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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Nov 07. 2023

탈북민이 만난 프랑스 사람들

프랑스 시골에서 피어난 우정

프랑스 시골에 있는 시댁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가족은 남편의 소꿉친구이자 베스트 프랜스인 프랑수아와 꼭 만난다. 프랑수아는 한국계 혈통을 가지고 있지만, 얼굴에는 동서양의 혼혈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짙은 쌍꺼풀과 깊은 눈동자, 그리고 큰 키와 오뚝한 코, 그리고 한국인에 비해 어두운 피부 톤이 그의 독특한 매력이다. 프랑수아의 어머니는 1961년생으로, 다섯 살 때 프랑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프랑수아 어머니는 한국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지만,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넸다. 프랑수아 어머니는 같은 동네에서 자란 소꿉친구와 결혼해서, 양부모님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양부모님을 요양 시설에 보내지 않고 살아가시는 날까지 곁에서 보살펴 주었다.


프랑수아와 나는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때, 첫 번째 프랑스 여행에서 남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성격의 평범한 프랑스 청년이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 20대 초반이었으니, 참 젊고 풋풋했지. 프랑수아는 특히 반항심이 강했다. 프랑수아는 마요트 출신의 아프리카계 여성인 아디라는 여성과 사귀고 있었다. 첫 만남 이후로 우리는 프랑스에 갈 때마다 프랑수아 커플과 함께 더블데이트를 즐겼다. 까르푸에서 와인과 위스키, 코카콜라, 칩과 살라미 사들고, 마르세유 해변가에 앉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나는 웨스트라이프의 음악을 좋아했었다. 내가 핸드폰으로 웨스트라이프의 노래를 틀어주고,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 말해주었지만, 남편과 프랑수아는 웨스트라이프의 음악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촌스럽다며, 프랑스 20대 청년들이 즐겨 듣는 음악을 틀어주었다. 대부분의 노래는 프랑스 흑인 가수들이 부르는 힙합이었다. 나는 음악 장르 중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 장르가 힙합이었다.


프랑수아는 브루고뉴 지역에서 마케팅을 전공했고, 아디와 동거하면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 둘은 아직 결혼하지 않고 동거형태로 함께 살고 있다. 프랑스의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프랑수아는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계 기업인 마즈다에서 3년 정도 일했지만, 번아웃 증후군에 걸려서 3년 동안 실업자로 살았다. 프랑스는 실업급여가 3년이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일 드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물가와 생활비가 너무 높아서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왔다. 96세가 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거주하시던 주택을 양딸에게 상속해 주셨다. 그 집을 프랑수아가 받았다. 그 후 프랑수아는 남편의 고향 근처 가까운 지역에 취업해 회사원으로 살면서 딸 하나를 더 낳았고, 우리처럼 남매를 키우고 있다.


프랑수아와 나의 남편, 그리고 나, 아디는 30대 초중반으로 한두 살 차이로 비슷하다. 프랑수아는 나와 동갑이다. 프랑수아의 큰아들 알렉산드르는 일곱 살, 딸 마야는 다섯 살, 그리고 나의 아들은 다섯 살, 딸은 올해 세 살이다. 나는 시골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시댁을 방문하는데, 갈 때마다 우리 가족은 프랑수아네 집으로 가서 아페리티프를 한다. 어른들은 술을 나눠 마시며 다양한 안주를 즐기고, 바비큐를 굽고, 아이들은 시골 마당에서 소란스럽게 뛰어놀고 논다. 프랑수아의 마당에는 트램펄린, 그네, 미끄럼틀, 어린이용 이동식 카반, 전동 자동차 등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것들이 가득하다. 마치 동네 놀이터를 옮겨다 놓은 것 같다. 나의 아들은 프랑수아의 아들 알렉산드르를 사촌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아이들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cousin’ 꾸장이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우리 딸은 프랑수아의 둘째 딸 나야를 'cousine’ 꾸진이라고 부른다.


가끔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의 적막을 깨고 시어머니 댁까지 들린다고 한다. 프랑수아의 아내인 아디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아시아 마트가 가까운 도시에 사는 나는 고추장과 라면 등 외국인들이 즐겨 먹을 수 있는 한국 음식을 가끔씩 사다 주면, 아디는 매우 기뻐한다.


