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과 신화의 세계
1998년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후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지금은 일본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가요 등 다양한 분야의 일본문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익숙한 수식어처럼,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여전히 마냥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나라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은 일본문화에 대해 보다 더 손쉽게 접근하고, 이를 통해 일본에 대한 이해와 관계 개선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일본만의 독특한 색채를 보여주는 다양한 일본대중문화 콘텐츠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으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오랫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뒤를 이어 최근에는 신카이 마코토(深海誠) 감독의 작품들이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몇 차례나 재개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함으로써 특히 젊은 층에서는 일본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사라진 듯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문화콘텐츠 저변에 자리 잡은 이야기까지 제대로 읽어내고 분석하고 있을까? 일본 신화는 대표적으로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 등에 수록된 신화를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창세부터 천손 강림, 일본의 천황가 계보로 이어지는 신화가 주를 이룬다. 신도란 일본 고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神) 즉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전국 각지에 수많은 신사가 존재한다. 신도는 일반적인 ‘종교’와는 다르게, 종교이면서 동시에 일본문화의 저변에 자리 잡은 문화 코드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의 상당수는 일본 신화 및 신도(神道)에서 그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이해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게다가 일본어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문화에 대한 교육 역시 음식, 의복 등 표면적인 문화를 교육하는데 머물러 있는 듯하다. 현대 사회는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인해 문화가 보편화되어 가는 특징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문화가 가지는 고유성도 여전히 존재하며, 이는 심층 문화라는 형태로 그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화란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 즉 허구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것은 신화가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신들의 이야기 속에 인간 사회가 품고 있는 보편적인 고민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현대문화의 저변에는 신화적 상상력이 자리하며, 다양한 문화콘텐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서사 형태를 보이는 현대의 문화콘텐츠 전반에서 신화적 상상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경우 실사판 영화에 비해 상상 속의 이야기를 옮겨놓는데 더 용이한 장르라는 점에서 신화와 애니메이션의 친연성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화 중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이 신들의 다양한 면면을 통해 인간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도 있지만, 한 민족이나 국가의 탄생 등 그 신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그 신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개별 신화들은 무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기도 한다.
국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신화의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국가 신도’를 들 수 있다. 일본이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천황의 정통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된 것이 바로 ‘국가 신도’이다. 일본의 신도는 종교로 보기도 하지만, 일본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문화의 저변에 자리한 문화 코드이기도 하다. 이것이 변용되어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작동되고, 통치와 지배의 당위성을 제공해 온 역사는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의 일본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 신도’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일본문화의 저변에는 여전히 다양한 신도 사상이 녹아들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원제목만 보더라도 그에 담긴 신도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일본어에는 행방불명을 의미하는 ‘行方不明’이라는 한자어와 ‘神隠し(가미카쿠시)’라는 일본식 표현이 있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神隠し(가미카쿠시)’라는 표현을 채용하고 있다. 예로부터 아이가 없어지면 신이 잠시 숨겨둔 것이라 믿었던 신도 사상이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어를 번역할 때 문화 및 사상적 특징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물론, 언어 교육에 있어서 그 언어권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신들의 세계를 그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신사와 무녀라는 ‘신도’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그리는 <너의 이름은.>, 대지진을 막기 위해 요석을 꽂는다는 신도의 주술행위를 표현한 <스즈메의 문단속>, 태양신의 힘으로 인간을 해하는 요괴를 물리치는 <귀멸의 칼날> 등 일본의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는 다양한 형태의 일본 신화・신도 모티프가 자리한다.
국제화 시대인 지금 우리는 다양한 외국 문화콘텐츠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또 다양한 OTT 서비스를 통해 세계 각국의 문화콘텐츠를 더욱 손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 우경화의 영향이 녹아든 문화콘텐츠 역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으며, 한국의 대중들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많은 이들이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제국주의 역시 종말을 맞이했다고들 생각하지만, 제국주의에 이용된 다양한 사상은 여러 형태의 문화콘텐츠로 변용되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콘텐츠를 무작정 차단할 수는 없는 시대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접할 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고찰하려는 노력은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다 할 수 있겠다. 특히, 신도의 경우 근대 일본 제국주의에 있어서 ‘국가 신도’라는 형태로 국가 이데올로기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한 역사가 있는 만큼, 일본의 신화・신도 모티프가 현대의 대중 매체에서는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문화 속에 변용되고 있는 신화・신도 모티프를 분석함으로써 일본문화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깊이 있는 애니메이션 읽기에 도전해보자.
이 시리즈는 각 이야기마다 (1)일본 신화 읽기와 (2)애니메이션 분석이 하나의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일본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후, 그 모티프를 통해 애니메이션 작품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일본의 대표적인 신화는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에 실린 전승을 들 수 있는데, 이 두 서적에 실린 각각의 신화에는 유사한 점도 있고,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시리즈는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어 있는 《고사기》의 신화 내러티브를 주로 따른다.
일본은 여전히 군주제를 채용하고 있는 국가로 군주를 의미하는 ‘天皇’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읽어 ‘천황’이라 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한일 양국 간의 관계에 기반해 ‘일왕’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의 고전 전승에는 천황 이외의 다른 주요 인물의 이름/명칭에서 ‘~王’이라는 명칭도 등장하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서는 ‘天皇’를 고유명사로 보고 ‘천황’으로 지칭한다.
이 시리즈의 글은 필자가 그간 발표한 학술연구논문을 바탕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쉽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 글의 바탕이 된 학술연구논문은 다음과 같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오쿠사레 신’의 목욕재계 과정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 -『고사기』이자나기노미코토의 ‘미소기(禊)’ 전승의 관점에서-」『日本文化學報』 80, 223-237 (2019.02)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수직적 공간성에 나타난 제국주의 표상 연구 일본신화 속 ‘다카마노하라(高天原)’의 수직적 공간성과 비교하여」『애니메이션연구』 17(3), 113-127 (2021.09)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속에 숨겨진 신화와 그 변용 ‘구치카미자케’를 중심으로」『애니메이션연구』 17(4), 48-64 (2021.12)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화적 모티프를 활용한 심층문화 교육 자료로서의 가능성 고찰」『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 11(2), 363-380 (2022.03)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제국의 표상 연구 – 가오나시 캐릭터의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日本語文學』 95, 313-332 (2022.12)
「'귀멸의 칼날’과 일본 신화를 통해 본 욱일기의 의미 : 아메노이와야(天石屋) 신화를 중심으로」『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 12(4), 549-565 (2023.07)
「<스즈메의 문단속>의 재난 내러티브를 통해 살펴본 과거와의 조우―‘기억’과 ‘공감’을 통한 치유 화해 모색―」『日本文化學報』 98, 21-40 (20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