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리 건물에 유티드 도넛이 들어왔다.
인아씨 집에서 차로 10~15분 내의 거리에 신세계 강남, 압구정 현대,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이 위치해 있었다. 가깝다고 해서 자주 가서 쇼핑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의 생일에 백화점에 가서 핸드크림이나 립스틱 같은 가벼운 선물을 사면서 식품관에 들려보는 정도. 강남에 위치한 백화점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핫하다는 신상 가게들이 돌아가며 팝업 스토어를 열었고, 일부는 아예 매장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애써 핫플에 가서 한 시간씩 줄 서지 않아도 지하 식품관에서는 오픈 시간에 맞춰가면 적당히 쉽게 구입이 가능했다. 인아씨도 새로운 제품이나 가게가 있으면 궁금한 마음에 한두 번 둘러보곤 했었다.
동글동글 잘 튀겨진 갈색, 반짝이는 설탕가루가 눈처럼 하얗게 뿌려진 도넛 빵.
그 사이에 퐁신퐁신 부드러운 크림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유티드 우유크림도넛.
유명해진지 한참이 지났지만 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가는 곳이었다. 크림빵보다는 팥빵, 크로와상보다는 모닝빵을 좋아하는 인아씨였지만 매장 앞을 지나가면 여기 좀 봐주세요, 나를 한입 먹어보세요 말하는 듯 진열장에 가득한 알록달록한 색깔의 도넛들이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 없었다. 크기도 제법 커서 손에 잡고 먹으면 먹기 전부터 배가 부를 정도로 푸근하게 생겼다. 시즌별로 새로운 메뉴가 나오니 백화점에 들를 때면 꼭 한 번씩 지나가 보게 된다.
“멜론크림빵, 옥수수크림빵, 딸기우유크림빵, 우유크림빵 이렇게 4개 주세요.”
‘집에 가서 아이들이랑 나눠 먹어야지.’
노란 쇼핑백에 그려진 캐릭터처럼 도넛을 손에 들고 가는 인아씨 표정도 스마일이었다.
며칠 뒤,
“여보,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우리 건물에 유티드 도넛이 들어오기로 했어.”
“유티드? 내가 아는 그 유티드? 엊그저께 내가 사 온 그 도넛?
백화점에도 있고, 안국역에 가면 매번 사람들이 줄 서 먹는 그 유티드 도넛?”
“응응. 이번 금요일에 계약하기로 했어.”
“진짜? 정말? 진짜야?”
어리둥절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인아씨는 몇 번이나 진짜냐고 되물었다.
“나도 믿기지 않는데, 그 유티드 도넛 회사 이름으로 가계약금이 지금 통장에 들어왔어.”
“대박! 어디 봐봐! GFFP 이거야?”
“응! 진짜 대박이지?”
“헐 정말이네! 진짜 대박!!
뭔가 다른 표현을 찾고 싶은데 이 말 밖에 생각이 안 나. 믿기지가 않네.”
정말이었다. 안국역 근처에 유명한 수제 햄버거집과 유티드 도넛,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음식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와 임차 계약을 맺게 된 것이었다.
대명 씨는 강남 이사 초기 눈여겨보았던, 하지만 살 수 없었던 삼청동 건물 주변으로 물건을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코로나 때 급격히 줄어든 관광객 영향으로 삼청동, 재동 등 북촌 주변 평당 가격은 여전히 강남에 비해 낮게 형성되어 있었고, 안국역 근처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유티드 안국 매장을 시작으로, 100년 된 한옥에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 어니언 , 21년부터는 런던베이글 뮤지엄, 설화수의 집, 랜디스 도넛 등 지금은 북촌의 핫플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브랜드들이 연이어 가게를 오픈하고 있었다.
3대 도넛 성지, 베이글 성지, 빵촌로 라는 이름으로 SNS에서 몇 년째 꾸준히 화제가 되고 있었기에 코로나 이후에는 그 일대 상권이 분명히 살아날 것이고, 당연히 땅 값도 예전처럼 혹은 그 보다 더 오를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변 한옥 건물을 꼭 사고 싶었고, 계속 기다리던 중에 임차가 없어도 매매가 가능한 작은 한옥을 하나 사 두었다. 건물이라고 하기에 그 규모가 작았지만.
6개월 정도 임대료가 없어 월급, 원룸 건물 월세 등 현금 수익 대부분을 대출이자로 메꾸고 넣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 플러스도 있었고, 손해 보고 팔며 마이너스가 생긴 적도 있었다. 잘 모르고 샀던 원룸 건물 때문에 마음고생 몸고생하며 스트레스받은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배워가며 하는 거다, 힘들지 않고 돈 벌 수는 없다 생각하며 버텼는데 상업용 건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심사숙고한다고 해도 정답이 없었다.
