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경 여행기> 보셨나요? 저도 토요일에 혼자 하는 여행 시도해 보려고요.” 째까니 작가님한테 처음 들었다. 웨이브라는 플랫폼에서 작년에 방영했던 드라마라는데.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이디를 빌려줘서 만 하루도 안 돼서 다 봤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박하경(이나영 분)이 토요일 당일치기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큰 목적 없이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만남을 그리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편안하고 아름답다. 이런 여행, 혼자만의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 나도 하고 싶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바로 다음 날, 막내딸을 친구랑 물놀이하는 곳에 데려다주고 나니 아홉 시다. 네 시 반까지 다시 가기로 했으니 자유시간이 상당하다. 아이들과의 거리를 고려해서 영암 구림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은 아니지만,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고귀한 만남 하정웅 컬렉션 전>을 찜해 뒀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1번 프렐류드>가 미술관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을 가득 감싼다. 어쩌다 한 번나오는 아는 곡이다. 첼로 선율이 가슴을 살랑살랑 흔든다. 따분하던 클래식이 다 좋아지고, 뭔 일이래.
한 번 삐걱. 20분 만에 도착했더니 개관 시간이 열 시네. 그렇지. 대부분 미술관이나 전시관, 박물관은 열 시에 열지. 근처 2분 거리에 그 유명한 월요일만 쉬는 ‘ 카페 월요’가 있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다리자. 이동. 또 삐거걱. 여기도 아직이네. 참, 대부분의 카페도 열 시에 오픈이지. 어제 올림픽 경기 보느라 새벽에 잠들었더니 머리가 멍해서 팔다리가 고생한다. 어디 가서 좀 쉬고 싶구먼. 친구 W의 집이 있지. 이 동네에서 제일 멋들어진 한옥. 대문 앞 주차장에 W의 차가 없다. 그냥 동네 드라이브나 해야겠다.
머리에 기와를 얹은 나지막한 돌담이 꼬리를 문다. 구불구불한 길을 방향 바꿔 돌아도, 흙과 돌로 낮게 쌓은 고즈넉한 담장은 골목마다 이어진다. 고풍스러운 한옥 뜰에 심긴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가 담장 밖까지 가지를 늘어뜨렸다. 정갈한 소나무와 벚나무, 느티나무도 푸르름을 더한다. 대문 옆에 소담스럽게 늘어진 능소화의 주홍빛이 눈부시다. 마음을 제일 들뜨게 만드는 건 온 동네를 환하게 밝히는 목백일홍(배롱나무 꽃)이다. 봄에는 온통 연분홍빛 벚꽃 천지더니 여름이 오니 짙푸른 초록의 사이사이에서화사함을 뽐내는진분홍 백일홍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설렌다. 꽃이 좋아지면 나이 든 거라던데. 지나가던 아주머니도 걸음을 멈추고휴대폰 셔터를 누른다.
처음 해 보는 게 많다. 미술관에 1등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전시실을 거닐면서 하정웅 님이 수집한 작품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지난주, 박서보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보면서 ‘단색화’를 알게 되었다. 단색화라는 장르의 추상미술로 재평가되는 추상 1세대 작가와 재일한국인 작가의 추상작품이 눈에 띄었다.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 중 한 분이 소개했던 일본의 세계적인 작가 쿠사마 야요이와 살바도르 달리의 스케치 작품을 찾아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었다. 끌리는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라던데, 어떤 이는 한 작품 앞에 몇 시간이고 서서 본다던데, 나는 아직 그만큼의 수준이 아니다. 걸려 있는 건 빠짐없이 보고 작가와 제목까지 맞춰 봐야 직성이 풀린다. 한 시간여를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나이 지긋한 문화해설사분이 다가왔다. “미술 전공하셨어요?” 하핫. 매우 진지해 보였던 모양이다. 전혀요.
