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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Dec 11. 2023

총의 무게, 생명의 무게

AK소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며 생각했던 민족과 전쟁의 의미

우리나라 여성들은 직업군인들을 제외하면 총을 만져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성별에 상관없이 총 쏘는 법을 배운다. 나는 내가 겪은 총에 대한 기억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북한에서 총의 소유가 합법적이지는 않지만 꽤 흔한 물건이다. 안전원도 보위원들도 그리고 군인들도 옆구리에 총이든 가죽 가방을 착용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총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드물다.  밖으로 노출된 총기를 보는 것도 아니고 총이 담긴 가죽 케이스를 봤다.


내가 7살 때었다. 총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당시 나라의 혼란한 틈을 타 범죄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살인강도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도 드물지만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범죄자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라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다 굶어 죽게 생긴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국가의 물건을 훔쳤다는 죄명이었다. 나라에서는 범죄자들을 엄벌을 한다고 하면서 다리 밑에  나무 말뚝을 세우고 거기에 죄수들을 포박해 놓고 총으로  쏴 죽였다. 그걸 처음 목격했을 때 나이가  7~8 살였는데 한국 나이로는 초등학교 2학년쯤 되는 저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었다. 사실 총살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봐야 하는 건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다리까지 가게 된 날이었다. 우연히 안전원들이 총으로 사람들을 쏴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인민군 군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안전원 여덟 명이 열을 맞추어  누군가의 구령에 따라 행진해서 나오더니 죄수를 향해 총을 들어 올렸다. 자세히 본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막을 찢어 버리는 듯한 앙칼진 쇳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같기도 했다. 전쟁영화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둔탁하지만, 실제로 들어본 총소리는 쇠와 쇠가 부딪히는 듯한 앙칼진 소리에 유리에 날카로운 물건을 대고 긁는 듯한 소리와 비명소리가 섞인 소리였다. 말뚝에 묵힌 사람은 그야말로 고깃덩이처럼 나뒹굴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뒤 나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무사가 붉은 투구를 쓰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오려고 했다. 가위 비슷한 것도 자주 눌렸다. 눈을 떴지만 말을 할 수가 없고 공포스럽고 숨이 막히는 그런 경험을 꽤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더 충격적인 일들을 연이어 겪다 보니 기억도 잊히는지 스스로 어떻게 치유가  됐다.


두 번째 총에 대한 기억은 열다섯 살 때였다.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이나 혹은 고등학교 1학년쯤 속해 있을 것이다. 북한은 고등학교가 없고 고등중학교 6년제가 있다. 고등중학교 5학년 5월이 되면, 전국의 모든 아이들이 노동적위대 첫 훈련을 받는다. 사로청 청년동맹 있는데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되며 청년동맹증을 받는다. 한국으로 치면 기본 증명서쯤 되려나?.. 청년동맹원들은 누구나 15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청년적위대에 참여해야 한다. 각 군 소재지에 청년적위대 훈련소가 있다. 훈련소는 군에 소속된  단위들의 고중학교 5학년 학생들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 훈련시설이었다. 거기는 그냥 군대였다. 기다랗게 늘어선 단층 건물에 양쪽으로 남자 병실 여자 병실이 나뉘었었다. 보통 두 개의 학교가 한방을 쓰는데 2층으로 된 나무 침대가 병실 내에 진짜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거기에서 열흘 정도 머물면서 군사훈련을 받는다.


