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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Mar 25. 2024

몰 털어진 기정

내 고향 마을 구엄리 해변에 바싹 붙어 제주올레 16코스가 지나가는데, 철무지개¹⁾ 구엄포구에서 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몰(馬) 털어진 기정’이 나온다. 제주 사람들은 절벽을 '기정'이라 부른다. 말이 떨어져 죽은 절벽! 여기서부터 길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남또리 기정²⁾까지 검고 거친 현무암 벼랑길을 따라 이어진다.   

  

친구인 정군칠 시인은 이 길을 좋아했다. 그의 고향은 한라산 넘어 중문 베릿내³⁾인데도 구엄 해변 길을 더 좋아했다. 그는 달이 뜬 열이레 가을의 구엄 해변 풍경을 그의 詩 '애월길'에 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모진개'⁴⁾라 부른다. 조그만 아기 무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오래된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기나 젖먹이가 죽으면 어미 모르게 여기에 묻었다. 어미는 제 새끼를 가슴에만 묻으란 뜻이었을까? 모진개는 가엾은 젖먹이들의 공동묘지였다. 어둠이 지면 도깨비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이곳으로 오길 꺼렸다. 그래서 밤이 되면 작은 요정들은 그들만의 나라에서 난쟁이 해국과 쑥부쟁이들과 바람을 친구삼아 동터 올 때까지 실컷 놀 수 있었다.      


애월길

           정군칠      


달의 뒤꿈치를 끌어당기는 먹구름이

가끔 길을 끊어 놓는다.

길섶의 쑥부쟁이 내음 더욱 짙어지고

해안은 열이레 가을 달로 마모되어 간다.     


구엄 지나 중엄, 중엄 지나 신엄의 오르막길

사람이 곧잘 떨어져

죽은 흔적이 남아 있는 벼랑에

문수가 서로 다른 신발들이

드문드문 방지석으로 서 있다.  

   

달이 벼랑에 이르자

방지석 사이 뿌리를 두고 피어난 한 무더기 억새

자줏빛 더욱 짙어진다.     


마을의 불빛들 모두 꺼지고,

벼랑 위의 멍을 지나 고내로 떠가는 달

느슨하게 몸을 풀던

아스팔트의 역청재가 굳어지는 사이

또다시 고내 지나 애월로     

젊은 날 친구들이 구엄엘 놀러 왔다. 1975년 겨울 초입이었다. 몰 털어진 기정 위에 있는 '모진개' 언덕에 줄지어 서서 사진을 찍었다. 모진개는 영화 '라이언의 처녀'에 나오는 아일랜드 해변과 닮았다. 정군칠 詩人은 몇 해 전에 이 애월길 넘어 알 수 없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어디론가 먼저 떠나갔다.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애월길에서 이제는 달빛마저 곱게 보기 어렵다. 달빛을 즐기기에는 늘어선 해변 카페들의 조명 불빛이 너무 밝고 눈부시다.      


사진 속 친구들이 서 있는 곳을 지금은 해안도로가 지나간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레스토랑과 카페와 호텔들이 들어섰다. 자동차들이 수시로 지나다닌다. 깊은 밤 평화로운 어둠의 정토(淨土)를 빼앗긴 어린 영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註]

1) 마을 어른들은 구엄포구를 '철무지개'라고 불렀다. 옛 구엄포구는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조간대의 위쪽에 있었기 때문에 썰물 때는 배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가야 할 고깃배는 썰물로 포구 안에 물이 완전히 빠져버리기 전에 미리 '밧개'로 배를 옮겨 매어둬야 했다. 또 포구로 들어올 때도 밀물 때를 잘 알고 있어야 포구 안으로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을 어부들이 포구 이름을 '철무지개'라고 한 것은, 썰물과 밀물(철)에 대해 철저히 숙지하지 않고 '무지'하면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포구(개)라 하여 '철무지-개'라고 했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2) 신엄리 바닷가에 있는 높고 깎아지른 절벽 이름.     

3) 베릿내라는 말은 벼랑을 뜻하는 제주어 '벨'과 처소를 뜻하는 '잇', 그리고 천(川)을 뜻하는 '내'가 합성된 말로 ‘벼랑이 있는 내’로 해석된다. 이를 또 별을 뜻하는 제주어인 '벨'과 연결시키면 바로 '별이 내리는 내'로도 불린다. 그래서 베릿내 폭포를 볼 수 있는 전망대에는 '별내린천'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성천(星川)폭포'로도 불린다.     

4) ‘모진개’라는 지명은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모진 바닷가’ 정도로만 추측하고 있다.

모진개, 몰털어진 기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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