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아르코스부터 로그로뇨까지
붉은 하늘을 보며 이날 일찍 나왔다는 생각에 뿌듯했는데 27km라는 거리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후 2~3시면 시에스타라 가능하면 그전에 도착해야 체크인, 장보기 등등 여유가 있다. 로그로뇨는 대도시라 시에스타 없이 영업하는 곳도 있지만 작은 마을인 경우에는 영업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6km 정도 걸으면 산솔을 지나게 된다. 동네슈퍼가 열려 있고 대부분 순례자들이 여기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있었다. 자리가 없었지만 화장실에 갈 타임이기도 했고 커피가 땡겨서 잠시 들렀다. 작은 슈퍼 안에 간식거리는 품절이고 과일 상태도 좋지 않았다. 순례길 커피가 다 그게 그거라 여겼는데 이 시점 이후 슈퍼에서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가 떠나려고 할 때 베이커리에서 바게트를 배달받는 게 보였다.
최악의 커피를 마시고 보니 다음 마을인 Torres del Rio까지 겨우 800미터. 제대로 된 커피나 조식이 먹고 싶다면 Sansol보다는 Torres del Rio로 가는 걸 추천한다. 그래도 너무 맛이 없어서 잠이 깨는 효과는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로그로뇨까지 남은 거리는 여전히 두 자리. 쉬지 않고 쭉 가는 건 무리라 충전할 겸 Viana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루카니까 이 정도 걸을 수 있지.
순례길을 걸으며 평소 체력을 기른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반려견 동반 순례길이 로망이라면 특히 체력적인 부분을 (견주님 포함) 150% 준비해야 되고 충분한 연습 & 고민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쉽게 권할 수 있는 코스는 절대 아니다.
순례견의 조건 Top 5
1. 누구보다 강한 체력
2. 동물친화적 : 순례길에서 고양이, 소, 말, 염소 등 다양한 동물 친구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동물뿐만 아니라 주변 순례자들을 방해하게 된다.
3. 사람친화적 : 강아지랑 같이 걷는 경우는 흔치 않아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대부분 물어보고 다가오거나 만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성격이면 좋겠다.
4. 인내심 : 스페인에서 '펫프렌들리'라는 건 꼭 같이 출입이 된다는 게 아니라 외부에 도그파킹 공간이 있다는 걸 말하기도 한다. 어디든 함께하면 좋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테니 혼자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과 독립심이 필요하다.
5. 빠른 적응력 : 매일 잠자리가 바뀌기도 하고 40일간 여행 동안 땡볕, 비, 눈 등 급격한 날씨 변화를 겪게 된다. 어디서든 내 집처럼 편하게 쉬고 잘 수 있는 무던한 성격이면 수월하겠다.
Viana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바르에 갔는데 먹으면서 찾아보니 구글 평점이 4.7로 꽤 높은 곳이다. 돼지고기 샌드위치 평이 좋은데 미리 알았더라도 또르띠야를 주문했을 것 같다. 액티비티 도전은 좋지만 먹을 거에 대해서는 모험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다.
SNS에 루카한테 햄이나 치즈를 주는 걸 올렸더니 걱정을 하며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하루 20km 넘게 걷는 순례견에게 어느 정도 염분은 필요할 거라 생각한다. 루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충전이 돼서 댓글이 은근 신경 쓰이지만 계속 나눠먹긴 했다.
'LET IT HAPPEN'이라는 문구에 끌려 다가가보니 작은 글씨로 적힌 한글도 보였다.
'잘하고 있어요♡'
'아자아자 화이팅!'
길바닥에서 쉬고 나면 꼭 더 좋은 쉼터가 나타난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그늘 있는 쉼터에서 쉴 수 있었을 텐데. 이 날은 무언가 타이밍이 계속 안 맞았다.
어떻게 이렇게 교육을 했어요?
로그로뇨에 거의 도착할 때쯤 비아리츠~생장 셔틀을 같이 탔던 한국인 순례자들을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원래 강아지를 무서워하는데 루카는 너무 순하고 교육이 잘 되었다는 폭풍 칭찬을 받았다. 루카한테 우유를 나눠주시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응원하셨다.
숙소에 도착하면 침낭을 깔고 루카를 침대에 올려주는데 촬영하는 동안 의자에 먼저 올라가 3초 내 기절했다. 이그제큐티브 싱글룸은 침대가 널찍하고 작업할 수 있는 데스크도 있었다.
Hotel Isasa
주소 : C. Doctores Castroviejo, 13, 26003 Logroño, La Rioja
사이트 : https://www.booking.com/Share-4gbSR2
비용(24년4월) : Executive Single €55, 반려견 추가 €8
2년 전 쿠팡에서 구입한 발가락양말이 세 번째 순례길에서 결국 사망. 크록스가 아닌 트레킹화를 신었다면 더 버텼을 텐데 외부 노출이 더 많아 금방 닳는다. 대도시에 있을 때 양말을 샀어야 하는데 한 켤레 남았다고 다음으로 미뤘다. 돌이켜보니 피곤에 쩔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된 거였다.
의자에서 잠든 루카가 불편해 보여 침대로 옮겨줬다. 침낭은 매일 털어도 털범벅. 27km 성공했으니 이제 20km 걷는 날은 짧게 느껴지겠지? 로그로뇨에서는 버섯 타파스가 별미라 하는데 체크인 후 역시나 귀차니즘이 식욕을 이겼다.
더 생생한 기록은 아래 영상에서 4K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