당시 나는 함경북도 새별군 종산리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종산리에서 새별군까지는 40km 백리 거리였다. 한국처럼 고속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으면 금방이 닿을 거리지만,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의 국도를 잇는 북한 도로 사정상 꽤 긴 이동시간이 필요했다. 비포장도로라고 해도 자동차가 휘발유 엔진이면 한 시간이면 도착한다. 하지만 종산리에는 휘발유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대신 목탄차라고 해서 진한 초록색 적재함이 달린 트럭의 뒷좌석에 둥그런 휘발유 통 모양의 쇠 통을 붙여서 거기에 참나무를 때서 연료로 쓰는 목탄차를 타야 했다. 목탄차는 북한의 에너지난 때문에 증기기관의 원리를 차용해서 만든 북한 나름의 주체 기술력이 듬뿍 담긴 이동 수단이다. 목탄차는 잔고장이 많고, 바퀴에 껌만 붙어도 나가질 않는다. 특히 경사진 도로를 올라갈 때는 걸어가는 게 더 빠를 정도이고, 조수는 기다랗게 생긴 나무 받침대를 바퀴가 굴러 후진해서 내려가지 않도록 받쳐 주면서 이동해야 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노력으로 겨우 목탄차를 배정받아 새별군에 있는 적위대 훈련소로 가는 차를 탔는데, 아이들은 오십 명 남짓했지만, 장사꾼이며, 시장이 발달되지 못한 농촌 특성상 장마당에 생활필수품을 사러 가는 리의 사람들이며, 행정업무를 보러 가는 이웃들이며 아주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차서 이동해야 했다. 학생들은 카키색 군복을 입고 벨트를 차고 운동화를 신고, 둥그런 베레모 모양에 붉을 별을 단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배낭을 메고 부모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떠나 목탄차에 몸을 싫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을 떠나는 것 같기도 하고,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유를 맛본다는 즐거움도 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십 대 중후반 이 되면 천천히 이성에 눈을 뜨는 시기와 겹쳐서 설레기까지 했던 것 같다.


청년적위대 훈련소에서 받는 군사훈련은 학생들이 받는 육체 군사훈련 치고는 강도가 셌다. 다섯 시면 기상나팔이 울렸다. 밖으로 나와 운동장에 모여서 아침 운동을 하고 세면실로 이동해서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은 큰 수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그 물에 설거지를 했다. 오염된 수조 물을 비우면 아이들이 카로운 계곡으로 내려가서 물통으로 물을 길어서 채워야 했다. 수조는 물이 톤도 넘게 들어갈 만큼 컸다. 훈련은 그럭저럭 견딜만했는데 식당 당번을 섰을 때만큼은 진짜 힘들었다. 10리터짜리 물통 두 개를 양쪽에 들고 하루 종일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야 하는데 팔이 빠져 버릴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그리고 식사는 미역국에 옥수수와 적은 양에 쌀이 섞인 잡곡밥을 줬다. 알루미늄 재질의 둥그런 국그릇 모양의 군용 식기가 있었는데 제대로 씻지를 않는지 곳곳에 누런 찌든 때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대형 수조에서 하는데 미역국 건더기를 버릴 데가 마땅치 않은지 그 수조 안에 남은 음식물을 버리고 그대로 설거지를 했다. 깨끗이 세척이 되었다는 국그릇에 미역 건더기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열다섯 살 먹은 아이들이 밥도 해야 됐고, 설거지며, 뒷정리까지 스스로 해야 했다. 전쟁 난리 통에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라고 했다.


적위대 훈련소를 퇴소하기 사나흘 전부터 총기를 배급받는다. 우리는 모두 집합해서 병실 뒤쪽에 위치한 그늘진 공터로 이동했다. 책상이 길게 놓여 있었는데, 책상 위에 총기들이 일정한 간격을 맞춰 절도 있게 놓여 있었다. 교관이 우리에게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총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도 총기 앞으로 다가갔다. 칼리 치니 코프가 설계했다는 실탄을 장전할 수 있는 진짜 AK 소총이었다. 교관은 총을 들라고 했다. 나는 총앞에서 머뭇거렸다. 총이라는 물건은 생명을 해치기 위해 발명된 물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총을 들어 대상을 선정하고 쏜다면 필연적으로 생명의 목숨을 해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생명에 대한 무게가 느껴졌다. 교관이 다시 내 이름을 부르며 총을 잡으라고 했다.


손으로 AK 소총을 살짝 만져봤다. 그 느낌이 얼마나 차갑고 서늘하게 느껴지던지. 수천 미터 지하 냉장고에서 꺼내왔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를 어냈다. AK 소통은 겉으로 보이는 몸체는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나무가 AK 소총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나무였다. 내가 그렇게 차가운 느낌을 느껴 본 건 북한에서 국경을 넘었다가 중국 변방대 체포되어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울 때였다. 중국의 수갑은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났었다. 북한의 수갑은 검다. 북에서는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울 일이 없었다. 중국 공안이 나를 체포해서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수갑이 내 팔목에 닿는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살면서 그토록 서늘한 느낌을 주는 물건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법을 어겼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내 팔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을 생각을 했다.


