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안개가 산을 넘기 시작한다. 슬금슬금 넘어오던 안개는 잠깐새 산 하나를 꿀꺽 넘었다. 또 잠깐 한눈 판 사이, 안개는 두 번째 산을 타기 시작했다. 커피를 내리고 오니 그동안 또 산 하나를 넘었다.
자연이 부리는 요술에 신이 나 넋 놓고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 하나가 안개에 잠겨 버렸다.
이른 아침이었다. 숙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창 올림픽에 참가했던 각국 선수들의 숙소였다는 호텔은 도시 한복판에 있었다. 도시래봤자 작은 아파트, 연수원, 주택들 그리고 마트가 있는 정도. 고교 축구 대회로 인해 도시 안 숙소가 만실일 때, 겨우 하나 잡은 방이었다.
전날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서 땀을 쏙 뺀 후라 잠은 푹 잤다만, 늘 오던 숙소가 아니라 '그놈의 축구 대회'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축구인들을 화내게 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 집엔 붉은 악마의 창단 멤버가 살고 있다.)
그런 내 맘을 알았는지 아침부터 안개가 화려한 쇼를 보여주었다. 갑자기 기분이 훨훨 날아갈 듯하다. 쇼 중 가장 재미있는 쇼는 일출, 일몰, 안개, 연무 등 자연이 주는 쇼가 아니던가.
어느 날 문득 방문한 평창이라는 도시와 우리 부부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시간만 나면 두세 시간을 내달려 평창에 왔다. 늘 묵는 숙소, 늘 가는 한우집이 생겨버렸다. 평창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안반데기에 올라가 쿠르릉 거리는 구름 속을 들여다보며 번개가 몇 번이나 치나 새어 봤다. 눈 덮인 산속에 들어가 눈보다 하얀 양들과 눈 맞추며 건초를 줬다. 급속히 추워지는 해발 천몇 미터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그곳에 사는 주목들을 만났다.
평창은 나에게는 위로였다. 눈에 큰일이 생긴 줄 알고 뛰어간 안과 병원에서 '노안입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는 그동안 무서워서 못 했던 라식수술과 노안 교정을 한 날, 집에 도착해 욱신거리를 눈을 감고 귀로만 들었던 게 바로 평창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비가 와서 아이가 쫄딱 젖어 집에 들어왔다며, 학원은 대체 뭘 했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네 시간이나 전화로 괴롭힘을 당한 후에 남편 몰래 눈물을 삼키며 꾸역꾸역 먹었던 국밥집도 평창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날,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오기 시작한 조용한 눈이 몇 분만에 소복이 쌓여버린 날. 잘 되는 일 하나 없이 늘 고달프기만 한 내 삶을 잠시 눈 위에 뉘어보라는 듯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 잠시나마 머릿속 모든 짐을 내려놓기도 했었다.
그렇게 평창은, 자연은 내게 위로가 되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