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상상해 본 적 없는 일 2
대명씨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한참 계속되고 있는데도,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에이 설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 출근길에, 점심식사 후에 그리고 퇴근을 앞둔 지금. 너무 오버하기 싫어서 딱 세 번 전화를 걸고 있었다.
‘뭐야 이 자식, 왜 카톡도 안 보고 전화를 안 받아가지고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
내일 회의 소집 메일을 보내는데, 자꾸 오타가 났다. 다리가 조금씩 떨렸고, 호흡도 가빠지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자꾸 설마 설마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후~ 후~ 심호흡을 해가며, 손가락을 쭈뼛쭈뼛 폈다 접었다 해가며 겨우 메일을 발송했다. 얼른 마무리하고 가보지 않으면 오늘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저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 보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김 과장 벌써 퇴근해? 엇 이 사람 안색이 안 좋네. 어디 아파? 얼른 가서 쉬어요. 고생했어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이동혁. 대학원 동기이자, 같은 회사를 다녔던 동료다. 회사는 대명씨보다 늦게 입사했지만 3년 전에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능력 있는 친구. 대학원 동기와 회사 동료들은 모두 이동혁을 부러워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강남역에 커다란 빌딩을 두 채나 살 정도로 벌이는 사업마다 소위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강남역으로 사무실 이전을 한다고 했을 때 축하 인사차 들리고, 투자 설명회를 한다고 했을 때 도와주느라 한번 들리고 이번이 3번째 사무실에 가보는 것이었다.
2층 사무실에 가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순간, 애써 밀어내고 있던 불안함이 현실이 되어 대명씨에게 파도처럼 몰아쳤다.
삼사십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동혁의 사무실에 모여있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났고,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은 넋이 나가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동혁이 사업에 투자한 투자자들, 그리고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었다.
“저기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 누가 설명 좀 해주세요.”
바로 뒤에 도착한 온 호사는 사람들을 붙잡고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고 소리쳐 묻더니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그 돈 어떻게 모은 건데 흐흐 흐흑.”
자세한 건 아직 모르겠지만 투자금과 대출금을 이동혁네 회사가 말아먹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날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 화가 났다.
그동안 잘 나가는 척만 한 건가? 그래서 빌려준 돈을 못 받는다는 거야? 미치고 팔짝 뛰겠네 이거?! 이거 현실이야?!
“비켜보세요. 좀 비켜보시라고요. 야 이동혁, 이동혁 어딨어? 나와 봐 이 새끼야!”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대명씨는 이동혁을 불렀다. 받지 않아서 계속 울리는 통화 연결음처럼 대명씨의 목소리도 상대방의 응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 좀 하라고. 나타나라고.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하라고!
침착함 따위는 버리고, 체면 따위도 버렸다. 한참을 목 놓아 불렀다. 대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전화도 수십 번 걸었다.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이 여전히 꿈만 같았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야, 여기 있는 물건들부터 싹 다 챙겨. 컴퓨터도 챙기고, 조명, 장식품, 가구 다 챙겨. 아 저 벽에 걸린 그림 잊지 마라. 캐비닛 안도 싹 다 들여다 보고.”
누군가의 지시로 그들은 사무실에 있던 각종 집기류와 쓸만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나서서 뜯어말릴 힘도 없었고,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후다다닥. 순식간에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건 보다 확실한 현실이었다. 20억을 날렸다. 호사도 10억은 날렸을 거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최소한 몇 억 이상의 돈을 날렸다.
‘모두 합해서 얼마를 날려 먹은 거냐 이 미친놈아. 그게 할 짓이냐!’
그제야 눈물이 났다. 가족들 생각이 났다. 대명 씨는 그 길로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취하도록 술을 잔뜩 마셨을 때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제대로 걷기 힘들었고,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20억. 그동안 부동산 투자도 잘했고, 주식은 못해 펀드에 넣어만 두고 묵힌 돈이 그럭저럭 잘 불어났다. 남 부럽지 않은 좋은 직장 다니면서 재테크도 이 정도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 걱정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강남에 건물 하나만 더 사고, 내가 살 집, 인아씨가 만족할 만한 집, 딱 그 두 개만 더 가지고 싶었다. 이동혁이 강남에 건물 사고, 포르셰 타고, 비즈니스 클래스로 여행 다니는 거, 그 잘 나가는 꼴 그게 부러웠었나.