AK 소총을 내 손에 쥐었을 때 그리고 내 손목에 첫 수갑이 채워졌을 때 내 심연에 깊숙이 전달하는 그 서늘한 느낌이 매우 비슷했다. 소총을 분해하는 법을 배우고 그 안을 닦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탄창에 탄알을 장전하는 법을 배우고,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법을 배웠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탄창을 올리고 탄알을 한 알씩 한 알씩 장전했다. 그리고 목표물을 조준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때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총에 탄알을 장전하고 누구를 쏴야 하는 건가? 내가 이 총 쏘는 법을 배워서 우리 지도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총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 우리는 민족이라고 배웠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며 슬기로운 민족이며 우리는 하나의 조상을 뒀다고 배웠다. 그런데 내가 이 총을 들고 내 동무의 핏줄일지도 모르는 남쪽에 사는 동족을 쏴서 죽여야 한다네 이게 얼마나 불합리한가?


누군가의 목숨을 그것도 동족의 목숨을 해쳐야만 한다이게 뭔가 잘 못 된 거 아닌가? 김일성은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을 했다고 했는데, 결국에 우리는 총 쏘는 법을 배워 우리 민족의 목숨을 해쳐야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라는 것도 피를 흘려 독립을 이뤘다는 내 강토에 전 세계 외국 군대들을 끓어다 놓고 내 형제, 내 부모, 그리고 내 친구의 피붙이들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걸 다시 하자고 나는 총 쏘는 법을 배우고 있구나.


나는 그렇게 사격을 배웠다. 백 미터 거리에 목표물이 세워졌다. 열 명씩 한 조가 되어 앞으로 나갔다. 실탄을 배정받은 아이들은 사격에서 울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손에 총을 쥐고 사시나무 떨듯 떨어 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무서워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룹들이 사격을 하고 점수 매겨지고 뒤에 가서 휴식을 취할 즘 사격장에는 날카로운 소음과 매캐한 화약 냄새로 뒤덮여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단발 모드에 놓지 못하고 연발 모드에 걸어 드르륵하는 음을 내기도 했다. 희한하게 총소리에 금방 적응이 됐다. 숱한 생각들을 하게 만들던 총기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그 매캐하고 내 폐를 찢어버릴 듯한 스산한 냄새도 금방 익숙해졌다. 사람 잡는 전쟁도 이렇게 익숙해지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주변에서 그 고막을 파괴할 것 같은 총소리와 사람 잡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곧 평온하게 내 차례를 기다렸다. 동무들과 농담도 주고받으며 타 학교에서 온 학생들 틈에서 훌륭한 신랑감으로 손색없을 법한 남자들의 외모에 등수를 매기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곧 내 순서가 됐다. 나는 탄알 세발이 장전된 나의 무기를 들고 진지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엎드렸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안전장치를 내리고 단발 모드에 맞췄다. 그리고 조준을 했고 내 목표물을 향해 방아쇠를 한발 당겼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에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매캐한 화약 냄새 그리고 탄알을 발사하는 폭발의 힘에 의해 한 번씩 총알이 빠져나갈 때마다 개머리판이 내 작은 어깨를 사정없이 툭툭 쳤다. 내 옆에 아이는 크게 울고 있었다. 나도 무서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빨리 해치우자는 생각을 하며 두 번째 세 번째 방아쇠도 당겼다. 곧 사격 연습이 끝났고, 신호수가 점수를 알려 왔다.


30점 만점에 28점이다. 그렇다 나는 명사수였다.  내 옆에서 무섭다고 펑펑 울어대던 아이가 내 과녁에 쏴준 게 분명하다 생각했다.


내 피붙이들을 지키는 일 외에 내 손에 다시 총을 다시 잡는 일이 없을 거라 다짐하며 집으로 향하는 연기가 풀풀 나는 목탄차에 몸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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