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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06. 2024

악기와 무기

<현의 노래>, 김훈


김훈의 <현의 노래>를 다 읽었다.


<현의 노래>는 30대 때 읽었었다. 아니, 읽었었다고 생각했다. 중간쯤 읽고 나서야 내가 뒷내용을 모른다는 걸 알았다. 아마 30대 때는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화려한 해전이 소재인 <칼의 노래>는 무척 흥미진진했지만, 가야금 뜯는 우륵이 주인공인 <현의 노래>는 그 시절의 나에겐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었나 보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김훈은 올곧다. 김훈은 소설에서든, 에세이에서든 늘 같은 이야기를 한다. 김훈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바로 개별 인간의 삶이다. 그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김훈이 늘 하고 싶어 하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훈은 이렇게 묻지 않는다. 삶 그 자체가 이미 지순의 가치를 가지는데, 거기에 어떻게, 는 대체 왜 묻는가? 김훈은 이렇게 되묻는다.


이번에 읽은 책, <현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다만 늘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에 붙인 것처럼 일원론적으로 진행되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현의 노래>는 이원론적으로 진행된다. 마치 한쪽에 악기와 음악을, 다른 한쪽에 무기와 전쟁을 놓고, 어느 쪽이 선한가? 이렇게 묻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김훈은 고개를 저으며 역시 이렇게 말한다. "그건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내가 쓰는 줄거리를 따라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현의 노래>는 500년대 중반, 가야가 쇠락하여 멸망해 가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신라 진흥왕이 막 즉위했을 때 즈음 시작해서 진흥왕이 20대 청년이 되어 이야기가 끝나니까, 아마도 540년대~560년대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두 인물의 삶이 교차한다. 한 명은 가야금 명인 우륵이고, 다른 한 명인 대장장이인 야로다.


신라 병부령 이사부는 군대를 몰아 가야의 고을들을 부수었다. 우륵은 그러한 고을들을 돌아다니며 고을의 소리를 수집했다. 부서진 관아의 창고에서 금(琴)을 찾아냈고, 그 소리를 듣고 모았다. 다로의 부드러움, 물혜의 그윽함, 고을마다 소리는 달랐다. 우륵은 모든 가야의 소리를 가진 금을 만들려 했다. 우륵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손에 넣고 싶었다.


대장장이 야로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다. 긴 박달나무 장대 끝에 갈쿠리와 미늘을 단 무기였는데, 이를 가지극이라 했다. 신라의 기병들은 쇳조각을 이어 붙인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가지극을 든 보졸들이 가지극의 갈쿠리를 갑옷에 걸어 당기면 기병들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런데 야로는 이 무기를 가야뿐만이 아니라 신라에게도, 백제에게도 제공한다. 야로는 세상의 모든 전쟁을 손에 넣고 싶었다.


야로는 가야의 사람이었지만 새 무기를 이사부에게 바치며 자신의 살 길을 모색했다. 야로를 만났을 때, 이사부는 병장기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네 보기에 병장기가 본질은 어떠하냐?" 그러자 야로는 대답한다. "흘러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같은 것입니다." 이어 야로는 이렇게 덧붙인다. "병장기에겐 주인이 없습니다."


우륵은 가야의 사람이었지만 살고자 했다. 제자 니문과 함께 신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륵은 이사부에게 투항한다. 이사부는 우륵을 맞이하며 이렇게 묻는다. "네가 베푸는 소리가 그리 절묘하냐?" 그러자 우륵은 대답한다. "본래 흘러가는 소리일 뿐, 나의 소리가 아니오." 이어 우륵은 이렇게 덧붙인다. "들리는 동안의 소리이고, 울리는 동안의 소리이니, 소리에겐 주인이 없소."


이 이야기를 듣고 이사부는 큰 소리로 웃는다.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이로구나, 하면서. 이사부는 야로를 죽여 그의 병장기들과 함께 묻고, 우륵은 살려서 신라의 악공들에게 금을 가르치게 한다.


시간이 흘러 죽음을 앞둔 우륵은 제자인 니문에게 자신의 금을 신라로 보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악기란 아수라의 것이니 그곳이 금이 있을 자리"라고 말한다. 병장기로 삼한을 부수는 신라는 아수라의 나라였다.




어째서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일까? 소리는 우리를 도취시키는 것이고, 병장기는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김훈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의 소리다. 우리는 죽어서 음악을 들을 수 없다. 또한 병장기도 마찬가지다. 병장기가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다. 이미 죽은 우리를 병장기는 다시 죽일 수 없다. 김훈이 본질적으로 소리와 병장기가 같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소리를 듣는다는 것, 혹은 병장기와 마주하여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이 삶을 살아 낸다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김훈은 늘 말한다. 인간의 삶은 소리나 병장기 따위의 것들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김훈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나는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문학이 있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맨 위에 내가 썼던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바로 개별 인간의 삶이다. 그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김훈이 늘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훈은 이렇게 묻지 않는다. 삶 그 자체가 이미 지순의 가치를 가지는데, 거기에 어떻게, 는 대체 왜 묻는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마찬가지다. 언뜻 이 소설은 음악과 전쟁은 선악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 질문한 김훈의 대답은 이러하다. 그건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둘 다 삶을 전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개별 인간의 삶이 있다. 김훈은 늘 카뮈적이고, 늘 니체적이다.


우륵의 제자인 니문은 죽은 왕의 순장에서 도망쳐온 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데 근처 관청의 관리가 도망친 아라를 발견하여 잡아다 강제로 왕의 무덤에 묻는다. 니문은 그 후 가끔 왕의 봉분을 바라본다. 그런 니문에게 우륵은 이렇게 말한다. "쳐다보지 말아라. 아라는 죽었다.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의 소리이다." 니문은 울음을 삼키며 술잔을 받는다.




우륵이 죽자 니문은 우륵을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묻는다. 스승을 떠나보내고 니문은 옛 가야의 고을을 돌아다니며 마을의 초상이나 혼례에 소리를 베풀고 얻어먹었다.


니문은 우륵보다 스무 살 정도 연하였는데, 나이가 들어 일흔이 넘은 어느 날, 니문은 술 한 병과 가야금을 들고 왕의 봉분을 향해 오른다. 아라가 묻힌 그 자리에 앉아 니문이 금을 뜯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의 소리'라면서도 마지막 장면에 천연덕스럽게 문학적 여백을 남기는 거장의 솜씨가 존경스러웠다.


한편, (김훈이 이를 염두에 두고 썼는지는 확신이 없는데) 실은 음악적 도취와 죽음은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즉 소리와 병장기가 같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이보다 더 깊은 함의를 담은 문장이다. 이 이야기는 이 한 바닥 글 안에서 다 할 수 없어 링크로 남기니, 관심 있는 분은 살펴보기를 바란다.




https://brunch.co.kr/@iyooha/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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