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공부 대신 일본어

by 구하늘

공부 말고는 모든 것이 재미있던 고등학생 시절.


게임도 질릴 만큼 했고, 새로운 놀거리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일본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낯선 언어, 낯선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날도 적지 않았다. 한 편, 두 편 보다 보니 보고 싶은 작품도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누군가 자막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견딜 수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딘가에 계실 번역가님!! “제발 자막 좀 만들어주세요!!!” 그렇게 하염없이 며칠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다. 문득 ‘이렇게 목 빠지게 기다릴 바에는 내가 일본어를 익혀야겠다.’ 생각이 들어 맨땅에 헤딩하듯 히라가나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교과 내용보다 일본어 공부에 쏟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 제일 흥미가 없던 과목의 교과서 표지를 뜯어 일본어 교재에 덧대고 몰래 본 적도 있었다. 당시 몸이 베베 꼬일만큼 싫었던 과목은 영어였다. 언어 속에서 헤엄치는 느낌이 싫어 이과를 선택했는데 정작 다른 외국어를 자발적으로 공부하다니,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싶다.


아침 자습 시간, 수업 시간, 그리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내 생활 패턴은 온통 일본어 교재와 NHK 뉴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을까. 혼자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것이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나? 주구장창 책 앞에서만 익힌 일본어가 과연 현지에서 통할까?

한 번 피어오른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고3 여름방학.
다른 친구들은 얼마 남지 않은 수능에 매진 할 무렵, 나는 첫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
국내 여행조차 혼자 가본 적이 없는데 혼자서 해외라니.
그것도 공부에 매진해야 할 고3에.


“엄마, 나 이번 여름에 혼자 일본 갔다 올게.”
통보 아닌 통보였다.

“뭐??? 갑자기? 공부는? 수능도 얼마 안 남았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입장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반대했지만 끝내 허락을 받아냈고 (져주신거겠지..)

그렇게 그해 여름

나는 처음으로 도쿄 땅을 밟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00.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