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철학자들

by 서산

인생에서 단 한번, 전교 1등을 해봤습니다. 교탁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학 과목 가채점을 한 그날. 남들 다 들리는 혼잣말로 "다 맞았다"를 외쳤습니다. 그 순간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네가?" 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그도 그럴 것이 친구는 전교권 학생이고 저는 평균 70점을 겨우 넘기는 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죠. 그 시험 이후론 높은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왜 해야 하는지 고민이 시작되면 납득이 돼야 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 성향이 약했던 첫 시험에는 이유도 모른 채 정답 찾는 게 재밌었던 수학만 공부했고, 운 좋게도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아직도 그 점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후에 더 인상 깊은 점수는 없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어른들은 저를 보면 "공부 잘하게 생겼네"라는 말을 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 도수가 높은 동그란 해리포터 안경을 써서 그랬던 걸까요. 할 말이 없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서 그랬던 걸까요. 어쨌든 그 말은 공부하기 싫은 스스로를 민망하게 만들었고,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무언가 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고민만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시간보다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았죠. 불행히도 학교 선생님들이 말해주는 공부해야 하는 이유 중 와닿는 대답은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주변에 공부에 흥미 없는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상위 몇 퍼센트를 빼면 대부분은 공부에 흥미가 없을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고민 많은 저에겐 큰 행운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민에 대한 답을 찾을 때까지 부모님이 기다려줬다는 것이죠. 나중에 들어보니 제 성적을 궁금해하는 아빠의 호기심을 엄마가 꾹 억제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부모님은 공부로 압박을 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 쭈뼛대며 다가가서 결과를 말하면 "잘했네, 다음엔 좀 더 잘해봐"라는 말을 해주었죠. 그렇게 부모님은 공부 안 하는, 어찌 보면 방황하고 있는 저의 때를 기다려주었습니다.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도, 대학교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한다고 했을 때도, 대학교 졸업하고 코딩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도 금전적 지원은 물론이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기다려주었습니다. 교육과정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대학을 끝마치고 오롯이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가 되고 나서야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긴 기다림 끝에 내린 결론은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였습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원하는 회사를 가기 위해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생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인문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이 과정 속에서 조금씩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농담으로 ‘어렸을 때 공부를 안 해서 지금 할 에너지가 충분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누군가는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20대 중반부터 매일매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지수 기자가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인터뷰하고 엮은 책입니다. 책에 한 파트를 맡은 분이 '고민하는 힘'이라는 책을 쓴 정치학자 강상중 님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돈이란 무엇인지, 왜 일을 하는지, 청춘은 정말 아름다운지, 왜 죽어서는 안 되는지 등을 고민했다는 소개는 고민 많은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어 본문에서는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고민의 힘이 살아가는 힘"이라는 메시지. 그리고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이라는 메시지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는 내 인생의 철학자인 부모님의 인터뷰를 추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실에 있는 철학자들은 저를 궁지에 몰리지 않게 해 주었고,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고민하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까지. 요즘 삶의 낙중 하나는 무언가를 해내고 부모님께 얘기하는 것입니다. 디자인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회사도 창업해 보고, 해외살이도 해보는 등, 느낀 점과 새로운 배움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얘기하면 부모님은 환하게 웃으며 그럴 줄 알았다고, 정말 다 때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집안 거실에 출륭한 철학자들이 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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