게도, 누구 코에 붙이나 싶을 작은 놈 두 마리만 남아 있었다. 등 뒤에서 날밤이가 꼬르륵거렸다. 심란한 심경이었지만 의연하게 프라이팬을 다잡았다. 올리브유를 두른다. 바스러지지 않게 약한 불로 시작한다. 3~4분 후 뒤집는다. 노릇해지면 센 불로 수분을 말리면 좋지만 시장기가 반찬일 테니 건너뛴다. 윤기 좔좔한 조기 두 마리가 부서지지도 않고 접시에 고이 담겼다.
흰밥을 실은 날밤의 숟가락은 부지런히 올랐다. 숟가락마다 살포시 조기살을 올려줬다. 쪼그만 놈 두 마리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흠, 바라만 봐도 배부르지 않더냐고? 먹고 있어도 먹고 싶을 밥도둑놈 굴비. 김치나 김가루와 찰떡궁합. 하! 내 입은 주둥이냐 싶었다.
맞아, 어두육미랬어. 홀린 듯 대가리와 척추 그리고 등지느러미 부위와 꼬리를 노렸다. 씹고 빨고 발라먹었다. 순결한 척추와 대가리만 남은 채 접시는 하얗게 비워졌다. 새하얀 접시.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식탁에 오른 그릇은 매끈한 바닥을 보는 분이셨다. 생선 접시에도 앙상한 등뼈와 눈알 뽑힌 대가리만 남곤 했다. 살보다 대가리가 진미라시며 소리까지 내시며 빨아 드셨다. 아버지의 근검절약을 배우라고 어머니는 잔소리를 하셨더랬다. 어린 나는 은근 불편했고 어느 때부턴 ‘요즘 시대에 굳이 저렇게까지?’ 싶기도 했다.
대학으로 찾아가 입학시험을 치던 시절, 지금으로 치면 특목고를 2등 졸업하신 선친은 서울행 기차삯이 없어 지방 사범대학 입시를 쳐야 하셨다. 눈칫밥이라도 얻어먹고자 입주 과외로 버티셨고 전액 장학금 덕에 간신히 학비를 대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생선구이를 어째서 그렇게까지 드셔야 했는지 내가 조기 찌꺼기를 빨고 앉은 순간 확 왔다. 근검절약을 말씀하려던 게 아니었다. 별난 성품 탓도, 대가리와 뼈다귀의 풍미를 즐기셨던 것도 물론 아니었다. 배가 고프셨던 것이다. 드시고 싶었던 게다. 자식 삼 남매 앞 귀한 생선 두어 마리를 바라보셨을 생전의 아버지 심경이 퍼뜩 스쳐 간 저녁 식탁에서 가슴을 쳤다. 그 새하얀 조기살이, 그 부드럽고 모락모락한 자반고등어살이 얼마나 잡숫고 싶으셨을까.
한 세대의 인간이 또 한 세대의 인간과 공감하는 일만큼 쉬운 게 없다는 걸 몰랐다. 더불어 그 자연스러운 일만큼 길고 어려운 게 없다는 것도 몰랐다. 앞선 세대가 다음 세대로 바뀌는 과정, 뭔가를 거저 내주는 부모와 어른이 되어가는 자녀, 상실하는 한 인간과 물려받는 또 한 인간의 관계 변화 과정을 두루 떠올리게 한 작품이 있다.
희곡 『컬렉티드 스토리즈』를 볼 참이다. 미국 극작가 도널드 마귤리스의 작품이다. 두 여성, 그러니까 소설가 지망생 제자가 성공하고 스승은 시들어간다는 내용의 2인극 희곡이다.
‘단편소설집’이라 번역된다. 루스는 육십 언저리의 중견 소설작가다. 「타임즈」로부터 ‘용감한 새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던 전성기를 보내고 자연스럽게 과거로 밀려나는 중이다. 그리고 그녀를 숭배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젊은 제자 리사가 있다. 까다로운 스승과 햇병아리 제자라는 공식 관계로 시작됐으나, 6년이 흐르는 동안 서로의 상처를 엿듣는 친구 관계로, 나아가 스승을 잴 수 있는 제자로 변해가는 여러 국면이 몰입감 높게 펼쳐진다.
제2막 1장. 제자 리사의 첫 단편집에 ‘신세대의 상실감에 대한 날카롭고 영리한 연대기’라는 찬사가 쏟아진 날, 스승 루스는 처음으로 자기의 새 초고에 대한 평을 리사에게 부탁한다. 늘 함께 케이크를 굽는 모녀. 그런데 병으로 죽어가는 엄마가 딸에게 아주 많이 아프다는 걸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리사는 모녀 관계의 명확한 결말도 없이 이게 뭔가 싶었지만 그래도 감동적이었다고 얼버무린다.
