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애썼다
고향 친구에게서 아들 결혼시킨다는 연락이 왔다. 벌써라고라? 더욱 놀랄 일은 2년 전엔 딸도 여의어 벌써 외손녀를 둔 할머니라는 것이다. 친구야, 우린 고작 쉰둘밖에 안 됐단 말이다. 밖에 나가면 아직 사십대로 본단 말이다. 내 아들이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심장이 뛰고 혼란스럽고 난린지 모르겠다.
이런 된장. 분명 서울 올라갈 KTX 기차표를 예매하고, 역과 예식장, 간 김에 연극 보기로 한 예술의 전당, 센트럴시티터미널까지 동선을 캡처하고, 심야버스 예매까지 마쳤다.(고 생각했다.) 대문자 P인 내가 스트레스 받아가며 무려 보름 전 청첩장을 받자마자 완벽하게 마무리했었다.(고 믿었다.) 출발 전날, 금요일 저녁에 마이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승차권이 없다. 으아!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어. KTX, SRT, 현대, 삼성, 국민, 농협카드 앱 들어가 승차권과 지출내역을 1시간 넘게 찾고 또 찾아봐도 없다. 철석같이 다 준비됐다고 믿었는데, 중간에 정신이 나갔었나? 어쩔 수 없지. 머리가 집 나갔으면 몸이 고생해야지. 토요일, 9시 10분 기차 타고 가면 됐는데, 7시 30분 버스를 탔다. 오래가야 하는 것보다 뇌가 늙어간다 생각하니 화가 난다.
시외버스 네 시간, 지하철 한 시간을 타고 가 예식장 옆 스타벅스에서 현희를 만났다. 고향 친구 열한 명 중 하나는 미국으로 이민 갔고, 하나는 중학교 때부터 연락이 안 되고, 하나는 연락을 안 받고, 또 하나는 죽었다. 남은 일곱 중에 넷만 오늘 만난다.
현희는 여전히 기세가 좋다. 쨍한 초록 치마에 하얀 공주 블라우스, 삐딱구두를 신고 왔다. 긴 손톱에 화려한 네일을 하고 속눈썹을 붙였다. 아직 체력이 남아도나 보다. 경상도 억양이 세다. 제 말대로 스무 살에 시집가서, 대구에 산 시간이 훨씬 기니 당연한 일이겠다. 첫 아이가 벌써 서른셋, 대구에서 9년 차 초등교사다. 그 딸이랑 여태 둘이 같이 사는데 딸내미가 결혼 생각은 전혀 없고 빨빨거리고 돌아만 다닌다고 걱정한다. 딸이 교직에 있어선지 나랑도 대화가 끊기지 않는다. 얘랑은 어려서부터 좀 잘 맞았다. 아, 참 아들도 있다. 서울에서 알 만한 회사에 취직했단다. 딸, 아들이랑 여행도 잘 다니고 관계가 참 좋아 뵌다고 했더니, 얘들이 엄마 혼자 고생하며 키운 걸 알아 애틋하게 잘한단다. 첫사랑 남편이랑은 십 년쯤 살고 헤어졌지만 얘들은 아빠 집에도 오가며 지낸다. 그나저나 얘가 만나는 남자랑 적어도 세 명은 술자리 한 게 기억나니 이혼이 꼭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네 살 연하 남자 친구랑 사귄 지 7-8년쯤 된다. 결혼도 안 하고 오래간다 했더니 보험이란다. '이 나이에 남자 친구도 없으면 얼마나 외롭겠노.' 하면서. 이 친구도 친정엄마 돌보며 세 남동생 끌어가며 친정을 건사하는 맏이이다. 그래서 씩씩하다. 책임질 게 많은 사람은 씩씩해질 수밖에 없다.
성남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미진이가 온다는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촌년이 서울이 너무 넓어 헤매는 갑다고 낄낄댔는데 들어와서는 맞다고 웃는다. 살이 너무 쪘다며 온통 검정으로 도배를 해서 왔다. 술을 끊어야지, 검정을 입는다고 날씬해 보이냐며 잔소리했다. 그래도 매일 마시다가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쯤으로 줄였다고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하고 저녁에 들어가면 피곤해 운동할 시간도 없어서 그냥 자거나, 마시고 잔단다. 그래도 토요일 점심까지만 식당 문을 열고 오후부터 일요일까진 아이랑 놀러도 다니고 쉬기도 하니 걱정 말라고 한다. 늦게 낳은 아들 자랑에 얼굴이 활짝 편다. 우리 막내랑 같은 중학교 2학년인데, 넉살이 좋다. 엄마랑 통화 중에 이모들을 바꿔달라더니 인사를 건넨다.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잘 살겠다. 자신감이 부족한 막내딸 생각이 났다.