작은 길 하나를 두고 미술관과 마주 보고 자리한 창작교육관으로 건너왔다. <홍원표 작가 초대전>을 하고 있다. ‘바라바파’라는 캐릭터 작품이다. 짧게 둘러보고 1층 창작실의 넓은 창문 앞에 놓인 빈백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풍경이 기가 막히다. 머리를 뒤로 완전히 편안하게 기대니 시야의 90프로가 확 트인 하늘이다. 뭉게구름이 몽실몽실하다. 이 시간이 이쁘고 여유롭고 편안해서 살짝 떨린다. ‘밀리의 서재’에서 읽다가 멈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열었다. 3분의 2를 넘어가고 있는데 자연과학인지, 철학서인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장르가 모호하다.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실존 인물들이 계속 언급되는 게 이상해서 찾아보니 과학 에세이인 듯하다. 다 읽고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여자 셋이 들어온다. 그림 그리라고 시키고는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어떻게 사셨어?” “맨날 똑같지.” 아까부터 소파에서 휴대폰을 보며 앉아 있던 보라색 여름 카디건을 걸친 중년 여자분이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나 보다. 일행이 한 명 한 명 더해지더니 여섯이 모였다. 코로나에 걸려서, 건강검진에서 뇌에 종양이 발견돼 수술 날짜가 잡혀서, 어깨 수술을 하고 집에서 쉬던 차에 침대에서 떨어지는 순간 다친 데를 보호하려다 보니 갈비뼈가 부러져서, 세 명은 못 왔단다. 다치고 병난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급기야 유방암에 걸린 지인이 20년 동안 나았다 재발하기를 반복하다가 죽은 데까지 이른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궁금하던 차에 인형극 공연 연습하는 시간을 정한다. 2학기에 한 학교도 신청을 안 했다며 실망스러워한다. 언제고 만날 수도 있겠는데? 학교라는 접점이 있고 인연이란 모르는 거니까. “움직여 볼까? 나 아침부터 굶었어. 인지식당으로 가자.” 우르르 나간다. 오! 좋은 정보!
네비에 찍어보니 1분 거리다. 인지식당에 들어섰다. “한 명이시면 비빔밥류만 가능합니다.” 황옹졸 작가한테 미리 전화해서 점심 같이 먹자고 할 걸. 생각 못 한 게 후회된다. 그래도 오늘은 '홀로 여행'이니까 이게 더 낫다고 위로한다. 오른쪽 옆에서 햇볕에 꺼멓게 그을린 할아버지가 혼자서육회 비빔밥을 엄청나게 맛있는 기세로 드신다. 씹는 소리가 경쾌하다. 타악기 연주처럼.그 소리에서 값진 노동에 어우러진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경상도에서 영암에 근무하는 경찰관 친구를 만나러 온 젊은이들의 탁자와동네 분인듯하지만 관계가 오묘해 뵈는 두 할머니와 한 할아버지의 탁자에서 장단 맞추는 구수한 사투리가 동서 간에 조화롭다. 할머니가 막걸리를 시켰다. 혼자 앉은 나를 슬쩍 쳐다본다. 시원하겠다. 꼴깍. 돌솥비빔밥에 오이무침, 통감자볶음, 열무 물김치, 가지볶음, 단무지 무침, 죽순나물, 호박전, 배추김치, 근대 된장국까지 싹싹 비웠다. 여기 시골 맛집입니다!
