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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Feb 20. 2024

나를 소멸시키는 순간

<비극의 탄생>, 프리드리히 니체


이것으로 내가 읽은 니체의 1차 저작은 네 권이 됐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



바람 불고 흐린 날씨라서 걸으러 나가긴 귀찮고, 독후감 쓰기 좋은 점심시간이다. 


며칠 전에 <비극의 탄생>을 다 읽었다. 독후감을 바로 쓰지 않은 것은 이미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를 읽고 나서 <비극의 탄생>의 철학적, 미학적 위치에 대한 글을 한번 썼기 때문이다. 오늘은 좀 다른 얘기를, <비극의 탄생>이 설명하는 비극의 쾌감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하는데, 앞부분은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독후감 전반부를 그냥 가져왔다. 어디서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기분탓이 아니고, 내 이전 독후감을 읽어주셨다는 뜻이기에 먼저 감사드린다.


<비극의 탄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더불어 세계 3대 예술철학서로 꼽힌다. 예술철학은 예술을 철학의 대상으로 하는 철학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는 철학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주목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놀기 좋아하는,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유튜브도 LOL도 없었으니 놀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규칙을 만들어 스포츠를 즐겼다. (아시다시피 올림픽의 기원이 이러하다) 또 다른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를 지어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문학적 위상을 생각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상상력과 예술적 능력들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술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비극’ 공연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셰익스피어 이후의 비극들과 다르게 일종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비극은 반원형의 극장에서 시연되었는데, 무대는 가장 낮은 쪽에 있고, 관객석은 끝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비극 시인이 무대에 올라와 서사시를 암송하고, 관객석에 있는 코러스(합창단)이 때로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역할도 하며 극이 진행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다. 그리스 비극은 그저 공연으로 끝나지 않고 정기적으로 경연대회도 열렸다고 하니, 우리 시대로 따지면 <브리튼스 갓 탤런트>나 <싱어게인> 같은 컨텐츠였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비극이 다른 예술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낸다. 비극 공연의 클라이막스에서 주인공은 파멸한다. (비극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과 동침한 여인이 어머니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실명하고,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의 바위 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인다. 이 파멸의 과정에서 관객들은 대체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카타르시스’가 바로 이것이다.


다비드상이나 비너스상 같은 아름다운 조형물을 보거나, 긴장감이 감도는 레슬링 명경기를 보아도 카타르시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는 것이다. 대체 왜 비극만 이러한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부터 현대의 철학자들까지 여전히 이 카타르시스는 연구 과제이지만, 일단 니체 이전까지(그리고 이후에도) 카타르시스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6장에서 쓴 비극론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불안과 긴장 등을 제거하는 심리적 배설과, 그로 인해 불순물을 씻어내는 정신적 배설 등으로 설명했는데,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 아니니 여기까지만 쓰고 넘어가겠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쇼펜하우어를 가져와 <비극의 탄생>에서 카타르시스(이후로는 니체의 언어인 ‘도취’로 쓰겠다)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니체의 논리를 따라가려면 쇼펜하우어를 조금 알아야 하는데, 간단하게만 설명해 보겠다.


아름다운 해변을 상상해보자. 바다는 수많은 파도를 품고 있다. 잔잔한 파도가 수면으로 밀려오더니, 물방울들이 해변에 쏟아진다. 그리고 곧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상상이 되는가?


쇼펜하우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개체들, 그러니까 나나 당신, 쇼펜하우어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 사과나 나무 같은 생명을 품은 것들, 바위나 숲 같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물방울이나 거품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임의적이다. 우리는 우주를 이루는 수많은 거품 중 하나일 뿐이다. 물방울과 거품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듯, 우리도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물방울과 거품이 바다로 돌아가듯,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즉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가 우주에서 왔고, 언젠가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이 문장은 물리적 서술이다. 원자는 불멸한다. 당신의 손톱 끝을 이루고 있는 탄소 원자는 원래 먼 옛날에 먼 우주에 있는 어느 적색거성 내부의 핵융합반응 때 만들어졌다. 그 탄소는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시아노박테리아가 되었다가 삼엽충에게 먹혔다가, 삼엽충이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되었다가, 트리케라톱스, 원시고래, 사과를 거쳐 당신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포도당의 일부로 몸 속을 떠돌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메우려 DNA의 정보를 단백질로 만드는 과정에서 피부 세포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진짜로 우주에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으면 분해된다. 우리 몸의 99%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으로 되어 있다. 남은 1%의 85%는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으로 되어 있는데, 이 원자들은 우리가 죽는다고 소멸하지 않는다.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고, 벌레들에 먹히며 그들의 일부가 되거나 흙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문장 그대로, 물거품이 바다로 돌아가듯, 우주로 돌아간다.


