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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당 써니 Dec 06. 2024

키오스크

“21세기에 우리나라에 계엄령이라니? 세기의 최고의 코미디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운 사건에 속이터져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밤사이 터진 사건에 대해 한탄하며 모였다. 이른 저녁, 오늘의 사건은 설렁탕집의 술안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술자리에 참석하며 늘 그렇듯 맨 구석 자리를 찾았다. 공황장애를 겪은 이후부터 구석 자리만이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에는 늘 따라오는 불편함이 있다. 바로 키오스크다.     

요즘 식당은 대부분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IT업계에서 일하면서도 이런 디지털 기기에 어려움을 느낀다. 핸드폰, 컴퓨터 사용은 물론이고 네이버나 카카오에서 회원가입을 하고 앱을 깔거나 물건을 사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고 힘겹다. 문제가 생기면 집에서는 남편이,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해결해 준다. 그러다 보니 내 비밀번호를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잘 알 정도다.     

"북클럽에서 읽을 책 톡으로 보낼테니까 내일 아침에 도착하게 해줘" 나는 오늘도 남편에게 인터넷으로 책 구매를 요청했다. 남편은 "이젠 니가 좀 사봐, 언제까지 이런것도 못하고 살래?" 난 속으로는 '이런거래도 부탁하니 고마워해야지 않나..' 생각하면서 이번엔 내가 사봐야지 했지만 귀찮이즘에 남편에게 또 부탁했다.


오늘도 구석에 앉아 키오스크를 마주했다. 노안으로 인해 메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겨우 주문을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에 주문 과정은 늘 더디기만 했다. 그러다 옆자리의 서 상무가 못 참고 나섰다.

“전무님, IT업계에 몇십 년을 계셨는데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시면 어떡합니까? 나이 들면 더 힘들어질 텐데, 기계를 두려워하지 말고 해보려고 좀 하세요.”

기분이 상할 법도 했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늘 내 주변 사람들이 해결해 주는 것에 익숙해져 스스로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함을 핑계로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조금씩 변하려고 노력 중이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고, 새로운 앱을 하나씩 다운받으며 익숙해지려 애쓰고 있다. 성격이 급해서 하다 실패하면 쉽게 포기하고 도움을 요청하던 나의 습관도 천천히 고쳐가고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마무리하려는 연습을 하고 있는다.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술 한 병을 주문할 때마다 키오스크를 사용해야 했다. 여러 병을 한 번에 주문하라는 주변의 말에도, 나는 오히려 키오스크 터치에 익숙해지고 싶어 한 병씩 따로 주문했다. 터치가 반복될수록 처음의 어색함은 점차 사라졌다. 술자리 동안 나는 열 번도 넘게 키오스크를 다뤘고, 이제는 손에 익었다는 작은 자신감이 생겼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곤함에 그대로 잠들었다. 그러나 밤새도록 머리가 아프고 뒤척이다 새벽에 눈을 떴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띵하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무거운 몸속의 독소를 빨리 빼고 싶어 옷을 갈아입고 서울숲으로 나갔다.

천천히 걷다가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하늘과 나무 사이로 어두운 안개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커다란 화선지 위에 짙고 옅은 먹물로 그려진 풍경화가 내 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은은하고 아늑한 이 순간 속에서 나는 가슴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지고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행복과 감사함이 차올랐다.     


어제 키오스크 앞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답답함이 사라지는 순간이 생각났다. 오늘 하루 나는 조금 더 성장한 나를 마주하고 있다. 남들은 다 할 줄 아는 일상의 작은 것이지만 나에게는 익숙지 않은 것에 도전하고 실패해도 끝까지 해내려는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서울숲의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나는 오늘도 상퀘함을 느끼며 더 나은 내일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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