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0. 응답하라 꺼끌꺼끌한 20년
루키 아빠 vs 상극 아들의 넓고 얕은 격투기
“희한해. 당신은 대한민국 2% 아빠야.” 아들이 10살쯤이던 10년 남짓 전 옆지기가 툭 던진 말이었습니다. 운전 중이던 아빠는 그만 등골이 서늘해지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목적지마저 까먹고 말았다 합니다.
서늘해질 수밖에요. 아빠는 불행히도 저 다빈치코드 너머에 ‘아빠로서만 그래!’가 숨었음을 찰나적으로 꿰뚫은 듯합니다. 보이는 그대로의 낱개는 그저 거들 뿐 곧바로 그 너머의 연결 의미가 메아리치는 유형. 그렇습니다. MBTI의 의미 직관형(N)이 틀림없습니다. ‘괜스레 의미 부여’라는 말을 맨날 듣는다는군요. 옆지기의 저 말 너머에 담긴 불의에 저항한답시고 괜스레 남편 권리선언문을 낭독하다 새벽녘 가출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건 오프더레코드.
고개도 갸웃했습니다. 자기 양육 스타일이 평범하다 여겼으니까요. 일반적이다는 표현보다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적당할까요. 세랭게티 야생동물의 낮잠처럼 누구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방식이라 여긴 듯합니다. 설사 98%에게 낯설게 여겨지더라도 곰곰 생각하면 응당 그려질 그림, 그러니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큰 그림을 따를 뿐이라 우겼던 문제적 아빠입니다.
이 아빠의 머릿속은 ‘내 아빠짓이 왜 희한하지? 그걸 희한하게 여기는 원인은?’ 같은 생각으로 급발진해 버리니 운전 목적지가 어디였지 하는 기억도 가출한 지 오래가 돼 버립니다. 원리와 원인을 헤집어 그림을 그립니다. 판단 습관은 사고형(T). 생활방식은 계획 지향적 판단형(J).
여기까지는 발단, 전개, 위기더군요. 절정은 N과 T와 J의 온 기운이 주로 ‘자기’와 친해지려 하면서 펼쳐진다는군요. ‘혹 내가 뭘 고쳐야 하는 걸까? 엊그제 아들한테 한 일도 그런가?’ 등등. 아빠의 시선은 정작 옆지기나 아들의 눈길을 채우고 있는 풍경에서 가출해 자기 속을 헤집고 있군요. 흠, 딱 걸렸습니다. 가출 전문 아빠의 인간관계 속 에너지의 방향은 절정의 내향성(I).
그렇습니다. INTJ. 드물고 피곤한 유형이라는 ‘인티제’로 밝혀졌습니다. 인티제의 결말은 종종 도서관에서 맺어지더군요. 고상하고 어렵다는 책을 붙들고 찾고 읽고 한 줄로 꿰느라 진을 뺍니다. 그러면 성숙한 소통과 올바른 인간관계에 관한 자그만 성찰을 얻어가기도 한다는군요.
"왜 이럴까요?" 소통을 왜 도서관에서 찾을까요? 인티제 사전에 절대 없는 단어, 따라서 가장 대중적 단어로 답하네요. 인티제는 ‘원래’ 그렇다는군요. 트렌드에 휩쓸리는 걸 싫어한다는 설명대로 아빠는 뒤늦게 유형을 확인했습니다. 3번의 동일한 무료 테스트 결과를 못 믿어 결국 정밀 테스트 결과지까지 받아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문자 견고딕체 INTJ네요.
덩달아 아들 날밤이의 유형도 확인했다는군요. 날밤이는 서울공대 최상위학부에 다니다 지금은 군 복무 중입니다. 나름 닮은 구석이 많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 히즈, 갓! ENFP나 ESFP를 오간답니다. 녀석은 움직이려는데 아빠는 생각하고 앉았답니다. 구구절절 잘못된 만남, 그러니까 상극이었습니다. 이 설명대로면 아빠와 날밤이의 20여 년은 날밤이가 ‘버틴’ 세월인 셈입니다. 외계인 아빠의 패악질에 지쳐 월북을 감행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시간 아닌가 말입니다.
본인 기억으로는 아들과 길고 밀접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아빠였다고 합니다. 옆지기는 점심 무렵 출근해 자정은 넘겨야 퇴근할까 말까 하는 주말 없는 공연업계 PD랍니다. 양가 친지는 따뜻한 남쪽 나라. 처가는 그마저도 바다 너머. 그런데도 날밤이 어릴 때는 서울 외곽의 산자락에서 살았고, 초등 때는 시험을 안 보는 학교라는 말에 솔깃해 서울 귀퉁이 아파트로 옮겼고, 중학 때부터는 친구의 꾐에 빠져 조그만 정원이 딸린 시골 도시의 타운하우스로 옮기는 만용을 부렸군요.
