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5번가는 다양한 색을 지니고 있다. 소호를 낀 다운타운의 5번가는 젊은 패션거리, 34가부터 센트럴파크 초입 59가 정도까지는 명품샆들과 유명명소들이 가득한 관광의 메카, 그리고 59가서부터는 센트럴파크를 끼고 고급멘션들이 즐비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위치한 82가서부터 103가 정도까지의 5번가는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라 불리는데 이 지역에는 메트를 비롯한 우리가 아는 대형 미술관들이 모여있다. 일 년에 한 번씩 뮤지엄 마일 페스티벌(Museum Mile Festival)이 열리는데 이날 저녁에는 5번가에 위치한 여러 미술관들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뮤지엄 마일에 포함된 미술관들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6개이지만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에는 근처 대부분의 미술관들도 무료로 개방한다.
뮤지엄 마일의 6개의 미술관은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 Museum), 쿠퍼휴잇 디자인 박물관(Cooper 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 103가에 뉴욕시 미술관(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그리고 마지막으로 104가에 엘바리오 미술관(El Museo del Barrio)으로 구성된다. 보통 관광객들은 메트로폴리탄과 구겐하임 미술관 정도까지를 관람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몇 블록만 더 올라가면 생각지도 못한 전시들을 하고 있는 미술관들이 의외로 많다.
오늘은 오랜만에 뉴욕시 미술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엘바리오 미술관과 이곳 뉴욕시 미술관은 5번가에 있지만 100가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맨해튼에 사는 나도 마음을 먹고 가야 하는 곳이기는 하다. 구겐하임과 고작 10블록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이 열블록 차이로 동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약간 동네 속의 미술관과 같은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느낌의 이 미술관은 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도착하면 생각지도 못한 전시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고 뉴욕시에 관련된 여러 굿즈들을 파는 미술관 스토어가 있어 퀄리티 있는 뉴욕 기념품을 사기에도 좋다.
센트럴 파크를 끼고 열심히 올라가다 보면 저 멀리서 거대한 정원의 문이 보일 것이다. 센트럴 파크 속 작은 비밀의 정원과도 같은 이곳은 컨설바토리 정원(Conservatory Garden)이다. 봄이나 여름에는 장미를 비롯한 온갖 꽃들로 가득하며 덕분에 졸업이나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곧잘 볼 수 있다. 정원의 문이 보인다면 다 온 거다. 그 바로 맞은편에 뉴욕시 미술관이 있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 덕에 꽁꽁 얼은 손을 감싸며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 미술관의 구경거리 중 하나인 우아한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미술관 카페가 텅 비어있다. 일찍 온자만이 누릴 수 있는 럭셔리다. 따뜻한 라테와 베이커리 하나를 시키고 얼은 몸을 녹이며 창밖의 전경을 조용히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다 보니 삼삼오오 동네 할머니들과 관람객들이 하나둘씩 카페에 앉기 시작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미술관 카페이지만 5번가 센트럴 파크를 바라보며 즐기는 한잔의 커피는 복잡한 뉴욕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휴식이 된다.
뉴욕시 미술관은 이름 그대로 뉴욕시의 역사를 전시한다. 1800년대부터 현재까지 뉴욕에서 일어났던 일들, 만들어졌던 물건들, 그리고 이루어졌던 굵직한 사건들을 아주 흥미롭게 전시한다. 뉴욕을 베이스로 한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공간은 지하부터 3층까지로 모두 4개 층이며 주로 2층과 3층에 기획전이 열리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People, Place, and Influence: The Collection at 100’라는 특별전이 2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1923년 처음 개관하여 올해로 딱 100년을 맞이한 미술관을 기념한 전시로 그간의 소장품을 대거 전시하면서 미술관의 걸어온 길 뿐 아니라 뉴욕의 100년 역사를 한 번에 경험하게 한다. 티파니 쥬어리를 시작으로 양키 스테디움의 의자 그리고 어디서 한 번쯤은 본 듯한 던칸 파이프(Duncan Phyfe, 1768-1854: 스코틀랜드 출신 미국의 가구작가로 1792년경부터 뉴욕에 공방을 개설하여 명성을 얻음)의 가구까지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2층 반대편에서는 뉴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거리시위의 역사를 조명한 ‘New York at Its Core’와 ‘Activist New York’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800년대부터 일어났던 뉴욕의 사회운동과 시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전시였다. 솔직히 뉴욕 사는 나로서는 툭하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위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길을 막아서는 것뿐 아니라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으로까지 치닿을 수 있는 뉴욕의 거리시위는 나에게는 피해야 할 위험요소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위의 역사를 전시로 둘러보니 그때그때 일어난 시민운동이 어떻게 뉴욕시라는 도시를 만들었고 역사를 이루었는지를 느끼게 되면서 사회운동에 무관심한 나를 돌아보게끔 했다.
뉴욕시 미술관은 이 처럼 뉴욕시에 대한 지각을 야기한다. 내가 사는 혹은 내가 방문한 이곳 뉴욕시가 진정 어떤 세월을 견디며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른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뉴욕 그리고 그 속의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끔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