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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Mar 04. 2024

Round 0. 아버지는 무엇으로 자라는가

S대생 아들 vs 외계인 아빠의 성장 데뷔전

“희한해. 당신은 대한민국 2% 아빠야.” 아들이 10살쯤이던 10년 남짓 전 옆지기가 툭 던진 말이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고개가 갸웃거려지더니 방금 하려던 일마저 까먹었더랬다.


서늘해질 수밖에. 저 다빈치코드 너머에 ‘아빠로서만 그래!’가 숨었음을 찰나적으로 꿰뚫었으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낱개는 그저 거들 뿐 곧바로 그 너머의 연결 의미가 메아리치는 유형. 맞다, MBTI의 의미 직관형(N)이다. ‘괜스레 의미 부여’라는 말을 맨날 듣는 유형이다. 옆지기의 저 말 너머에 담긴 불의에 저항한답시고 괜스레 남편 권리선언문을 낭독하다 새벽녘 가출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2%라는 것도 의아할 수밖에. 내 육아나 교육 방식은 평범하다 여겼으니까. 평균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타당한 이유와 보편적 근거로부터 당연히 끌려 나올 방식, 세랭게티 야생동물의 낮잠처럼 누구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구에게 낯설든 말든 그저 쭉 이어질 큰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던 셈이다.


‘내 아빠짓이 어째서 희한하지? 그걸 희한한 짓으로 받아들이는 원인은?’과 같은 헤집음에까지 급발진해 버리곤 하니 직전 일의 기억도 가출한 지 오래가 돼 버린다. 흠, 판단 습관은 사고형(T)이며 생활방식은 계획 지향적 판단형(J).


여기까지는 발단-전개-위기다. 절정은 N과 T와 J의 온 기운이 주로 ‘나’와 친해지려 하면서 펼쳐진다. ‘엊그제 아들한테 한 행동도 그런가? 혹 내가 뭘 고쳐야 하는 걸까?’ 내 눈길은 옆지기나 아들이 눈앞에서 정작 무슨 풍경에 젖어있는지로부터 가출해 내 속을 헤집곤 한다. 인간관계 속 에너지의 향방은 절정의 내향성(I).


그렇다 INTJ. 드물고 피곤한 성격이라고들 하는 그 ‘인티제’다. 인티제의 결말은 보통 도서관에서 지어진다. 주로 고상하고 어렵다는 책을 들었다. 찾고 읽고 한 줄로 꿰느라 진을 빼고 나면 소통의 근원을 향한 자그만 성찰을 기도 했다. 소통을 왜 도서관에서 찾느냐구? 인티제 사전에 절대 없는 단어, 따라서 가장 대중적 언어로 답하자면 인티제는 ‘원래’ 그렇다.


트렌드에 휩쓸리는 걸 극히 싫어한다는 설명대로 미적미적 내 유형을 확인했다. 3번의 동일한 무료 테스트 결과를 못 믿어 결국 정밀 테스트 결과지까지 받아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문자 견고딕체 INTJ였다.


덩달아 아들 날밤이의 유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날밤이는 서울공대 최상위학부에 다니다 지금은 군 복무 중이다. 나름 닮은 구석이 많다고 여겼던 녀석이다. 그런데 오, 마이, 갓, ENFP와 ESFP를 오간단다. 구구절절 나와 녀석은 상극, 잘못된 만남이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타’가 왔다. 녀석은 움직이려는데 나는 생각하고 앉았단다. 이 설명대로면 우리가 함께한 20여 년은 날밤이가 ‘버텨온’ 세월인 셈이다. 상극의 외계인 아빠의 패악질에 지쳐 월북을 감행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세월 아닌가 말이다.




물론 요즘 날밤이와 관계가 많이 멀어 보이진 않는다. 스마트해진 군대 덕에 가끔 밝은 목소리의 전화도 걸려온다. PX에서 탈모 예방 샴푸를 사 보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살가운 사이라기엔 또 많이 모자란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지도 여러 해다. 진짜 함정은 오늘 좀 괜찮기에 그때도 괜찮았던 거라고, 내게 무난했기에 네게도 그랬을 거라고 덮어버리는 내 정당화 아닐까 싶다. 그러면 우리의 내일을 덮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성격 유형 검사를 여럿 접했지만 대부분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검사였다. 과거까지 가두고 미래를 정하지는 못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검사 결과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날밤이의 ES(N)FP라는 것도 자라면서 지향한 유형일 게다. 의식적이었든 아니었든 나와 상극의 유형이 나오게 스스로 이끌었다는 것 그리고 녀석과의 시간이 두터웠기에 어떤 쪽으로든 내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것. 이건 뭔가 가르쳐준다. 꺼끌꺼끌한 기억을 마주할 때이며 인정하기 싫었던 과정을 인정할 때라고.