불경기에 부동산 투자는 잘 안되지, 모아놓은 돈은 조금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벌어보고 싶었다. 조심스레 물었었다. 나도 너 사업하는 거에 투자하고 이익 좀 나눠가지면 안 되냐고. 요즘은 재테크가 어렵다며.
“투자하겠다는 사람, 돈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 투자하고 주식 달라는 사람이 꽤 있는데, 나는 내 회사 주식은 내가 100% 가지고 있고 싶어. 상장까지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도 너니까, 투자는 말고 그냥 빌려주는 걸로 해서 한 달에 1~2% 정도 이자쳐서 줄 수 있겠다. 사업이 잘 될 때도 있지만 시즌을 타기도 하니까 이자는 월평균 내서 딱 1.5% 정도. 그것도 괜찮아?”
이동혁이 거만하게 말했었다. 대명씨는 돈을 빌려주면서 자존심 팍팍 구기고, 억지웃음 지어가며 1억 정도만 이동혁 회사에 빌려주었다. 1억 맡기고 한 달에 100~150만 원 이자 받기. 연으로 따지면 10~15프로였으니 은행 이자와 비교할 수 없었다. 단, 원금은 필요할 때 말하면 한 달 이내로 반드시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게 약속이었다. 좋은 매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투자금을 불릴 수 있으니 딱 좋은 기회였다.
인터넷에 이동혁이 만든 브랜드를 검색하면 리뷰가 썩 괜찮았다. 식음료 사업도 잘 나갔고, 블로그와 인스타에서 나름 핫했다. 자신이 생겼는지 패션시장에서 가장 파이가 커지고 있는 스포츠웨어 브랜드도 준비하고 있었다.
대명씨는 이동혁이 멋지고 과감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개발팀에서 마케팅 영업 쪽으로 빠지더니 소질이 있었는지 꽤 잘 나갔다. 그리고는 결국 퇴사하고 이런 사업을 만들어 냈다. 나중에 대명씨네 건물에서 이 친구와 같이 사업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0억이라는 거금을 빌려줄 때까지 단 한 번도 돈을 제 때 돌려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차용증도 확실하게 써 두었고. 세입자 전세보증금을 빼줄 때 한 번씩 원금 일부를 제시간에 맞춰 딱딱 돌려받기도 했다.
드디어, 드디어!
마음에 드는 강남 건물이 하나 나왔다.
계약을 했다. 계약금이 필요해서 이동혁에게 빌려준 돈을 일부 돌려받았다. 잔금까지 아직 석 달 남았다. 그때까지 여유돈은 싹싹 긁어서 추가로 이동혁 회사에 빌려줬다. 원금도 불고, 재테크 안 해도 매달 들어오는 고정 수입이 있으니 이렇게 쉬운 일이 또 없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세 달만 더 있으면 꿈에 그리던 강남 건물주가 될 수 있었다.
이동혁은 회사 영업 이익이 늘었고, 직원도 10명이나 더 채용한다고 말했었다. 불과 한 달 전에. 그래서 사업 확장을 위해서 회사 자본금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더 이상의 이익 배분이 어려우니 이자만 1% 쳐주겠다고 했다. 아니면 원금을 찾아가라며 아주 당당하게 말했었다.
이제와 알고 보니 1억 맡기고 9,900만 원 날리고, 200만 원 거스름돈 받고, 1억 9800만 원 그냥 가지세요 하고 내 드린 꼴이었다. 네가 미친 거냐 내가 미친 거냐.
대명씨는 죽고 싶다는 게 이런 거구나, 돈에 눈이 멀었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사업에 망해서 죽는 사람들이 이런 심정이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돈 빌려주는 거 아니라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순간 핸드폰이 윙 울리며, 대명씨의 손에서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 너 어디야.
호사였다.
-나 거기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나왔어.
손가락 까딱이는 것도 힘들었다.
-야 여기 사람들 다 밤새고 이동혁 그 새끼 잡아올 때까지 있을 거래.
-너는……?
-나도 있어야지. 너도 빨리 와.
-나 집에 가서 좀 씻고 정신 좀 차리고 갈게.
-알았다. 어디 가서 죽지 마라 너! 네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 살려야 된다고!
힘이 빠져 계속 오타가 났다. 다시 한번 손에서 툭! 핸드폰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