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안식처
스페인의 투우 경기에서 주인공은 마타도어라 불리는 투우사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일대 다수라는 정당하지 않은 싸움의 마지막 결전 앞에 당당히 선 투우소가 진정한 주인공으로 보인다.
투우소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숨을 고르는 자리를 ‘케렌시아’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로 안식처, 피난처를 뜻하는 이 단어는 투우소에게 있어서는 최후의 돌진을 앞두고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곳에 서서 마타도어를 주시하는 투우소는 온몸에 창을 꽂고 피를 흘리며 극도로 지친 모습에 눈물까지 흘리기도 하지만, 눈빛만은 안타까울 정도로 형형하다. 케렌시아를 박차고 달려 나가 일격에 투우사를 날카로운 뿔로 꿰뚫어 죽이지 못하면 투우사가 단칼에 소의 심장을 찔러 공연이 끝나게 된다.
투우는 주인공인 투우소가 죽어야 완성되는 쇼이다. 투우사가 예스파다로 불리는 가늘고 날카로운 칼로 투우소의 심장을 겨냥해 찌르는 순간을 ‘MOT(Moment of truth; 진실의 순간)’라 부르며, 지금은 마케팅 용어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순간에 겨냥이 빗나가 투우소의 목숨을 일격에 끊지 못하면 투우사의 목숨도 위험해지고 공연은 미완성으로 끝나게 된다.
투우사나 투우소에게 있어 이 짧은 시간은 생사를 가르는 순간이 된다.
치열한 전장 속에서 만들어 낸 한 조각의 자신만의 영역 케렌시아에 서서 최후의 호흡을 가다듬고 결전을 준비하는 투우소의 처절한 투지에 이 시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