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며느리 프랑스 시댁에서 휴가 보내기
동서양문화차와 고부관계
나는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 시댁에서 2주간의 가을 방학을 보냈다. 프랑스 시댁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서 느낀 것들을 써 보려고 한다. 프랑스에는 시어머니 머리(tête de belle mère)라고 불리는 선인장이 있다. 'tête de belle mère’는 시어머니 머리라는 뜻이다. 가마솥 같은 둥근 모양을 한 선인장인데, 표면에 기다란 가시가 빼곡하게 박혀 있어서 겉보기에 험상궂고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 못생기고 위험해 보이는 선인장에 '시어머니 머리'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을 보면, 프랑스 며느리들도 고부관계로 고생하는 것 같다. 아이들의 방학을 앞두고 프랑스 엄마들이 모이면, 다들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나는 늘 시집에 가서 열흘 정도 보낼 계획이라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고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부관계는 쉽지 않은 관계인 것 같다.
나와 나의 프랑스인 시어머니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어언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스물네 살이었고, 나의 남편은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땐 프랑스인 남자친구를 사귄 김에 이참에 프랑스 여행이나 가보자는 마음으로 당시 남자친구를 따라나섰던 것 같다. 파리에서 몇 주를 보내고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TGV(고속 열차)를 타고 아비뇽 역에 도착했는데, 시어머니가 낡아 보이는 초록색 푸조 자동차를 몰고 우리를 마중 나왔었다. 첫인상은 겉모습은 강해 보이고 내면은 인내심이 가득해 보였다. 당시 나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 했으니 답답했을 법도 한데, 어머니는 나와 영어로 소통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어머니의 낡은 초록색 푸조 자동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남프랑스 낯선 이름 모를 시골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 깊숙한 곳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가로등까지 설치된 집 마당 안으로 들어가 주차를 했다. 한밤중에 도착한 터라 대충 집 구경만 하고 남편 방을 안내받았다. 넓은 마당에 2층으로 된 가옥이었다. 낮에 보니 앞마당에 수영장도 있었다. 어머니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마당에 꽃들을 소개해 줬다. 나무도 소개해 줬다. 나를 낡은 초록색 푸조 자동차에 태워 동네 맛있는 빵집도 데리고 다녔다. 아마 내가 프랑스 첫 방문 때까지만 해도, 나의 남편은 내가 북한 출신인 것조차 몰랐었다. 남편이 본인 가족들을 소개해 줬는데도, 나의 가족을 소개하지 않으니, 나의 가족에 대해 물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북한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내가 북한 사람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동양의 한국인 여성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애를 했다. 딱히 헤어질 이유가 없어서 계속 연애를 이어갔는데, 5년을 함께 했고, 결혼을 했다. 결혼 7년 차이니 꽤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이다. 시어머니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연애 얘기를 하고 있네. 시어머니와의 인연은 남편을 통해 만들었으니, 남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결혼하고 프랑스로 이주해서 3년 정도는 참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일단 남편과 나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자리 잡느라 고생하는 상황인데, 더 해서 난생처음 해보는 며느리 역할까지 정말이지 힘들었다. 시어머니와 갈등도 있었고, 사소한 다툼도 있었다. 나도 내 부모 형제를 꽤 이른 나이에 떠나오다 보니, 혈육의 정에 목이 말라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싹싹하게 며느리 노릇을 잘하면, 어머니가 친딸 마냥 사랑해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사람들은 냉정한 면이 있다. 그래서 내가 상냥한 동양인 며느리가 될 때, 굳이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친딸처럼 살뜰하게 챙겨 주거나 그런 면은 없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프랑스 시댁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였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나 음력설을 크게 보내는 것처럼 프랑스는 크리스마스를 크게 보낸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휴가를 길게 내고 온 가족이 모여 푸아그라, 철갑상어 알 같은 평소에 자주 먹을 수 없는 고급 진 음식들을 정성껏 차려내어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각자 준비해 온 선물들을 뜯어보며 논다. 나는 이 집안에 며느리가 됐다고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비싼 선물들을 장만했었다. 그런데 나는 쓸모없어 보이는 그런 물건들만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에게 수면양말을 받았을 때는 여러 감정이 스쳤다. 선물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안 주기보다 못한 이 물건들은 뭐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는 문화 자체가 그런 것 같다. 선물을 할 때는 비싼 선물보다는 선물 받는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아주 작은 것들을 정성껏 포장해서 건네면 참 좋아하고 감사하게 받는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문화 차이 때문에 갈등도 하고 화해도 하고, 그렇게 시어머니와 나는 고부관계가 되어 7년 차가 되었다. 내가 겪어 보니 시집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잘해줘도 불편하고 못 해주면 더 불편하고, 그게 시집인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 시집을 드나들다 아이가 생기고 나도 나이가 삽 십 대 중반에 들어서니,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남편을 통해 인연을 맺었지만,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장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나와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다. 그런 마음이 드니, 나도 시어머니에게 잘하게 되고,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게 된다.