졸린다. 요샌 시도 때도 없이 졸리지만 점심을 먹은 후엔 더 동태눈깔이 된다. 커피를 마시러 가자. '카페 월요'로 가다가 길을 돌렸다. 거긴 여러 번 가 봤으니 아까 미술관 옆에 ‘마실’이라는 카페가 있던데 거기로 가자. W의 집 맞은편이다.W가 동네 술친구가 카페를 열었다고 했는데 혹시 거긴가? 더워서 그런지 동네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찾기 힘든데 안에 손님이 꽤 있다. 점심 식사 후 들른 듯한 직장인 단체 손님,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는 남자분들. 특이하게 중년 남자들이 많다. 키가 아담하고 똥머리를 단아하게 말아 올린 사장님은 조금 새침하다. 목소리도 온화하고 친절한 편인데 눈빛이 차갑다. ‘너와 나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잖아.’ 하는 딱 그만큼의 서늘한 거리. 친구의 친구일지도 모를 그녀를 가깝게 느꼈다가 괜히 혼자서 물방울에서터지는 포말 한 개만큼 상처받았다.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이 여름 감성을 흠씬 풍긴다. 노랑과 검정이 섞여 있는 청소년 고양이가 제 몸을 한가롭게 핥고 있다. 이 분위기 영화 같다. 주인공이 쪼끔만 더 이쁘면 좋은데. 하하. 가늘고 길어 하늘하늘한 보라색 여름꽃에서 눈을 못 뗀다. 산들거리는 게 예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밖에 나가 꽃을 검색했다. 부처꽃이란다. 함께 어울리고 있는 꽃들은 버베나, 란타나, 끈끈이대나물... 몇 개 찾아보다 말았다. 너무 예쁜데 이름이 어려워서 포기. 그냥 눈에 담자. W와 문자를 주고 받고 나서, 휴대폰 충전을 맡기고 '로이스 로리'라는 미국 작가의 <그 여름의 끝>을 펼쳤다. 딸내미가 빌린소설이다. 휴대폰배터리가 부족해읽던 걸 마저 못 보니,반납하려고 둔 책을 차에서 집어온 것인데 느낌 있다. 소녀와 함께 여름을 겪고 있는데 100쪽쯤에서 하늘이 흐려진다. 소나기가 오려나? 책 속 상황도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주인공의 예쁜 언니는 죽을 것 같다. 문체가 부드럽고 다정한데 설마 죽일라고?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어 본다. 혼자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청귤차를 주문해서 한 잔 더 마셨다. 빗방울 몇 개만 떨어지고 먹구름은 물러갔다. “안녕히 계세요. 이 앞에 사는 W의 술친구 맞으시죠? 이야기 들었습니다.” “어머나! 그래요? 반갑습니다. 언니 서울 갔는데.” 그녀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한 시간 반쯤 시간이 남았다. 미술관 옆에 도기 박물관이 있다. 도기는 별로 안 좋아해서 들어간 적이 없다. 달항아리만 몇 시간 보고 있어도 좋다는 황작가 생각이 또 났다. 나도 자주 보면 예술혼이 좀 느껴지려나? 1층부터 3층까지 꽤 전시관이 여러 개고 공간도 넓다. 출토된 것뿐만 아니라 기증 작품과 하정웅 님이 소장한 작품이 다수 전시돼 있다. 조신현 작가가 표현한 선과 색채를 가미한 세련된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하나만 사라고 한다면 그걸로 사리라. 이은구 작가의 분청사기 작품에도 자꾸 눈길이 갔다. 작은 글씨를 눈에 기운을 모아 읽어보니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시기에 외국 귀빈들에게 보내는 선물로도 작품이 낙점된 작가란다. 오케이. 여긴 이 만큼이면 충분하다. 딱 맞춰 네 시 30분에 물놀이장에 도착했다. 얘들은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차에서 잠이 든다.
첫 번째 홀로 떠난 여행, 가까운 곳이라 조금 아쉽기는 하나 잘 마쳤다. 여름이 예뻤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만큼. 입을 닫으니 눈과 귀가 활짝 열렸다. 마음은 고요했다. 눈길이 닿는 대로, 들리는 대로,감정이 시키는 만큼,머물고 발길을 옮겼다. 누구의 눈치 볼 필요 없이 온전히 자유로운 내 시간이었다. 편안했다. <박하경 여행기>에서처럼 특별하거나 감동 있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 떠나는 여행 초보자에겐 충분히 좋은 시작이었다. 시작이라는 단어가 다시두근거리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