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얼굴 없는 그녀

by 고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아무리 해마(海馬;뇌)를 흔들어봐도

거짓말같이 사라져 버려


틈 없이 사진을 꺼내 보고 고쳐봐도

손끝이 기억에 다가가면 갈수록

얼굴 없는 그녀만 눈앞을 가려


이러다 느낌조차 사라질까 무서워

솟대 앞 검은 장승처럼 울고 있을 줄이야

울고 있을 줄이야


너무 답답해

많이 보고 싶어

내일 내가 너에게로 가!



※해마(hippocampus): 그 모양이 동물 해마(海馬)를 닮아서 불려지는 뇌의 기관으로써, 뇌의 측두엽 안에 좌우 총 2개가 있다. 이는 단기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만드는 역할을 주로 하며, 공간 개념, 감정적인 행동도 조절한다.

P.S

더 이상 미련이 없는 후련한 이별이 아니라면, 헤어진 사람들은 금새 밝은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아직 자신의 삶과 사랑이 동일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떼어서 생각되지도 생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일상에서 벗어나 홀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미련이 남은 이별을 하고, 홀로 떠나는 여행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해 줌으로써 아픈 사랑이 잘 정리될 수도 있다는 감정에 기대는 것이리라. 일상에서 완전히 떠나려는 것이 아닌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치유한 후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일종의 자신의 사랑이 깊고 순수했음을 합리화하는 이별의 하이라이트 내지 피날레인 것이다. 수타 짜장면을 먹고 그 맛을 조금은 연장하기 위해 양치를 미루는 것처럼!


정신분석적으로는 인간 본연의 자기애(自己愛) 즉, 과하지 않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스스로에게 측은지심을 갖게 하여,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슬픈 노래를 들으며 우수에 빠지듯이 슬픈 낭만주의자가 되어 낯선 여행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슬픈 도시를 이야기한 채리필터의 노래 '낭만 고양이'처럼!


그렇게 여행을 통해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일상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더 깊어져서 돌아오기도 한다. 도저히 '사랑'을 낯선 여행지에 떼어두지 못하고 가져오는 것이다. 사랑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 재확인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특이한 기재(奇才)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 친구와 놀다가 집에 오면 그 친구의 얼굴을 이상하리만큼 정확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세심한 편인데도 그랬다. 반대로 친근감이 크지 않은 친구의 얼굴은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친구를 다음 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녀와의 첫사랑도 이 기재(奇才)가 여지없이 작동했었고,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확신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는 연애하는 내내 변함이 없었다. 여느 연인처럼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점도 찾아가고 꽁냥꽁냥하는 일상이 하루만 지나가도 그녀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다툰 날도 이 신기한 기재가 작동했다. 그녀의 입은 옷, 느낌, 향 모두 생생한데 유독 얼굴만 안갯속이다. 그래서 계속 보고 싶었다.

혼자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러는 사이 시간은 왜 이리도 배려 없이 흘러가는지! 벌써 2개월이다.

아름답고 따스한 제주도에서조차 소득 없이(?) 외로움만 짊어지고 돌아왔다.

사랑싸움으로 헤어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완전한 이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정 이별을 원하지 않는다면 너무 늦지 않는 재회가 필요하다. 참을성(?)이 부족하던가, 사랑의 함량이 더 크던가 여하튼 한쪽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면 재회의 조건이 완성된다.


사실 잠시 헤어져 있는 동안 세상 무엇보다 괴롭겠지만 반대로 서로 사랑의 깊이를 실감하는 성장통이자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존중하는 재회(再會) 상비약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고통 없이 끝없이 성장하는 사랑이면 좋겠지만 인생이 그런가 어디!

다툼이 힘들긴 했어도 헤어질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나는, 그녀의 이별 통보에 진위를 생각하지 못한 채, 자존심인지 배려심인지 무엇인지 반박하지 않고 따랐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보고 운동도 해봤지만 오히려 그녀와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만 아프게 깨달을 뿐이었다.


결국 더 이상 헤매지 말고 그녀의 얼굴을 찾으러 가자는 결심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즈음 그녀가 먼저 집으로 찾아왔다.

어스름한 저녁 그녀의 얼굴이 가로등에 들어왔다. 녹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가로등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순간 얼굴 없는 그녀는 다시 내 기억에 온전히 되살아났다.

"진짜 헤어질 생각이었어? 연락도 아예 안하고"


나는 그동안의 아픈 심장에 가장 강력한 진통제를 맞았고 그렇게 화해되었다.

조금 어색함도 있었지만 미안함에 대한 예의였을 뿐 우리는 이내 일상을 회복했다.


"이젠 우리 부모님께도 인사할까?"


"나는 좋지!"


"조만간 아빠 엄마 동생 모두 가족여행 가거든! 돌아올 때 자기가 공항으로 마중 나오면 어떨까? 그때 인사도 드리면 덜 부담될 거 같아"


"아! 그러면 되겠다"


그녀는 가족 모두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그녀의 부모님께 나를 소개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