일찌감치 예식장에 들어가 숙자를 만났다. 얘도 일찍부터 까져서 스무 살에 결혼한 아이다. 현희는 두 번쯤 만났다는데 나는 숙자 남편을 처음 봤다. 예전에 처갓집에 사위들이 들르는 예능에 나오던 '후포리 남서방'을 꼭 닮았다. 어찌나 인상이 좋고 친근하게 대하는지 '어쩜 아직도 그대로냐'라고 허튼소리를 하고 말았다. 너무 나를 천연덕스럽게 대하는 바람에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걸로 순간 착각했다. 내가 너무 멀쩡하게 말하니 그쪽에서도 헷갈리는 듯했다. 어쨌든 숙자가 시집을 참 잘 갔구나 싶어 장했다. 벌써 자식을 둘이나 결혼시키다니 그것도 장했다. 큰아들이 눈도 시원하게 크고, 콧날도 오뚝한 게 참 잘 생겼다. 먼저 결혼했다던 숙자 딸이 돌쟁이 아가를 데리고 제 신랑이랑 와서 인사했다.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막내아들도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간다. 현희가 5만 원을 쪼꼬만 아가 손에 쥐어 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스타벅스에 다시 들어갔다. 현희랑 미진이랑 셋이서 사는 얘기를 더 했다. 입이 쉬지 않는다. 어릴 때처럼. 형편도 취미도 인생 가치도 모두 다르다. 현희는 가끔 친정 챙기면서 일주일에 3일은 산에 오르고, 하루이틀은 낚시를 가고, 한 열명쯤 되는 대구 친구들이랑 자주 만나고, 연하 남자친구와 가끔 만나고, 고양이 세 마리와 딸과 함께 신나게 잘 살고 있다. 미진이는 제 노동으로 힘든 식당 일을 하며 벌어먹지만, 오랜만에 만난 숙자 엄마에게 용돈으로 20만 원을 쓱 넣어 드리고, 커피값이든 뭐든 다 제가 계산해야 속이 편한 통 큰 여자다. 우리보다 한 살이 더 많았던 미진이는 어릴 때도 늘 언니처럼 베푸는 아이였다. 사람 잘 안 변한다. 첫 결혼에 실패해 두 아이를 그리워하며 술을 많이 마시는 그녀를 남편은 타박하지 않고 아직도 챙겨주고 위로해 준단다. 본인은 술도 못 마시면서. 미진이의 두껍고 거친 손이 그 아이의 옹이 박힌 마음 같았다. 정이 많은 미진이는 느지막이 저처럼 사람 좋은 남자를 만났다.
얘네들에 비하면 누군가 내게 말했듯이, 나는 평탄하게 산 게 맞나 싶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멀리서 편안하게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삶은 다 거기서 거기다. 참을 수 있을 만큼 불행하다가 적당히 행복하다가를 반복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동정할 필요도 없다. 어렵고 힘든 일이 없으면 기쁘고 행복한 순간의 빛이 바랠 것이다. 많은 일들이 스친다. 나도 아이 셋 키우고 아내, 큰딸, 며느리 역할 해내면서, 나를 놓지 않으려 헉헉대며 살아왔다. 힘을 내지 않으면, 참지 않으면 무너지기에 자존감 지키며 버틴 나를 위로한다.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낭만을 찾으려 노력한 나를 격려한다. 친구들아, 너희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 모두 그동안 참 많이 애썼다.
얼굴도 볼 겸 시흥에 사는 딸을 불러 현희와 함께 예술의 전당에서 일곱 시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았다. 매년 싸이의 흠뻑쇼를 보러 간다는 현희는 세 시간짜리 연극은 처음이라며 덕분에 좋은 경험이었다고 만족해했다. 이래서 얘를 좋아한다.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걸 망설이지 않아서. 나랑 비슷한 데가 많다. 목포에 엄마 뵈러 간다는 현희와 함께 11시 55분 심야버스에 올랐다.
회비가 50만 원쯤 남았는데 다음번엔 안 오는 얘들은 빼버리고 모인 얘들끼리 다 써야겠다. 안 오면 니들만 손해. 11월에 목포로 모여라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