아들과 길고 밀접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아빠였다. 옆지기는 점심 무렵 출근해 자정을 넘겨야 퇴근하는 주말 없는 공연업계 PD다. 양가 친지는 따뜻한 남쪽 나라이며 처가는 그마저도 바다 너머다. 그런데도 날밤이 어릴 때는 북한산 자락에서 살았고, 초등 때는 시험을 안 보는 학교라는 말에 솔깃해 서울 귀퉁이 아파트로 옮겼고, 중학 때부터 경기도 시골의 조그만 정원이 딸린 타운하우스로 옮기는 만용을 부렸다.


통원차량 없는 어린이집과 버스편이 불편한 중고등학교였기에 차로 등원·등교를 시킨 뒤에야 출근할 수 있었다. 마을로 마을의 아이들을 키우자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이었기에 평일 부모 활동도 빼곡했다. 학원 종료 야간 픽업에 늦어 서두르다가 택시기사와 경찰을 상대로 시비를 벌여 빨간 줄이 달릴 뻔도 했다. 초등 6년 동안엔 일주일에 2번 서울 시내 영국문화원 오후 하원도 맡았다. 출근은 늦고 퇴근은 마음대로! 갑을 상대로 사정없이 갑질을 해대던 직장인은 결국 때 이르게 독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후반 라운드 정도를 뛴 걸까. 피 튀기는 ‘개싸움’이었다 할 순 없어도 날밤이와 수없이 주고받은 스트레이트와 훅이 떠오른다. 당연히 녀석이 더 깊은 카운터펀치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늘 너머의 의미와 연결짓는 성격 특이한 아빠에게도 그 충격은 녀석과의 링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육아와 사춘기 갈등은 사람 간 근본적 불협화음과 상처로 이어져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코너에서 물을 들이켜야 했고 늘 좀 더 자라야 했다.


매번 성내거나 웃고만 풀 순 없었으니 고민 깊었던 분들은 갈등과 만남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읽었다. 또 소설과 영화와 희곡 작품 속 인물들은 어떤 말다툼에 휘말렸는지 또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들여다보곤 했다. 다시 돌아와 말 걸고 귀 기울이려 했다.




작품 속 극적 말다툼 장면을 여기 많이 인용했다. 고민 깊었던 분들의 현명한 가르침은 내가 죽을 쑤어서든 밥을 지어서든 전달해 보자 싶었지만 작품 속 인물의 생생한 말싸움은 그러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싸우는 두 인물을 직접 등장시킨 뒤에 못다 한 말을 마저 들을까 한다. 서로 다른 사랑법의 충돌도, 지질한 일상의 헛된 감정싸움도, 부끄러움끼리 난도질하는 괴로운 싸움도, 생사를 좌우할 살벌한 말다툼도, 크고 높은 가치의 빅매치도 등장한다.


은 기본적으로 날밤이와 나눈 글러브질 사례들이다. 그런데 화내거나 위트로만 넘는 길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갔다. 그때 떠올렸던 소설·영화·희곡 작품 속 말다툼과 연결해 곰곰이 들여다봤으며, 그 두 거울에 비춰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떻게 서툴렀는지를 돌아본 인티제 스타일의 기억 모음이다.


뭐든 바닥까지 파고들어야 확신하며 가슴의 언어를 생각의 언어로 번역하는 게 편한 스타일이다. 그러니 어쨌거나 S대생 학부모의 조금 낯선 자녀교육 경험과 팁을 얻으실 수도 있겠다. 어떤 분에겐 부모-자녀 갈등이 그려온 미숙한 나이테일 수도 있겠다. 사람 간 갈등을 다룬 괜찮은 작품에 대한 리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고 분열의 언사보다 통합의 언어를 다짐하려는 작은 더듬질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아빠 신인의 성장 데뷔전을 마주한 기록이다. 상극으로 자란 아들과 주고받은 20여 년간 아버지는 무엇으로 자랐는가를 기록한 서툰 성장 경험담이다. 차마 ‘성숙’이라 적지는 못하겠다. 그렇더라도 성숙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지려는 부모-자녀가 있다면 이 경험이 따뜻하면서도 솔직하게 자기와 만날 수 있게 돕는 기록이면 좋겠다. 그런 다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다독이며 먼저 손 내밀게 돕는 작은 경험담이나마 될 수 있다면 더욱 감사한 일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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