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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길

[백석의 푸시킨 번역 詩]

by 김양훈

굽실거리는 안갯속을

달이 샌다.

슬픈 들판에

슬픈 달빛이 흐른다.


쓸쓸한 겨울 길에

살 같이 달리는 뜨로이까⁰.

언제나 외가락 방울 소리

딸랑소리도 역하고나.


말모릿군의 기나리¹ 속에

그 무슨 살틀한¹⁻¹ 것 들린다.

정에 격한 소동과도 같이,

가슴 아픈 수심과도 같이...


등불도 꺼먼 오막살이도 없이

외진 벽촌과 눈뿐...

알락달락한 길 표말이

우뚝 우뚝 서 있을 뿐...


쓸쓸하고나, 서글프고나... 내일은 니나여,

내일은 사랑하는 네게로 돌아 가,

난로 가에 모든 것 다 잊고 앉아

한 없이 너만 그냥 바라 볼란다.


시계 바늘은 똑딱거리며,

제 길을 틀림 없이 뱅뱅 돌아가,

그제²는 시끄러운 사람들과는 멀리

깊은 밤을 너와 나 같이 하리라.


서글프다, 니나여, 쓸쓸한 이 길,

말모릿군 조으느라 말이 없고나,

언제나 외가락 말방울 소리

달은 안개에 어리였다. (1826년, 27세)


[註]

■트로이카(삼두마차)⁰ : 트로이카는 러시아의 특유의 교통기관으로서 세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두 사람 내지 세 사람이 탈 수 있었다. 보통 때에는 마차로서 이용하다가 겨울이 되면 차바퀴를 떼어내서 차체를 큰 썰매 위에 싣고 달렸다. 그리고서 다시 눈이 녹으면 마차로 전환시켰다. 마부석(馬夫席) 뒤에 포장이 달린 좌석이 있는데, 좌석은 2인승 정도의 좁은 면적으로 마부석보다 낮다. 방울소리를 울리며 눈 쌓인 벌판을 질주하는 이미지는 민요의 서정적 주제가 되어 왔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상징물 중 하나로서, 러시아에서는 최근 외국인의 이국의 정취를 충족시키기 위해 트로이카 놀이를 겨울 관광코스에 넣었다.

■기나리¹(=긴아리)- 길게 뽑아서 부르는 민요조의 노래. 황해도 일부와 평안도 강서, 용강 지방에서 불리는 민요의 하나. 바닷가 개펄에서 조개를 주울 때나 밭에서 김을 맬 때 부른다고 한다. 장구 반주도 없이 잔가락을 많이 붙여 일종의 푸념과 같이 목청을 길게 뽑아 부르며 긴아리 뒤에는 자진아리를 연이어 부른다.

■살틀한² -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정성이 있고 지극한.

■그제(際)³ - ‘그때’의 일본어식 표현. 때, 즈음, 기회. その際(さい)

■<겨울 길>은 마치 백석의 시를 보든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詩評]

■ 백석 번역 〈겨울 길〉의 문체론적 특징― 러시아 낭만주의와 조선어 서정 사이에서 탄생한 새로운 시적 언어

1. 조선어 어휘의 선택: 부드러운 모음과 유려한 자음의 지향

푸시킨의 러시아어는 자음군이 강하고 절삭감이 있는 언어다. 그러나 백석은 이를 모음 중심의 서정적 어휘로 대체한다.

백석의 시어들은ㅏ, ㅗ의 개방 모음, ㅅ·ㄹ·ㅎ 중심의 부드러운 자음을 많이 사용하여 겨울 길의 차가움을 ‘부드럽게 식힌’ 감각을 만든다. 이를 통해 원시의 냉정한 고독은 한국적 정한(情恨)을 띤 서정적 고독으로 변환된다.

2. 구문(句文)의 호흡: 짧은 절제 → 완만한 유장함

푸시킨의 원문은 러시아 시 전통답게 짧은 문장 구조와 음보의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백석은 이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길고 부드러운 문장 호흡을 사용한다.

백석의 겨울 길은 “흩어지는 호흡”을 가지며, 푸시킨의 겨울 길은 “단단하게 끊어지는 호흡”을 가진다.

백석의 번역은 문장의 완급 조절을 통해 겨울 풍경의 여운을 길게 늘이며 조선어 특유의 운율을 만든다.

3. 이미지의 감각화: 절제된 이미지 → 감각적·촉각적 미학

푸시킨은 이미지 최소주의자다. 그러나 백석은 하나의 이미지를 감각층위로 확장한다. 즉 한글이 만들어 내는감각의 중첩. 시적 미감이 특징이다.

4. 정조의 변환: 낭만적 고독 → 정한 어린 서정

푸시킨의 고독은 건조한 철학적 고독이다. 이에 비해 백석의 고독은 살결을 가진 정서적 고독이다. 백석은 감정을 한 단계 더 윤색했지만, 과장 없이 담담하게 녹여내어 서러움 = 고독의 온도로 승화시킨다. 이 온도의 차이가 러시아 낭만주의와 조선 서정시 사이의 미학적 차이를 보여준다.

5. 민속적 리듬과 조선어 서사의 개입

백석은 번역에서도 민요적 율조를 숨기지 않는다. 백석의 번역은 민요의 리듬처럼 흔들리고, 되뇌고,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때문에 원문의 정적 풍경보다 더 살아 있는 감정의 결을 형성한다.

*푸시킨—길 위의 성찰

*백석—길 위의 노래

이런 차이가 문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6. 번역을 통한 ‘제3의 문체’ 창조: 원문도, 순수 한국시도 아닌

백석의 〈겨울 길〉은 단순 번역이나 모방의 영역에서 벗어나 원문과 한국어 시학 사이에서 생성된 제3의 문체를 만든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직역이 아니라 ‘정조의 등가물’을 찾는다.

2. 원문보다 감각을 확대하되 과장하지 않는다.

3. 한국어 품계(부사·어미·연결어)로 리듬을 새롭게 만든다.

4. 풍경 묘사에 정한·여운·음영을 추가한다.

이로써 백석의 번역은 푸시킨을 한국에 소개한 것이 아니라, 푸시킨의 서정을 조선인 화자가 다시 말하는 방식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 된다.

■ 결론

백석 번역의 문체론적 특징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드러운 모음과 조선어적 어휘 사용

*길고 유장한 구문 호흡

*감각적 이미지의 다층적 확장

*정한 감성과 여운의 리듬화

*민속적 운율의 개입

*번역과 창작의 경계를 넘는 제3의 문체 형성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백석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이전’이 아니라 한국 현대시 문체의 형성 과정에서 볼 때 하나의 실험적, 창조적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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