지난주에도 아이들의 가을 방학을 맞이하여 시댁에 갔다가 프랑수아네 집에서 두 가족이 모여 저녁을 즐기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남편은 레드와인을 즐기고, 나와 아디는 로제 와인을 마셨다. 프랑수아는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술 취향이 다르다. 나는 첫 입에 상쾌하고 시원하며 끝 맛이 달콤한 로제 와인을 좋아한다. 아디도 나와 같은 이유로 로제를 마신다고 했다. 남편과 프랑수아는 마당에서 바비큐를 구우며 아이들을 돌봤고, 나와 아디는 이야기를 나누며 야채를 썰어 접시에 예쁘게 담고, 얇게 자른 바게트에 빠떼(돼지간과 기름으로 조린 통조림)를 발랐다. 창문 너머로 네 명의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니, 장성한 동서양 혼혈, 그리고 동서양 혼혈인 우리 아이들, 그리고 아프리카, 프랑스, 한국인 혼혈까지 지구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아디는 시골 생활에 적응했지만, 가끔 외롭다고 했다. 아디는 운전을 못 한다. 프랑스 시골에 살면 운전은 필수다. 시골에서 자동차가 없으면 동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기 힘들다. 아디는 마요트에서 열여덟 살 때 프랑스 본토로 넘어왔다. 마요트는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긴 하지만, 현지어가 따로 있다고 했다. 프랑스 티브이를 보면서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나도 잠깐 프랑스 대학에 등록해서 프랑스어를 배우긴 했지만, 임신 출산으로 인해 집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해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익혔다. 아디와 만나면 타향살이 외로움도 나누고, 부모 형제들을 멀리 떠나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어려움도 나눈다. 시간이 자정을 향해 갈 무렵 취기가 오른 프랑수아는 우리가 젊었을 때 마르세유 해변에서 밤새도록 들었던 음악을 틀었다.


당시에는 프랑스어를 몰랐던 나는, 노래 내용을 이해 못 했었는데 이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다. 노래 가사는 참 어이없었다. 자본주의 비판과 부자와 가난한 자의 현실, 그리고 이 시대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비애에 대한 내용이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랐고, 한국에서 지식을 익히고, 프랑스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나에게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가사였다. 테라스에서 음악 리듬에 맞춰 춤을 추던 프랑수아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는 흑인 가수가 부르는 가난함의 비애가 흘러나와 내 귀에 들렸다. 프랑수아네 집 넓은 마당에 나뒹굴던 데카틀론에서 갓 사 온 것 같은 상표도 떼지 않은 자전거가 엊저녁에 내린 비를 흠뻑 맞은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프랑수아를 보면서 ‘진짜 가난을 모르는구나’ 했다. '이것들을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서 생고생해봐야 정신 차리지'.  이런 농담을 서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친하다. 프랑수아는 웃으면서 '난 너처럼 북한에서 살았다면 총으로 내 머리를 쏘고 죽어 버렸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두 손가락을 모아 자기 머리에 총을 쏘는 시늉을 하고는 흐느적거리며 리듬에 몸을 맡겼다.


프랑수아 가족과 인연을 맺은 지 12년이 되었다. 그 사이 우리 두 가족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두고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20대에는 방황을 했고, 30대에는 방황을 끝내고 각자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있다. 남편도 프랑수아도 탄탄한 회사에 취업했고 생활들이 안정됐다. 프랑수아와 나의 남편은 한 동네에서 자랐고, 아내들은 외국인이다. 나는 프랑수아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가끔은 낯설고 신기할 때가 있다. 넓은 저택에 수영장이 딸린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남자가 '가난’을 말할 때는 가끔 웃기기도 하다.


풍요로운 나라 프랑스 사람들을 북한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비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프랑수아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고맙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편이지만,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표현이 많지 않고 잔잔한 사람이지만, 내가 프랑스에 집을 마련하기 위해 아낀다고 하면서 스파르타 식으로 한동안 북한 같은 생활 방식을 강요했었다. 프랑스인 남편에게 무슨 짓을 했나 반성도 했다.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그래도 묵묵히 내색하지 않고 따라와 준 남편에게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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