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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카미노 May 15. 2024

순례견이 되는 길

로스 아르코스부터 로그로뇨까지

로스 아르코스를 떠나며

붉은 하늘을 보며 이날 일찍 나왔다는 생각에 뿌듯했는데 27km라는 거리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후 2~3시면 시에스타라 가능하면 그전에 도착해야 체크인, 장보기 등등 여유가 있다. 로그로뇨는 대도시라 시에스타 없이 영업하는 곳도 있지만 작은 마을인 경우에는 영업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Sansol의 Tienda-Colmado

로스 아르코스에서 6km 정도 걸으면 산솔을 지나게 된다. 동네슈퍼가 열려 있고 대부분 순례자들이 여기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있었다. 자리가 없었지만 화장실에 갈 타임이기도 했고 커피가 땡겨서 잠시 들렀다. 작은 슈퍼 안에 간식거리는 품절이고 과일 상태도 좋지 않았다. 순례길 커피가 다 그게 그거라 여겼는데 이 시점 이후 슈퍼에서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가 떠나려고 할 때 베이커리에서 바게트를 배달받는 게 보였다. 

인증샷 찍기 좋은 표지석

최악의 커피를 마시고 보니 다음 마을인 Torres del Rio까지 겨우 800미터. 제대로 된 커피나 조식이 먹고 싶다면 Sansol보다는 Torres del Rio로 가는 걸 추천한다. 그래도 너무 맛이 없어서 잠이 깨는 효과는 있었다.

늠름한 순례견

걸어도 걸어도 로그로뇨까지 남은 거리는 여전히 두 자리. 쉬지 않고 쭉 가는 건 무리라 충전할 겸 Viana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루카니까 이 정도 걸을 수 있지.

순례길을 걸으며 평소 체력을 기른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반려견 동반 순례길이 로망이라면 특히 체력적인 부분을 (견주님 포함) 150% 준비해야 되고 충분한 연습 & 고민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쉽게 권할 수 있는 코스는 절대 아니다.


순례견의 조건 Top 5
1. 누구보다 강한 체력

2. 동물친화적 : 순례길에서 고양이, 소, 말, 염소 등 다양한 동물 친구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동물뿐만 아니라 주변 순례자들을 방해하게 된다.

3. 사람친화적 : 강아지랑 같이 걷는 경우는 흔치 않아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대부분 물어보고 다가오거나 만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성격이면 좋겠다. 

4. 인내심 : 스페인에서 '펫프렌들리'라는 건 꼭 같이 출입이 된다는 게 아니라 외부에 도그파킹 공간이 있다는 걸 말하기도 한다. 어디든 함께하면 좋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테니 혼자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과 독립심이 필요하다.

5. 빠른 적응력 : 매일 잠자리가 바뀌기도 하고 40일간 여행 동안 땡볕, 비, 눈 등 급격한 날씨 변화를 겪게 된다. 어디서든 내 집처럼 편하게 쉬고 잘 수 있는 무던한 성격이면 수월하겠다. 

Viana의 Bar MIBAR

Viana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바르에 갔는데 먹으면서 찾아보니 구글 평점이 4.7로 꽤 높은 곳이다. 돼지고기 샌드위치 평이 좋은데 미리 알았더라도 또르띠야를 주문했을 것 같다. 액티비티 도전은 좋지만 먹을 거에 대해서는 모험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다. 

빵한쪽도 나눠먹는 사이

SNS에 루카한테 햄이나 치즈를 주는 걸 올렸더니 걱정을 하며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하루 20km 넘게 걷는 순례견에게 어느 정도 염분은 필요할 거라 생각한다. 루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충전이 돼서 댓글이 은근 신경 쓰이지만 계속 나눠먹긴 했다. 

LET IT HAPPEN

'LET IT HAPPEN'이라는 문구에 끌려 다가가보니 작은 글씨로 적힌 한글도 보였다. 

'잘하고 있어요♡'

'아자아자 화이팅!'

순례자를 위한 쉼터

길바닥에서 쉬고 나면 꼭 더 좋은 쉼터가 나타난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그늘 있는 쉼터에서 쉴 수 있었을 텐데. 이 날은 무언가 타이밍이 계속 안 맞았다. 

반가운 뒷모습
어떻게 이렇게 교육을 했어요?

로그로뇨에 거의 도착할 때쯤 비아리츠~생장 셔틀을 같이 탔던 한국인 순례자들을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원래 강아지를 무서워하는데 루카는 너무 순하고 교육이 잘 되었다는 폭풍 칭찬을 받았다. 루카한테 우유를 나눠주시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응원하셨다.

Hotel Isasa 내부

숙소에 도착하면 침낭을 깔고 루카를 침대에 올려주는데 촬영하는 동안 의자에 먼저 올라가 3초 내 기절했다. 이그제큐티브 싱글룸은 침대가 널찍하고 작업할 수 있는 데스크도 있었다.

Hotel Isasa
주소 : C. Doctores Castroviejo, 13, 26003 Logroño, La Rioja
사이트 : https://www.booking.com/Share-4gbSR2
비용(24년4월) : Executive Single €55, 반려견 추가 €8
거리만큼 닳은 양말

2년 전 쿠팡에서 구입한 발가락양말이 세 번째 순례길에서 결국 사망. 크록스가 아닌 트레킹화를 신었다면 더 버텼을 텐데 외부 노출이 더 많아 금방 닳는다. 대도시에 있을 때 양말을 샀어야 하는데 한 켤레 남았다고 다음으로 미뤘다. 돌이켜보니 피곤에 쩔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된 거였다.

6시간+ 대장정의 끝

의자에서 잠든 루카가 불편해 보여 침대로 옮겨줬다. 침낭은 매일 털어도 털범벅. 27km 성공했으니 이제 20km 걷는 날은 짧게 느껴지겠지? 로그로뇨에서는 버섯 타파스가 별미라 하는데 체크인 후 역시나 귀차니즘이 식욕을 이겼다. 


더 생생한 기록은 아래 영상에서 4K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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