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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자 Mar 15. 2024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르던 사람

지난주 면접교섭 후, 가족사진 찍는 것 때문에 나눴던 대화(싸움) 이후에 꽤나 힘든 한 주다. 그 사람의 악다구니가 꽤나 머릿속에 많이 남는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그러면서 느끼는 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이다.


그 사람은 항상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이혼을 하고 꽤나 지났지만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내가 변호사 사무실을 먼저 찾아갔기에 소장을 보냈다고, 이혼을 내 탓을 하는 그 습성도 결혼생활 중에 본인의 '이노센트'를 주장하던 것과 비슷했다. 


공주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녀는 내가 이혼할 깜냥이 안 되는 것을 알고는 무기처럼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곤 했다. 처음에 이 두음절의 단어는 참 무서웠다. 그래서 참았다. 마음에 없어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 단어에 무서움을 느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이혼을 혼자 하는 게 아닌데, 이혼을 한다고 인생이 망하는 게 아닌데 뭐 그게 그리 두려워서 나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이 그녀에게 설설 기었을까. 


나는 기억하지도 않지만, 조정위원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보다.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보다, 실제로 행동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며 이혼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전가한다. 그런데 그녀는 모른다. 조정위원과 개별적으로 면담을 할 때(조정위원은 양측과 같이 면담을 하지 않는다. 한 명씩 따로 한다.), 조정위원이 나에게 처음 꺼낸 말은 이거였다. 


"와이프 분은 이혼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우리는 이혼하기로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지속적으로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안 그래요."(얼마나 '이혼'이라는 단어를 무기로 썼길래, 조정위원이 느껴질 정도였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본인의 레퍼토리에 없었을 것이라는 걸. 내가 진짜 변호사를 찾아갈 것은 예상치 못했을 그녀다.


별거가 시작된 이후에 장모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었다. 딸이 왜 이혼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나는 왜 이혼을 하자고 하는 거냐고. 대체. 


그런데 나도 알고 엄마도 안다. 1년 가까이 공주를 보느냐 며느리랑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본 엄마는 더 이상 내 이혼을 말리지 않았다. 정작 메타인지가 되지 않는 건 그녀와 그녀의 엄마다.


나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그 사람은, '이혼'이라는 단어를 미끼로 나를 구속하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만 삼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모르는 게 하나 있다. 


그 단어가 본심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한 번 꺼내는 순간부터는 마음속의 고려대상이 된다는 것을. 


내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기 전에, 우리는 분명히 서로 합의를 보았다. 이혼을 하겠다고. 


재산분할 문제는 서로 이견이 많았다. 그래서 조정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 부분에도 동의했다. 본인은 변호사를 찾아가기 힘드니 내가 먼저 가겠다고까지 이야기했다. 


"내가 변호사한테 가면 얼마 있으면 소장이 날아올 거야. 그러면 너도 그에 맞춰서 준비해"

"알았어. 변호사비 아까우니까 내가 셀프로 하든지 뭐 알아서 할게"


이런 대화까지 나눴던 우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소장을 날렸으니, 이혼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본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잘못은 항상 내가 하는 것이라고. 


법적으로, 6년 7개월의 결혼생활동안 그녀는 한 번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미안한 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뭔가 느꼈어야 하는데, 참 무지했다. 이 생각과 행태는 변하지 않는다.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탓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야기했었다. 

"나도 잘한 건 없지만, 하지만 이혼을 만든 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야"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 그런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본인이 겪는 모든 불편함과 고통을 타인에게서 찾고, 타인을 고치려고만 드는 사람이기에. 


이혼이라는 큰 산을 겪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면접교섭을 몇 시에 가겠다는 말 외에는, 그녀와 웬만하면 말을 잘하지 않는다. 이런 갈등과 감정이 생기는 것이 너무 싫기 때문이다. 잘 살고 있다가도, 나르시시스트의 악다구니 몇 마디에 또 관성적으로 집중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제대로 알았다. 어떻게든 내 틈을 파고들어서, 나의 약점을 공격해서 본인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그 오만한 노력을. 


공주에 대한 죄책감은 이미 가지고 살고 있다. 내가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할 죄책감이다. 이건 맞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아무리 그 사람은 내가 잘 못해서 이혼한 것이라고 뱉어대지만, 아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그리고 참을 만큼 참았다. 


악마 같은 말에 휘둘려서 이번주 한 주는 집중이 잘 안 됐다. '복수심'은 잊고,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자 했는데, 다시 복수심 비슷한 게 올라온다. 다시 잘 진정시켜야겠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그 불완전함을 알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불완전함마저도 사랑하는 것은

더 큰 사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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