조만간 마흔을 바라보는 장가간 아들과 며느리가 아이 둘 데리고 열흘씩 머물러도 싫은 내색을 안 비춘다는 게 시어머니 입장에서도 사실 힘들 것 같다. 삼시 세끼 차려내고 먹이는 거 그거 쉽지 않다. 나는 친구들 초대해서 한 끼 차려내는 것도 힘들었다. 나도 한국 사람이라 시댁에 가면 곱게 앉아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만 받아먹고 놀다 오지는 않는다. 어머니 옆에서 열심히 돕고, 설거지도 함께 하고, 테이블 정리도 하고, 말동무도 해 드리고 나름대로 눈치 보며 노력을 하다 오느라 피곤하지만, 우리 시어머니도 본인 집에서 내 눈치 보며 노력하고 있구나라는 게 보였다.
내가 친정 가족들이 전부 북에 있어서 아이들이 나의 가족을 만날 수 없는데, 친할머니라도 자주 보고 추억을 만들라고 아이들 방학마다 찾아가는 것도 있다. 어머니가 우리 아이들을 참 이뻐하신다. 우리 큰 아들은 첫 손주라 애착이 크신지 마냥 짝사랑 중이신 어머니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나의 아들은 온 집안을 통틀어 첫아기였던지라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세발자전거를 선물 받았었는데, 첫 시승식을 한다고 온 가족이 줄지어 서서 손뼉 치며 응원했던 적도 있다. 내가 급한 일이 있거나,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면 만사 제쳐두고 와서 나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 또한 우리 시어머니가 유일하다. 한 번은 그런 말도 한 적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친정이 없으니 좀 안쓰럽다. 그래서 자기도 외면하기 어렵다고 했다.
참 선하신 양반이다.
우리가 티브이에서 보면 넓은 정원에 숲이 우거져 있고, 수영장이 딸린 이층 집은 부의 상징이고 그곳에 살면 매일이 즐거울 것 같은데, 실제로 살아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 시어머니 집 마당에는 나무들이 많다. 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가지 무성해지고 마당을 폐허로 만들기 때문에 매해 봄가을마다 나뭇가지를 잘라주는 가지치기를 해줘야 한다. 부자들은 정원사를 고용해서 정원을 가꾼다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전기톱과 낫, 도끼를 들고 직접 다 해야 한다. 정원사를 고용하면 프랑스는 세금도 비싸고 인건비도 비싼 나라라 그냥 내가 다 하는 게 경제적이다.
시어머니가 시골집을 혼자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갈 때마다 힘쓰는 일들을 돕고 온다. 남편이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전기톱으로 굵은 가지들을 잘라서 떨어뜨려주면, 나는 밑에서 도끼로 나무를 잘게 다듬어서 버리기 편하게 손질하는 일을 했다. 이게 막상 해보면 말이 쉽지 아파트가 최고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내가 북에 살 때 산에 가서 나무도 해보고, 지게에 장작을 날라도 봤으니 견디지, 일반 한국 여자들 같으면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봤다.
수영장은 보기에만 예쁘지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여름 딱 3개월뿐인데,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다. 수영장에 물을 풀로 채우는데 백만 원에서 이백만 원 사이의 물값이 든다. 펌프를 설치해서 매일 물을 규칙적으로 돌려야 하니, 전기세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원에 잔디와 나무 잎사귀들이 수영장에 빠지면 펌프가 막히기 때문에 뜰채를 들고 나무 잎사귀들을 다 건져내야 한다. 물때가 끼지 않게 기계를 자주 넣어서 바닥청소를 해야 되고, 또 때에 맞춰서 물이 썩지 않게 약을 넣어줘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을 남편과 함께 하기도 하고 내가 곁에서 거들기도 하면서 아주 노동을 하고 왔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방학마다 시댁을 방문한다. 편하고 즐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족이기에 이번에도 다녀왔다.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고, 호두를 줍고, 아몬드를 줍고, 나무도 심고, 그렇게 아이들은 방학 숙제 한 페이지에 할머니와의 추억을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