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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Apr 08. 2024

뮤텔주교 앞 구마실신부의 보고서①

[신축항쟁 뒷이야기-12] 濟州島辛丑年敎難史 (부록) 발췌

김옥희 저 <濟州島辛丑年敎難史> 부록(번역)에서 발췌 (본 발췌문의 번역 과정에서 전후 의미 전달이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번역 원문의 수정 없이 그대로 옮겼음)

존경하는 주교님!     


모든 분야의 아무리 바쁜 업무일지라도 내가 오늘날 이 과제를 이행하고 내가 증거하고 체험하였던 이 사건들의 관계에 대하여 주교님에게 서술하여 보내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지난 5월 9일에 뭇세신부(文濟萬)와 목포를 떠나면서 우리들은 훌륭한 계획만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웃고 즐거웠으며 마찬가지로 온갖 필연적인 곤란들을 우리들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들은 현익호(顯益號)¹ 안에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우리들은 제주시를 대면하여 도착하였는데 상륙하기에 가능하였던 때가 11시였습니다.     


이 섬은 폭동이 일어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배들은 위험한 환경의 습관에 처함에 따라서 해안 멀리로 옮아가 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배를 바다에서 닿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첫인사 후에 우리들은 굉장한 소식에 접하였고, 제주시는 봉세관(封稅官)의 새로운 것들²을 반대하는 폭동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폭도들은 같은 기회를 통하여 크리스챤들의 범죄에 대하여서도 그들 자신 스스로 재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들을 날마다 불행의 눈물로 젖게 한 가장 큰 비극의 소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폭도들은 대정(大靜)의 관리를 통하여 설립된 상무회사(商務會社)³라고 부르는 회사의 연장자들의 연줄이며, 즉 그는 채구석이라고 불리워지는 같은 관리의 연줄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나는 이 섬 안에 들어갔습니다. 지난 5월 9일 모든 그리스챤들은 나의 숙소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폭도들은 대정(大靜)에서 출발하여 두 무리로 나뉘어져 한 무리는 제주 성내(城內)에서 남서(南西) 쪽으로 오고 한 무리는 성내(城內)에서 남동(南東) 쪽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의 사이는 이 섬의 중심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산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챤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스챤들은 한 열흘 이후부터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촌락에 감히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현익호(顯益號) 배로 피신하기를 원했으나 신자들은 여비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우선 봉세관(封稅官)은 이 기선으로 피신하는 것만을 서두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떠남으로 해서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기를 원했습니다. 

     

목사(牧使) 대리자인 김창수(金昌洙)⁴는 이날에 폭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갔습니다. 가다가 그는 봉세관의 도망이 폭도들에게 발생하였던 결과를 보기 위하여 기다렸습니다. 폭도들은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평화로운 사람들을 충동하고 그들을 합세시키기 위한 무서운 노력을 나타냈기 때문에 이 섬이 조용해지는 거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교(主敎)님에게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 상세한 서술을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그리스챤들을 그들의 집에 돌려보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내(城內)에서 감히 멀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노자(路資)를 가지지 못하였고 성내인(城內人)들은 그들의 불행을 비웃었으며 모든 환대의 과제에 있어서 그들을 반대하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챤들은 길 위에서 눈물로 시간을 보내며 통탄하고 있었습니다. 멀리 피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돈도 양식도 없이 성내(城內)에 남아있을 수도 없었으며 우선 폭도들이 날마다 점점 더 가까워졌기 때문에 성내(城內)에 남아있기도 더욱 불가능했습니다.     


음력 3월 23일⁵ <황사평>이라고 하는 평원에 모여있는 폭도들이 해산해주기를 청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목사(牧使)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였고, 그리스챤들을 반대하는 불평을 공식화하였습니다. (한국신문은 그것을 공포했음.) ⁵⁻¹     


