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도플갱어와 마주하다

by 피닉스

전기 시설이 낙후되었던 6,70년대 까지는 도깨비 목격담이 흔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4-50대 이후 세대는 본인이 실제로 체험했거나 동네어른이나 부모님한테서 한 두 번쯤은 도깨비에 홀렸다는 이야기를 전설의 고향처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자란 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나 지인 심지어 가족의 모습으로의 둔갑에 능한 도깨비였기에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나중에 도깨비랑 진지한 대화를 나눈 사실을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가 흔했다.


동네 어른이 막걸리 한잔 걸치고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집에 귀가하던 중 어떤 건장한 남자가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씨름을 한판하고 줄로 꽁꽁 묶어놓고 집에 가서 뻗었다가 뒷날 아침에 가면 집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대 비짜루나 싸리 비짜루가 줄에 묶인 채 내동댕이 쳐져 있더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곤 했다. 이처럼 도깨비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만큼 우리 삶 깊숙이 스며 있었다. 주로 기가 약하거나 술에 취한 상태 즉 심신이 미약할 때 공격을 해 오지만 정신이 멀쩡할 때도 당하는 수가 부지기수였다.


도깨비도 일종의 영혼처럼 에너지로 존재하다 사라지기에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기인 초저녁이나 새벽의 으스름한 불빛에 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 농사꾼이었던 나의 아버지가 논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중이셨다. 같이 일을 하다 2시간 전쯤 먼저 집으로 먼저 간 할아버지가 갑자기 길섶에 나타나셔서 아버지께 말을 걸어오셨다. "이제 오냐? "아버지 아직 집에 안 가셨어요?" "윗 논 좀 둘러보고 오느라고. 이제 가야지. 내 소변 좀 보고 가마. 먼저 가거라." 해서 아버지가 먼저 집에 들어가니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시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아니 아버지 소변보시는 것 보고 저 먼저 올라왔는데 저보다 먼저 오셨네요. 저 놀라게 하려고 몰래 숨어서 앞질러 오셨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집에 온 지가 두 시간 가까이 된 걸 몰라서 묻는 거냐?"

논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대략 15분 거리이다. 아버지는 좀 전에 할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소상히 말씀드렸더니 "아이고 도깨비에 홀렸구나. 그놈들이 사람의 기를 빼가는 요물이니 조심하거라." 아버지한테 직접 들은 얘기다.


어린 시절 해가 서산에 기울면 허공에 온통 도깨비불이 떠 다니는 걸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건넛마을 논 위 허공에 대여섯 개의 불꽃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셋 또는 둘로 합쳐졌다가 또 대여섯 개로 흩어져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게 흡사 아이들이 잡기놀이 하는 광경처럼 비췄다.


너무나 신기한 광경에 넋을 놓고 보다가 문득 호기심이 일어 엄마한테 저기 논 위에 떠다니는 도깨비불을 가까이 가서 구경해 보자고 하면 가까이 가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대과학에서 도깨비불은 늪지대의 썩은 나무나 풀 등에서 발생하는 가스인 메탄과 황화수소, 인화수소, 이인산염 등이 공기 중에 떠돌다가 산화작용을 일으켜 발생하는 불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다중우주론 관점에서 보면 내가 또 다른 우주에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수많은 내가 수많은 우주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지구 내에서도 도플갱어라고 지칭하는 복제품 같은 인간이 적은 확률로 발견되기도 한다.

어떤 과학자는 같은 별에서의 도플갱어는 남이어도 우연히 동일한 유전자로 구성된 사람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도 신비로운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내 나이 11세 때의 늦겨울쯤으로 기억한다.

전통 한옥의 구조상 화장실은 뒷간이라 해서 가옥 밖에 따로 떨어져 있기에 집집마다 밤이면 방에 요강을 따로 두고 저녁동안 소변을 해결하곤 했다.

우리 집은 비바람 치는 날에는 요강을 방안에 두고 평소에는 방문 밖 마루에 두었었다. 그날도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달빛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 방문을 열고 요강에 앉았다. 자연히 눈길이 마당으로 갔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마당이나 뒤꼍에 겨울 동안 사용할 장작이나 나뭇짐을 쌓아 놓았다. 우리 마당 역시 겨울 동안 사용할 땔감인 나뭇짐을 쌓아 놓았다. 그 나뭇짐 위에 웬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여자 아이는 나를 닮아 있었고 남자아이는 내 동생을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거울 속 나의 모습이었고 동생의 모습이었다. 저쪽의 나는 허리를 4각도로 굽힌 자세로 엉거주춤 서서 방금 냇가에서 발이라도 씻고 왔는지 걷어올린 바지를 내리면서 시선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살인 미소가 소름 끼치게도 바로 내 모습이었다. 동생은 시선을 이쪽으로 보지 않고 옆모습만 보인채 그쪽 누나의 옆면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두려움에 그대로 방으로 뛰어들고 싶었으나 소변 줄기가 멈추지 않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몇 초가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겨우 다 누고 얼어붙은 발을 간신히 떼었다. 당장이라도 그 애가 뒷목을 낚아챌 것 같아 무슨 정신으로 방에 들어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다른 가족을 깨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다들 깊은 잠에 빠져있어, 혼자 숨죽이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만약 도깨비라면 해코지 당하기 전에 내리치게 빨래 방망이라도 들고 그들 가까이 가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수없이 들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족 중 누군가가 한 명만 깨어나도 같이 가볼 텐데.. "왜 하필 이때 나타났을까? 낮에 좀 나타날 것이지."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면서도 귀는 밖을 염탐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더 놀라운 건 말투도 경상도 사투리인 내 말투를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이다.

"언자 (이제) 가자. 여 짛고, 여 짛고(여기 딛고, 여기 딛고) 내려오면 돼"....(나뭇짐 포개 놓은 게 좀 높아 아마 동생이 못 내려오는 듯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업자"... 탁탁탁.. 동생을 업고 대문밖을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는가 싶더니 고요했다. 슬며시 방문을 열어보니 그들의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가 서 대화라도 나눠볼걸. 그들과 대화 한번 못해보고 눈앞에서 놓친 게 못내 아쉽기만 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허탈감과 아쉬움은 그 후로 두고두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단언컨대 그날 나는 심신 미약 상태가 아니었으며,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고 분별력 있고 또렷한 정신상태였음을 장담할 수 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날 그들의 모습과 나에게 보낸 눈빛과 대화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사람으로 둔갑한 도깨비일까? 아니면 정말로 다차원 우주에서 온 또 다른 나의 자아일까? 과학이 더 발전해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지기 전 이 비밀의 베일을 벗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것들이 있으며,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고 과학적인 해석도 증명도 안 되는 그야말로 말이 안 되면서도 말이 되는 신비로운 광경들이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여러분은 다차원 우주에서의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믿나요?

사진출처 : 네이버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8화어느 문학회 대표의 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