통원차량 없는 어린이집과 버스편이 불편한 중고등학교였기에 차로 등원·등교를 시킨 뒤에야 출근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로 마을의 아이들을 키우자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이었기에 평일 저녁 부모 활동도 빼곡했다네요. 초등 6년 동안 주 2회 서울 시내 영국문화원 오후 하원도 맡았습니다. 고등 때는 날밤이 야간 픽업에 늦어 서두르다가 택시기사와 경찰을 상대로 시비를 벌여 빨간 줄이 달릴 뻔 했던 것도 드러났습니다. 출근은 늦고 퇴근은 마음대로! 갑을 상대로 사정없이 갑질을 해대던 직장인은 결국 때 이르게 독립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날밤이가 어느새 군인이라 합니다. 스마트해진 군대 덕에 가끔 밝은 목소리의 전화도 걸려오고 PX에서 뷰티 케어 용품을 사 보내기도 한다네요. 소소하나마 자녀 키운 재미라 합니다. 그렇다고 살가운 사이라기엔 많이 모자라 보이는데요? 깊은 대화를 나눈 지도 여러 해라면서요? 진짜 함정은 오늘 좀 무난하기에 어제도 무난했을 거라고, 아빠에게 괜찮았기에 녀석에게도 그랬을 거라고 덮어버리는 정당화 아닐까요. 그러면 아빠와 아들의 내일을 덮을 수도 있을 텐데요?
성격 유형은 과거를 중간 정산한 결과입니다. 아들은 아빠와 상극으로 자랐습니다. 의도였든 아니었든 상극의 성향이 두드러지게끔 자기를 성장시켜 왔다는 뜻이겠지요. 두터운 시간을 함께했기에 아빠의 영향이 막대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빠는 ‘현타’가 왔습니다. "내 양육 방식이 어쨌길래?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녀석이 자라서 '아빠, 사과 한 번만 해줘. 이렇게 빌게' 그리 나오면 어쩌지?” 꺼림칙하고 거북한 뭔가를 느꼈다고 합니다.
속상한 아빠의 20년 엿듣기
그런 거북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군요. 자연스럽고 괜찮았다고 여긴 육아의 시간을 낯설게 돌아보게 된 건 “인간관계 속 우울 증상과 무기력을 벗어나고 싶은 이유가 더 컸습니다. 흐윽~." (음성 변조 & 모자이크)
40대 중후반 무렵부터 사람들 속에서 종종 침울하고 불안해졌다는군요. 자기감정과 생각에 서툰 ‘어른이’로 뒷걸음질 치는 듯했습니다. 어제를 괴롭히고 내일을 망설이며 천 번을 맴도는 밤도 이어졌답니다. 그런 밤을 가장 진하게 물고 늘어지는 게 아들과의 애매한 관계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침울한 사회적 관계의 밑바닥에 결국 속상한 아빠가 똬리 틀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달려와 안길 때는 행복했습니다. 부족해도 그 모습 그대로 긍정 받는 행복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라고 보니 그저 어려운 손님이기만 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베프’가 되겠다는 오랜 양육 목표가 좌절된 듯했습니다. 서운함도 커져갔고요. 부모라는 이름의 삶에 더 이상 열띠게 참여하는 것도 두렵더라는군요. 그 비좁고 슬픈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그저 구경꾼으로 남겠다면서 가림막을 치려고도 했습니다.
아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스트레이트와 훅이 떠올랐습니다. 피 튀는 ‘삐~’싸움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만만찮은 감정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체급이 깡패라 녀석의 데미지가 더 컸을 테지만 아빠의 데미지도 못지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빠의 데미지는 아들과의 링 안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인간관계 속 상처까지 불러냈습니다.
부자 사이 갈등과 인간관계 속 갈등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를 불러내더랍니다. 못생긴 낯짝 둘이 번갈아 뒤죽박죽 밀어주기 시합하는 듯하더라고. 그럴 때마다 코너로 기어가 물을 들이켜야 했습니다. 아들과 해결 못한 감정이 사회관계마저 뒤틀고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아빠가 된 듯했습니다.
결국 아빠와 아들의 20여 년을 대면하려 하는군요. 묻어뒀던 꺼끌꺼끌한 기억과 마주할 때라는 걸 받아들인 겁니다. 인정하기 싫은 걸 인정하고 불리지 못한 상처의 이름을 불러주려 합니다.
육아 갈등과 사회적 관계 속 갈등은 따로 서 있어도 같은 노을에 젖어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 간 만남과 상처의 문제였습니다. 코너에서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아빠는 그 노을의 지평을 보고 싶어 합니다. 얼마나 짙고 넓게 퍼졌는지, 그 짙음은 밝음인지 어두움인지 그걸 들여다보고야 성숙한 인간관계로 나아갈 것 같은가 봅니다.
