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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Nov 19. 2023

당나라 정치·외교 1번지를 찾아서 – 대명궁에 가다 ①

대명궁 소개

대명궁(大明宫), 이 이름을 듣기만 해도 과거의 영화가 떠오릅니다. "밝고 큰 빛"이라니, 마치 황제의 눈부신 통치가 끝없이 이어져 세상을 끝없는 활력과 번영으로 가득 채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 영광은 300년이 채 되지 않아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역사적인 여정 속 숨겨진 이야기들은 흥미로운 부분이 많기에 차후에 자세히 다루어 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대명궁 자체에 집중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과 그 의미를 함께 탐색해보려 합니다.     

새롭게 단장한 시안역 북광장에서 바라본 대명궁의 정문 단봉문

중국에 와서 코로나 때문에 정신이 없다가 외출이 다시 가능해졌을 즈음의 일입니다. 아내에게 주말에 대명궁으로 소풍을 가자고 제안하니, 아내는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며 "대명궁이라면, 혹시 명나라 시절의 궁전인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오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대명’은 유교 경전인 ‘시경(詩經)’에서 인용된 문구일 뿐, 명나라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시경은 주나라 서민의 노래를 모아둔 일종의 민요집인데, 후대의 공자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작품들을 선택하여 편찬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나라의 ‘미앙궁’이나 조선의 ‘경복궁’의 이름도 모두 주나라 문왕의 덕을 칭송하는 시경의 노래에서 따온 것입니다.


대명궁은 그 면적이 무려 3.5 km²입니다. 이는 명청시대 자금성의 약 4.5배, 우리 경복궁의 대략 10배나 되는 규모입니다. 당나라의 황제 21명 중 무려 17명이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니, 당시 정치의 중심이 어디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진 나라였기에, 시시때때로 주변국에서 온 사신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사라센, 인도, 토번,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등 사신들이 대명궁을 방문하였고, 이곳에서 서로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대명궁은 당태종 때인 634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나 29년이 지난 663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습니다. 그것은 착공 이듬해인 635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를 이유로 이미 꽤 진척되었던 공사를 중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당태종 본인도 사망한 다음에야 그의 아들 당고종 이치에 의해 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렇게 완공된 대명궁은 896년 후량의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불태워질 때까지 당나라 정궁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중요한 정책들이 바로 이곳에서 입안되고 의논되고 결정되었습니다.

    

오늘날, 시안 기차역에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면 이 역사적인 장소에 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한때 단봉문(丹凤门) 앞의 공사로 인해 궁궐 남쪽으로부터의 접근이 어려웠지만, 2022년 지하철 4호선 시안역이 개통되어 이제는 편리하게 대명궁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전통에 따라 남문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단봉문에서 입장권을 사도 대명궁에 들어갈 수 있으니, 과감하게 입장권을 구매하고 단봉문 박물관을 먼저 관람하는 게 좋습니다.     

시안 기차역 남광장- 옛 시절 기차역의 풍모가 느껴진다.

대명궁의 경내로 들어오면, 함원전(含元殿), 선정전(宣政殿), 자신전(紫宸殿)으로 이어지는 남북축 상의 3조전(三朝殿)을 차례로 마주하게 됩니다. 필요에 따라 혼용되기도 했으나 기본적인 기능은 각각 정해져 있었습니다. 즉 함원전에서는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는 각종 행사를 열었고, 선정전에서는 주로 중서성 등의 대신들과 대사를 논의하였으며, 자신전에서는 개별 신하들을 호출하여 그들로부터 보고받거나 임무를 부여하는 등 좀 더 내밀한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각각을 외조(外朝), 중조(中朝), 내조(内朝)라고 불렀으며, 이 가운데 아무래도 중조가 정치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당나라 후기로 갈수록 3조전에서는 점점 형식적인 의례만 이루어졌고, 실질적인 정치는 자신전 서편의 연영전(延英殿) 안에서 더욱더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정치의 비밀화는 아마 망국의 조짐이었을까요? 지금은 그 자리에는 세월만 무상하게 전각들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연영전(延英殿) 터


황실 연못 태액지(太液池) 서편에 있었던 인덕전(麟德殿)은 동시에 3,000명 이상의 인원이 앉아서 연회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각이었습니다. 이 연회가 열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면, 그건 분명히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신라 사신들도 인덕전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황제는 사신뿐만 아니라 이른바 숙위(宿衛), 즉 일종의 인질 생활을 위하여 당나라에 오게 된 신라 젊은이들에게도 기꺼이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황제들은 신라 젊은이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총명한 자들이 당나라로 갔을 테니까요. 황제는 좋은 뜻으로 곧 신라의 숙위 의무를 면제해주었으나, 어떤 신라의 젊은이들에게는 국비유학의 기회가 사라져 버린 청천벽력의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들어가보지 못하고 밖에서 서진만 찍은 인덕전(麟德殿) 구역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사신단이 대명궁에 방문하자 당문종은 이곳 인덕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각자의 지위에 따라 선물을 하사하였는데, 이때 사신 김대렴(金大廉)은 차의 종자를 받았습니다. 대렴이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고, 이후 신라에서도 차가 성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한반도에 차가 최초 전래된 시점은 흥덕왕 이전일 테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차를 마실 때마다 이게 대렴이 시안에서 가지고 온 차나무의 후손인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마시면, 더 즐거운 기분이 듭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대명궁에 갈 때마다 코로나 때문인지 인덕전 구역은 늘 폐쇄되어 있어서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구역 밖에 있어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이 모일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금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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