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퍼휴잇 디자인 박물관(Cooper Hewitt National Design Museum)은 5번가 뮤지엄 마일에 위치한 6개의 미술관 중 하나로 구겐하임 미술관과 거의 붙어있다. 그리고 이들 미술관 바로 맞은편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센트럴 파크 속 저수지가 있어 쿠퍼휴잇에 가는 길이면 잊지 않고 가보곤 한다.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 여사의 이름을 따서 재클린 호수라고도 불리는 이 호수길에는 약 2.5킬로미터 길이의 러닝 트랙이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인과 함께 천천히 걸으면서 도심 속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산책 코스 중 하나이다. 또한 호수를 에워싼 맨해튼 고층건물들의 근사한 마천루(摩天樓, skyscraper) 덕분에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즐길 수도 있다.
미술관에 가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지 않는 이상 관심사 밖의 전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관에 방문할 때는 도슨트의 안내를 받거나 아니면 방문에 앞서 미술관 웹사이트를 둘러보고 직접 보고 싶은 작품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 보기도 한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어떤 경우에는 미술관 주위의 맛집이나 볼거리 등을 미술관 가는 김에 가보기도 한다. 그러면 미술관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기 때문이다.쿠퍼휴잇에 가는 길은 사실 재클린 호수를 보러 가는 겸 그리고 박물관 건물을 구경할 요량으로 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전시공간이 지루하다는 뜻은 아니다.
쿠퍼휴잇 건물은 우리에게 철강왕으로 잘 알려진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1902년부터 살았던 대저택으로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이 저택은 철강을 넣고 지어진 미국 최초의 거주 목적의 건물이라고 한다. 카네기 부부가 돌아가신 이후 이 건물과 부지는 카네기 재단에 의해 스미스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미국 연방정부가 1846년 설립한 교육재단으로 다수의 박물관과 도서관 및 연구센터를 운영함)에 기부되어 지금의 디자인 박물관이 되었다. 거주지로 건축된지라 멀리서 보면 박물관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외관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영국의 하노버 왕가 시대를 대표하는 조지 왕조풍(Georgian) 양식으로 건축되어 클래식하면서도 균형 잡힌 외관이 특징적이다. 실내 대부분은 전시공간에 적합하도록 레노베이션을 했지만 로비, 응접실, 테라스, 계단 등 거주지로써의 공간들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어 현재의 디자인 전시품들과 과거의 흔적들이 교차되는 신비로운 기분을 들게 한다. 게다가 건물 뒤쪽으로 맨해튼 저택으로는 드물게 아주 넓은 정원이 있는데 이는 처음 저택이 건축될 때 카네기가 직접 요청한 것이라고 한다. 이 정원은 티켓 없이도 박물관 후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고 카페와도 이어져있어 느긋한 오후의 커피 한잔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가 된다.
‘An Atlas of Es Devlin’
쿠퍼 휴잇의 전시는 디자인 박물관답게 다채롭다. 무려 215,000여 점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이 박물관은 고대직물을 사용한 의상부터 종이로 만들어진 디자인 작품, 그리고 첨단기술로 개발된 미래산업제품까지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전시한다. 디자인이라는 프레임으로 포용하는 전시의 카테고리가 상당히 넓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이번에 갔을 때는 무대 디자인으로 유명한 영국 디자이너 에즈 데블린(Es Devlin)의 전시가 메인으로 진행 중이었다. 영국의 국립극장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를 제작을 했을 뿐 아니라 링컨센터, 월드 엑스포 그리고 유엔 본부와 같은 대형 기관에도 그녀의 작품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번 전시로 이 작가를 처음 접했지만 샤넬쇼, 슈퍼볼 쇼, 올림픽 세리머니등을 총괄한 실력 있는 무대예술가라고 했다. 데블린의 이번전시 ‘An Atlas of Es Devlin’은 관객을 변화시키는(transforms audience) 성격을 지닌다고 소개되는데 아마도 그녀가 공간을 구현할 때 수반되는 모든 프로세스를 관람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시 구조 때문인 듯했다. 작가의 생각들이 글로 먼저 쓰이고 그 글이 스케치가 되고 다시 소묘(drawing)로, 그림(painting)으로, 조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간 구조물로 탄생되는 과정들을 관람객이 이동하며 경험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약간은 모호하지만 신비롭고 또 다소 낯설기도 한 공간에 대한 기억을 심어준다.
이 외에도 예술적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디자인 전시가 여럿 있으니 평범한 일상과 다른 그 어떤 자극이 필요할 때 한 번쯤 방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뉴욕의 랜드마크인 카네기 저택의 뒷마당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쬐며 커피 한잔 하는 여유도 즐길 수 있으니 꼭 날씨가 좋은 날에 가시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