아빠는 관계라는 말 대신 ‘만남’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넓고 깊으면서 생생한 표현 같다는군요. 관계 맺는 행위와 관계 위에서 사는 상태 두 가지를 다 담은 듯하다나 뭐라나. 아무튼 아빠는 아들과 치룬 종합 격투를 사람 간 만남이라는 넓고 아득한 풍경 속에서 돌아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픽션 작품 속 말다툼 풍경
주식투자를 해 보니 한두 번은 몰라도 결국은 돈 꽤나 날려 먹더군요. 욕심이 과했나? 사람 심리에 어둡나? 차트 분석을 못 하나? 기업 재무 분석에 게을렀나? 매매기법이나 타이밍 문젠가? 경기 지표에 무심했나? 나스닥도 체크해야 했나? 그런 거 몰라도 잘만 번다는데, 그냥 머리가 나쁜가? 이유는 모르겠고 후회와 자괴감만 끝없이 맴돕니다.
아파트나 땅 사서 깡통 찼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습니다. 사기만 안 당하면 웬만해선 본전은 하는 게 부동산이니 말입니다. 주식투자는 왜 대부분 실패할까요. 부동산 매매와 비교한 설명이 제일 그럴 듯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고팔기가 너무 편하기 때문이랍니다. 끄덕끄덕. 주식을 바라보되 한 발 떨어져 비교하니 쉽네요. 주식 대신 땅 사자는 말 아닙니다. 달리 섰으나 같은 노을에 젖은 것에 비춰보니 좋더라는 얘깁니다.
아들과의 충돌을 부모와 자녀의 울타리 안에서만 돌아보면 ‘자식 잘되라고 그랬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의 쳇바퀴이기 십상이었습니다. 다른 속상함에 비춰볼 때 자기 속상함이 더 잘 보였습니다. 육아 갈등을 돌아보되 아빠는 픽션 작품 속 말싸움 장면을 거울삼았습니다.
영화, 소설, 희곡 작품 속 인물의 말다툼은 다채로웠습니다. 서로 다른 사랑법의 충돌도, 지질한 일상의 옹색한 감정싸움도, 부끄러움끼리 난도질하는 괴로운 싸움도, 생사를 좌우할 살벌한 말다툼도, 크고 높은 가치의 빅 매치도 등장했습니다. 만남 속 온갖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갈등과 만남에 대해 고민 깊었던 분들의 가르침도 더불어 읽었습니다. 그런 현명한 분들의 언어는 죽을 쑤어서든 밥을 지어서든 아빠가 전달해 보자 싶었지만, 작품 속 극적 말다툼은 생생하게 보여드리기 어려웠습니다. 다투는 인물의 목소리를 직접 무대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타인의 진하고 생생한 말다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아들과 만났던 시간을 괴롭힌 속상함의 맥락과 크기와 가치가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문제적 아빠의 성장 기록
‘지금 애를 제대로 키우는 거 맞어?’는 슈퍼 헤비급 불안이었습니다. 정답지 없이 쓰는 오답노트랄까요. 영·유아와 살 비비는 애착기이든 사춘기 자녀와 삿대질 중이든 입시에 참전한 자녀를 모시는 중이든 명문대에 보내놓고도 밤새 뒤척이는 중이든, 불안과 더불어 자라야 하는 이들, 그대 이름은 부모였습니다.
반석 같은 육아·자녀교육서가 많았지만 아빠의 언어가 못 됐다고 합니다. 보석 같은 힐링 책이 오늘을 위로했지만 내일은 여전히 망설임이었고요. 자라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 간의 만남과 상처에 서툰 아빠 자신이었습니다. 묵은 불안을 드러내 날밤이에게 비춰보고 지혜로운 언어에 비춰보고 작품 속 말다툼에 비추면서 날밤이가 보이고 아빠가 여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안하고 서운했던 아빠가 직접 기록한 아들과의 종합격투기가 여기 있습니다. 아빠 vs 아들은 중후반 라운드 정도를 뛴 걸로 보입니다. 상극의 아들과 주고받은 20여 년 글러브질을 모아 '인티제 스타일'로 기록했더군요.
뭐든 바닥까지 파고 들어서 받아들이며 가슴의 언어를 사유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기도 하는 스타일이더군요. 그러니 좀 낯선 유형의 자녀교육과 양육 철학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운하고 속상한 부모-자녀 갈등의 나이테도 나옵니다. 인물 간 말다툼으로 본 소설·영화·희곡 리뷰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께는 자녀의 세상이 단절의 언사보다 아름다운 만남의 언어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더듬거림으로 비칠 지도 모르는 기록입니다.
문제적 기록이지만 결국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 서툰 성장 기록입니다. 차마 ‘성숙’이라 적지는 못했더군요. 그렇더라도 성숙에 한 걸음 가까워지고자 불안을 견디고 선 부모들께 작은 보탬이 될 기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일에 감격하며 속상한 일에 눈물 흘리고 소중한 것에는 욕심도 부리며 자라는 게 삶이라면, 양육은 삶을 향한 가장 열띤 참여 중 하나였습니다. 최근 전해진 이 기록이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더 쉬워지긴 어려워도 더 괜찮은 일로 여겨지게 하는 데 보탬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