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용설명서
전시를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주머니 사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딱히 저기 걸린 멋진 작품이 꼭 내 것이었으면 했던 적은 아직까지 없다. 왜냐하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또 다른 좋은 작품들이 늘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작품을 위해 잘 준비된 공간에서 그것을 온전히 느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집은 아이들의 전시공간이 된 지 오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작은 엽서나 달력에 그려진 것만 봐도 소소한 행복을 준다. 뭐든 꼭 필요한 경우가 생겼다 싶으면 상황에 맞춰 사게 되는데, 혹시 몰라, 갤러리만큼 잘 꾸며진 집부터 준비되고나면 거기 앉아 빈 벽을 바라보다 어울리는 뭔가를 하나 걸고싶어질 수도 있으려나?
많은 수집 경험이 있다는 사람의 안목이 궁금해 피노 컬렉션 전시에 들렀다. 프랑수아 피노는 명품 그룹 설립자이자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사 소유주로, 그의 이름을 딴 컬렉션 중 몇 점을 송은 갤러리가 공개중이다.
여러 작품 중 우리 아이들 반응이 좋아서 덩달아 마음이 갔던 두 점은 라이언 갠더의 ‘The End’와 염지혜의 ‘AI Octopus’였다. 아이들은 전시장 벽면을 뚫고 나온 작고 까만 쥐 곁에 한참 쪼그리고 앉아 죽음을 말하는 경쾌한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고, 인간중심의 지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생태계와 우리의 공존가능성을 점쳐보게끔 하는 문어의 이야기도 오랫동안 흥미롭게 지켜봤다.
발길을 돌려 키아프 프리즈 전시장에 들어서니 백화점 온 듯한 기분이다. 갤러리 외에도 시계, 자동차, 샴페인, 위스키 부스 등이 보였다. 파인아트가 명품처럼 적극적으로 소비계층에 어필하고, 명품은 파인아트의 영역에 들어서기를 원해 둘의 니즈가 잘 맞아떨어지나보다.
손맛이 가득 느껴지는 회화와 조각들, 직관적으로 이해가능한 작품들, 그저 예쁜 작품들, 이야기 나누고픈 질문을 던지는 모든 작품들이 좋았다.
비록 전시규모가 커서 반의 반도 못 보고 나왔지만, 골목골목 갤러리마다 찾아다니며 구경하기도 어려운데 한자리에 모아 보여주니 시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후회 없는 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