스스로 리스크를 안고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월급 받는 회사원으로만 살았다면 임차인도 없는 건물을 덜컥 사 버리는 간 큰 짓은 못했을 거다. 인터넷 뉴스에 종종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돈이 너무 많아서 현금으로 한 번에 매입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부동산으로 자산을 쌓기 위해서 어떻게든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기에 인아씨 부부는 그렇게 진짜 서울 건물주가 되기로 했다.
건물은 아파트처럼 내가 팔고 싶을 때 부동산에 내놓는다고 매매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혹자는 빈 건물을 사서 가진 돈으로 매월 대출이자를 메꾸다가 정히 안되면 산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싸게 다시 팔아버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좋은 임차인을 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기다릴 수는 없어 상업용 부동산 기업에, 유치하고 싶은 브랜드에 직접 소개용 팸플릿을 만들어 메일을 보내기도 했지만 몇 번 건물을 보러 온 것이 다였다. 정히 안되면 한옥 스테이라도 해야겠다고 에어비앤비, 스테이폴리오에서 유사한 지역의 집들은 어떤 분위기로 꾸몄고, 1박에 얼마를 받는지, 예약현황은 어떤지, 한 달 운영비는 얼마나 들고, 얼마가 남을지 조사해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티드 도넛에서 매장 외 사무공간과 도넛 개발 및 제조를 위한 시설을 찾고 있었고, 현 유티드 매장과 도보로 이동가능하면서 딱 원하는 규모의 건물로 인아씨 부부 소유의 한옥이 낙점된 것이었다.
그동안 좋은 관계를 쌓아온 부동산 소장님의 적극적인 노력, 좋은 물건을 파악하고 적당한 가격에 잘 매입한 대명 씨의 좋은 눈, 매출이 급격히 증가해 각종 콜라보와 제품 개발로 사업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유티드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인아씨 부부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임차 계약을 하면서 부동산의 매매가뿐 아니라 주변 월세 계약금액 시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해 보니 생각보다 큰 금액이 아니었다. 큰 기대를 했던 인아씨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는 브랜드가 이름이 있고, 사업이 크다고 해서 내 월세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월세는 그저 시세대로 받는 거였다.
백화점이라면 총매출의 몇 퍼센트라는 식으로 수수료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유명한 유티드가 들어와도 내가 받는 월세는 주변 다른 가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쉽게도 말이다. 그래도 다른 것은 임차인의 사업이 잘되고 브랜드가 커지면 오랫동안 임대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내가 그 브랜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사업의 눈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임차인의 좋은 이미지로 내 건물의 가치 또한 높여준다는 것, 그리고 어디 가서 대 놓고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스타벅스 건물주에 못지않은 든든함이 생긴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일까?
기존 안국역 매장과 유사한 분위기로 한옥의 미를 살려 기와와 서까래에 포인트를 두고, 노랑과 핑크의 화사함, 귀여운 동물 캐릭터, 스마일 캐릭터로 꾸며져 아기자기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완성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인아씨와 대명 씨는 이 가게가 내 것인 것 마냥 마음이 포근포근했다.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득문득 혓바닥을 내밀며 웃고 있는 유티드 도넛의 마스코트처럼 웃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첫 건물의 임차인이 유티드라니!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온 날, 특별한 계획이 없는 하루짜리 휴일, 인아씨와 대명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북촌으로 갔다. 유티드 도넛 사무실로 쓰고 있는 한옥 건물과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여기가 우리 건물인데 유티드 도넛이 빌려서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옥은 마당이 있으니까 좋다.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서 여기 살면 좋겠다.”
동물을 유난히 귀여워하는 둘째 별이가 말했다.
“하하, 그렇네. 마당이 있으면 강아지 키우기 수월할 텐데. 그럼 나중에 아빠가 여기 이 집 별이 줄 테니까 네가 어른이 돼서 강아지를 잘 돌볼 수 있을 때 여기 이사 와서 살아.”
“진짜야? 아싸! 나는 아파트보다 마당 있는 이런 집이 훨씬 더 좋아.”
차가 겨우 지나다니는 좁은 골목, 옆집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기와지붕,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주말에는 집 근처가 늘 시끌벅적해서 실제 살고 있는 주민들은 불편함을 자주 호소하는 동네였지만,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 고층빌딩 숲, 8차선 대로를 주로 마주하다 이렇게 북촌에 오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한옥마을의 정취도 좋고, 관광객들이 다니는 곳이니 마치 여행을 온 기분도 들고, 내 건물이 있으니 마음 깊이 뿌듯함과 안정감도 들었기 때문이다.
임차 없이 버틴 보람이 있었다.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였다. 앞으로의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근사한 건물 투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