물방울이 돌아가는 곳을 ‘바다’라고 한다면 우리가 돌아가는 곳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나와 당신과 지구와, 태양계와 우리 은하와 우주 전체를 포함한 모든 것,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근원적 일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평소에 이 전체로서의 근원적 일자와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 우리는 늘 시간과 공간으로 세상을 분할해가면서 산다. 모든 것을 개체로 분할하여 세상을 인식한다. 내가 햄버거를 삼키면 그 햄버거는 80일 안에 나를 구성하는 세포 중 일부가 된다. 햄버거를 섭취하는 순간은 실은 햄버거와 내가 물리적, 화학적으로 서로 결합하는 순간이지만, 나는 나와 햄버거를 엄밀히 구분해서 굳이 ‘내가 햄버거를 먹었다’고 표현한다. 나는 그대로 유지되고 마치 햄버거가 소멸한 것처럼 간주해 버린다. 이러한 착각은 나와 햄버거를 완전히 분절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렇게 세상과 시간을 분절하여 인식하는 우리는 전체에 대한 생각을 해내기 어렵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분절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 일자를 의식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 그런데 아주 간혹 근원적 일자와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바로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나를 잊어버리는 순간이다. 나를 의식하지 않는 순간 나는 전체를 느낀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예술을 경험할 때, 감정이 최고로 고조되는 클라이막스에서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해본적이 있는가? 완전히 무엇인가에 완전히 몰입하여 무언가와 합일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 말이다. 나는 없고, 무한에 가까운 감정의 폭발만 존재하는 순간, 이러한 순간을 니체는 ‘도취’의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니체는 우리가 도취를 느낄 때 근원적 일자를 마주한다고 말한다. 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 폭발의 순간 ‘나’라는 개체는 소멸한다. 나의 세계는 무한으로 확장되고, 그 감정만으로 가득 메워진다. 그 격렬한 감정 속에서 어제 먹은 햄버거나, 지난 달에 본 중간고사나, 다음 달에 출시될 애플워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소멸하는 순간 분절된 세계도 함께 소멸한다. 오직 폭발한 감정만으로 통일된 세계속에서, 나는 내가 실은 근원적 일자의 일부이며, 언젠가 거기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것이 카타르시스에 대한 니체의 해석이다. 나라는 오해적 개체를 벗어나 근원적 일자, 혹은 그 일부에 접촉하는 것, 나라는 개체의 유한성과 비극성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도취가 일깨워주는 쾌감이라는 것이 니체의 설명이다.


어떤가, 동의가 되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꽤나 그럴 듯한 설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실제로 무언가에 몰입해서 내가 사라지는 순간을 늘 갈구한다. 사실 이러한 순간은 영화나 예술을 통하지 않아도 경험할 수 있다. 술을 마시며 내가 관심 가졌던 주제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때, 책을 읽다 어떤 문구에서 기존 지식과의 강렬한 연결 고리를 발견했을 때, 게임을 하다 완전히 그 게임의 주인공과 일체감을 느낄 때 나는 나를 잃는다. 최근엔 ‘인간은 에피스테메에 불과’하다는 B군의 말을 들었을 때, 장용순 교수님이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에서 라캉과 푸코와 니체를 한 지점에 모았을 때, <P의 거짓>을 플레이하며 소피아가 건넨 <Memory of Beach>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나를 잊었었다. 


여기까지가 <비극의 탄생>의 앞부분이다. 예술론을 전개하는 앞부분과, <비극의 탄생> 후반부는 매우 다른데, 후반부에서 니체는 비극과 예술에 한정되어 있었던 논의를 인간과 사회, 삶으로 확장한다. 그리스 비극을 들고 와서 염세주의와 대결을 시작한다. 맹렬하게 일어나 허무와 공허, 도피와 은둔의 철학들과 부딪친다. 사실 나는 뒷부분이 훨씬 재미있고 니체답다고 생각했는데, 궁금한 분들은 일독 시도를 권한다. 그 이야기까지 다루면 정말 한도 없이 이 글이 길어질 것이다. 


<비극의 탄생>은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 처럼 심오한 책은 아니어서, 니체 입문서 두어 권 정도를 읽었다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독후감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서 이걸 어쩌나, 싶기도 한데, 심오한 내용을 쉽게 풀어 쓰면 내 깜냥으로는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채사장이나 유시민 작가 같은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겠지. 오늘도 길어진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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