루스 : 그래. 좋아. 네가 좋았다니 다행이다. 읽어줘서 고마워.
리사 : 제가 감사하죠. 선생님. 정말 영광이었어요. 루스 스타이너의 최신작을 그 누구보다 먼저 읽게 되다니 정말 좋았어요.
루스 : 네가 하는 말이 나한테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 알지?
리사 : 모르죠. 몰랐는데요.
루스 : 몰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니? 상호작용이라는 게 있잖아. 난 그냥 너한테 퍼주기만 하고 보답으로 뭐 좀 기대하면 안 되는 거야? (…) 나만 혼자 칭찬하고 격려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지지하고 그럴 순 없어. 나는 네 선생이고 수호자였지만, 네 친구이기도 하잖아. 나도 조금은 받고 싶어.
리사 :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루스 : 마음이 복잡하다, 나는.
리사 : 선생님? 저 질투하세요?
(…)
루스 : 질투가 아니야. - 아니지, 사실은 ‘질투일 수’도 있겠다. 작가로서의 질투는 아니야. 이건… 뭐냐면… 네 앞에 펼쳐질 네 인생에 대한 질투야. 난 멀찌감치 물러앉아서 내가 오래전에 췄던 춤을 네가 추는 걸 보면서, 자꾸 내 남은 시간을 생각하게 돼. 그거야. 알겠니? 시간.
리사는 잘나가는 단편 소설가가 된다. 그런데 장편을 내놓을 수 있어야 성인이라 불리던 문단의 통념에 힘들어한다. 끝내 첫 장편을 위해 루스의 허락 없이 루스의 오랜 상처를 끌어온다. 순수했던 시절의 루스를 점령했던 비참하고 모욕적인 사랑담. 결코 손대지 말았어야 할 그 이야기를 가지고 리사가 ‘성인’이 됐을 때 둘의 긴장은 파국에 이른다.
"내 얘기! 그거 없이 나는 뭐니? (…) 도둑년, 니 인생 써먹어!" 루스는 분노한다. 리사는 “선생님께선 저한테 출발점이셨었어요. (…) 모르겠어요. 전… 자랑스럽게… 만족하실 줄 알았어요. (…) 좋은 스승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요”라고 항변한다. 루스는 체념한 듯 싸움을 접는다. “가.”
살면서 평생 따를 만한 길잡이를 만나긴 어려웠다. 인생 길잡이 대부분은 어느 때까지만, 어느 곳까지만 데려다주는 길잡이일 뿐이었다. 낯선 길을 알려주고 가는 행인, 태권도 빨간 띠를 딸 때까지 이끌어준 빨간 띠 선배, 조력자와 이어준 지인, 대리가 과장이 될 때까지 기꺼이 도와준 과장님…. 다음 세대는 여기부터 저기까지만 데려다주는 길잡이를 따르며 자랐다.
누구 말마따나 앞선 세대의 어깨 위에 올라타 여기까지 잘 왔으면 마땅히 감사 인사로 보내드리고 다음 걸음을 내디디면 그만이었다. 앞선 세대 역시 저녁 시장기에 젖는 한 인간일 뿐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이 쉬운 일이 쉽지 않았다. 막상 ‘과장’을 잴 수 있는 자리에 오르면 존경했던 과장님(?)에 대한 삐딱한 개정판을 내놓으며 우쭐해졌다. 한편으론 부장 승진 때까지도 당연히 귀감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떠넘겼다.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앞선 세대의 마음 역시 아름답게만 흐르진 못했다.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빌려 사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비켜주는 일은 어찌 보면 돌려주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실질적 상실감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희곡 들머리에도 “모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는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글귀가 담겨 있었다.
자리를 내주는 일은 내 귀중한 것을 거저 내놓는 증여이자 실은 내 것이 아닌 것을 비우는 성찰이었다. 보답 받지 못하는 자기를 감내하는 힘들고 긴 싸움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붉은 하이힐로 밟던 탱고 스텝을 이제는 바라만 볼 뿐인, 돌이킬 수 없는 힘의 역전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당혹스러운 말이기도 했다.
자녀가 자라 다시 부모로 저무는 일은 세대 계승, 그러니까 교체의 정점인 듯했다. 앞선 세대의 방을 드나들면서 그들도 한 인간이거나 혹은 먼저 시작된 청춘일 뿐임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음 세대와 만나 내가 아주 많이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일. 아름답고 환희에 찬 그 과정은 조기 뼈다귀를 향하는 배고픈 젓가락질만큼 당연했지만 그 꺼끌꺼끌한 식감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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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세대
인용 대사 출처 : D. Margulies, 『컬렉티드 스토리즈(Collected Stories)』(1996), 정윤경 역, 연극과 인간, 2017. 제2막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