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상상해 본 적 없는 일 1
드문 드문 그래도 연락이 왔다. 급매로 내놓길 잘했다. 몇몇의 전화는 집상태에 대해 과도하게 나쁘게 말하며 가격을 깎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미리미리 부동산 소장님들과 연락하고, 때때로 스타벅스 기프티콘도 쏘면서 집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길 부탁해 두었기에, 그런 시도는 잘 쳐내고, 제대로 된 매수자를 골라낼 수 있었다.
무조건 같은 아파트 비슷한 조건의 집에 비해 가격을 천만 원까지 싸게 내놓고, 관심을 보이면 5백 정도 더 깎아주겠다고 네고를 붙였다. 그냥 한번 보러 온 사람이라도 혹 할 수밖에 없게 말이다.
부동산 소장님들께도 복비에 플러스로 백만 원 더 드리겠다고 아주 강력한 인센티브를 걸었다. 그렇게 지방 부동산 자산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정리한 현금 일부는 이자율이 높은 대출 원금을 갚아서 이자금액을 낮췄고, 일부는 강남 건물을 위해 투자금을 모으는 중이었다. 불경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이만하면 잘 헤쳐나가고 있었다.
딱딱 딱딱!
드럼스틱이 하나, 둘, 셋, 넷 시작신호를 알리면,
챙! 하는 심벌즈 소리와 함께 징징징징~ 속도감 있는 일렉기타 소리가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알았던 모든 것은 전부 허구였어
꿈이란 결코 마법처럼 되지 않아
칼과 창 방패에 말을 타는 서부의 총잡이 돼 볼까
순례자든 방랑자든 다 밀림의 도시 벗어나볼까
난 또 다른 삶의 길 위에서 새로운 방황을 시작해
스무 살의 어린 비망록 난 펼쳐 드네
나의 노래로 조금 서툴게~~
~~~~~~~~~~~~~~~~~~~~~~~~♪
운전석에 앉은 대명씨와 뒷자리 아이들이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목청껏~ 아주 마음껏 소리를 높여 부르는 모습이, 흔히 볼 수 없었던 이 광경이 너무 재미있어서 인아씨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적 노래야 이게. 스무 살의 어린 비망록이 지금 어울리는 말이냐고.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대학생 때의 낭만과 추억으로 빠져들게 하는 20여 년 전 노래가 가족 모두를 웃게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니 정확히는 서울로 이사 오고 나서 처음 제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회사일에 부동산에 너무 바쁜 대명 씨였는데, 부동산 불경기까지 겹치면서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골치 아프던 지방 부동산 물건 몇 개를 겨우 손절하고 나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당분간 임장 계획도, 부동산 구입 계획도 없을 예정이라, 평소에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것을 만회하려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밴드음악을 유난히 좋아하는 대명씨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다행히 아빠와 음악취향이 일치하는 아이들도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초가을, 단풍이 시작되는 강원도로!
갑자기 음악이 끊기며 차 안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뭐야 왜 갑자기 꺼졌어?”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다 흐름이 끊기자 산이와 별이가 어리둥절해했다.
“여보세요.”
“어, 나야. 혹시 너 오늘 이자 들어왔어?”
핸드폰이 블루투스로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어서 전화를 받으니 상대방 말소리가 다 들렸다. 자동차 디스플레이에 뜨는 발신자 이름은 ‘호사’였다.
“얘들아 조용히 해봐. 아빠 전화하니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인아씨가 아이들 쪽으로 뒤돌아 보며 말했다.
“뭐? 아직 확인 안 해봤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가족들이랑 강원도 여행 가는 길이야. 도착해서 다시 전화해도 될까?”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음 부분이 이어져 나왔다. 다시 열창모드로 <비망록>을 마무리한 뒤, 이번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리암>이다.
♪~~~~~~~~~~~~~~~~~~~~~~~~
나는 대리암 염산과 반응하면 이산화탄소를 내며 녹는 대리암
나는 대리암 염산과 반응하면 이산화탄소를 내며 녹는 대리암
Hcl이다 CaCO3다
2 Hcl CaCO3 - CaCl2 CO2 H2O다
~~~~~~~~~~~~~~~~~~~~~~~~♪
“에이치 씨엘이다. 씨에이 씨오쓰리다
투 에이치 씨에 씨에 씨오 씨오 웅얼웅얼웅얼 에이치 투오다.”
아이들의 엉터리 열창에 인아씨와 대명씨 모두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하하하하 박수! 박수! 우와~ 엄마는 그거 아직도 못 따라 하겠어! 너네 조금 가사가 틀리긴 했지만 박자는 아주 정확해! 안성진 선생님이 좋아하겠어!!”
슈퍼밴드라는 밴드 경연 프로그램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곡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쭈욱 한결같이 좋아하는 노래였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또 따라 부르며, 강원도 속초에 도착했다.
숙소에 체크인만 하고 바로 속초 해수욕장으로 이동.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바다가 그저 좋았다.
볕이 따뜻해서 차가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수영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별이와 산이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바닷물에 발을 적셨다. 밀려왔다 다시 빠져나가는 파도의 움직임에 맞춰 소리치며 웃고 놀다가 모래성을 쌓다가 그렇게 놀았다.
인아씨는 아이들 근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햇살아래 해맑게 노니는 아이들을 보니 여행 오길 잘했다 싶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혹여 다치지는 않을까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문득 저 멀리서 통화를 하고 있는 대명씨에게도 눈길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렇게 먹어 보고 싶었던 속초 닭강정도 먹고, 막걸리 술빵도 먹어보고 신나게 잘 놀았다.”
“에이~엄마 나는 벌꿀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었는데!”
“나는 시장에서 사 온 달고나!”
“산아 별아 그건 서울에도 파는 건데, 속초에 왔으면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걸 먹어야지!”
“그건 엄마가 먹고 싶은 거잖아. 우리는 그런 거 관심 없어. 노는 게 제일 좋지.”
“너희가 뽀로로야? 아직도 노는 게 제일 좋게? 하하, 내일은 물회 먹으러 갈까 하는데 그것도 관심 없어?”
“어? 회?!! 나, 나 갈래! 회는 맛있어!”
“호호호 그래 내일은 엄마 먹고 싶은 거 말고, 너희도 좋아하는 회 먹자. 잘 자고 내일도 재미있게 보내자!!”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온 인아씨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대명씨를 보았다. 오는 길에 받았던 전화 때문인지, 몇 번의 통화를 이어하느라 바닷가에서 애들이랑 놀지도 못했다.
속초중앙시장에 가서 사 온 닭강정도 겨우 몇 개 입에 댈 뿐이었다.
신나게 놀러 온 건데, 얼마 만에 온 건데, 같이 좀 놀지 했다가 뭔가 안 좋은 일인가 싶어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여보. 벌써 11시 넘었어.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건데 어서 자자.”
“애들은 자?”
“응. 신나게 놀았나 봐. 금세 곯아떨어지던데?”
“그랬어? 하하, 여행 오길 잘했네. 내가 바빠서 아이들한테 미안했는데 여행 오길 잘했어.”
“응! 좋은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거 보고 있으니까 그 자체로 나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야. 뭐 해라 마라 잔소리할 것도 없고. 알아서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하니까 편하기도 하고.”
“여보도 좋다니 나도 좋네.”
대명씨가 미소 지었다.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갔는데, 눈빛이 뭔가 불안해 보였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까 전화가 길어지길래… 먹는 것도 시원치 않고. 안 좋은 일인가 걱정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