폭도들은 그들이 제시하는 그리스챤의 범죄자들을 그들의 뜻에 따라서 벌주고 그들이 참석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처벌하였을 때만이 해산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챤들은 나에게 성내(城內)를 무장시킬 수 있는 허락을 얻어서 행동을 개시하기를 청했습니다. 우리들은 음력 3월 24일에 있었습니다. 제주 성내는 온통 순찰대이고 거기에는 초긴장 상태에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위험한 짓을 할 권리를 가졌다면 그들은 나에게 그리스챤 범죄자들을 청하러 올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호조(護照)⁶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 사람들의 권위자들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또한 그들의 궐석으로 인하여 나 자신이 내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편 나는 이런 계획의 실행에서 생기는 결국 나쁜 결과를 보여 주면서, 나는 그리스챤들이 각자가 그들의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에 대한 새로운 의논을 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그들의 마을로 흩어져 돌아가느니 차라리 제주 성내에서 함께 죽기를 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피난하기도 불가능했고, 남아있기도 더욱 불가능했습니다. 해안에서는 다른 폭도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다음 날 해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음력 3월 24일과 25일 밤사이에 교우들 중에서 제일 유식한 사람들이 밤중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들이 폭도들의 두목을 잡기 위해 폭도들 앞에 직접 가기로 해결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폭도들의 날뜀은 아직도 완전히 잘 조직되어지지 않았고 그 시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이 우선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방법은 지난번의 수차례 폭동과 모든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의 두목들만 잡히면 그 폭동은 저절로 가라앉아 버렸던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본 뒤에 나는 그들에게 문제만 신부와 함께 동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우리들은 폭도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하여 그들에게 안내되면서 제주 성내(城內)를 떠났습니다.  

    

길 도중에서 우리들은 폭도들에게 해산을 청하러 가는 목사(牧使)를 만났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폭도들 앞에서 목사와 함께 해결해야 할 것과 폭도들이 우리들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모든 방책을 적은 메모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바닷가에 위치한 세관이 서 있는 여울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목사는 좀 더 멀리 갔습니다. 밤중에 폭도들은 우리들을 만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 왔습니다.     


음력 3월 26일⁷ 우리들은 밤중에 걸었고, 조반을 일찍 마친 뒤에 폭도들의 두목인 오을굴(吳乙屈)⁸을 찾을 수 있는 마을로 급히 서둘렀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는 그의 침대 속에서 잡히게 되었고 몇 대의 구타도 당했으나, 곧 나는 그가 오히려 그를 따르는 폭도들보다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뒤에 남아있는 목사를 기다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들은 그 장소의 반이나 우리들을 유도하였던 넓은 지대로부터 폭도들을 쫓아내어 모두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목사가 도착하였고, 나는 목사에게 체포자들을 감옥에 넣게 했습니다.⁹ 목사는 이들을 그의 거리에 자유롭게 놓아두기를 원하였고 목사관의 이웃의 백성들만이 그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목사는 우리들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아무도 죽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정부가 우리들의 공헌에 대하여 시상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우리들이 대정(大靜)에서 제주성내(濟州城內)로 다 함께 오는 것만이 해결책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발의 순간에 이곳 군수(郡守)는 우리들을 따르지 않겠다고 결정하였고, 그는 5인의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두목을 데리고 성내(城內)로 직접 다시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폭도들의 집합소인 대정(大靜)의 한 촌락을 향해서 우리들의 길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목사를 그곳에서 찾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몇 시간 전에 도착하였다가 떠났습니다. 그리스챤들은 성내로 뚫고 들어갔으며 나쁜 주민들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녁 안에 총으로 세 곳을 공격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호응했으며, 그들의 하나가 넘어졌으며, 대단히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밤이 되자, 우리들은 수많은 군중들이 밭들을 가로질러 가까워졌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피곤하였고 무기도 충분히 가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대정(大靜)으로 가면서 그곳에서 대정군수(大靜郡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결국 모든 악의 결말을 초래하였습니다. 결국 대정군수를 찾아가 타협한다는 식의 방법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챤들에게 제주성내로 도로 들어가서 발견되는 막대기나 창을 잡기를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공격이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 공격은 격퇴당했던 것입니다.     


이튿날 음력 3월 27일¹⁰에 우리들은 이 섬의 성안에 들어갔습니다. 제주목사는 체포해 온 폭도들과 함께 제주성내로 들어갔으며 많은 관심과 정리를 시도했습니다.     


만일 그리스챤들이 피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서남(西南)쪽에서 도착하는 다른 편의 폭도들과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충분한 수면과 졸림과 부족한 나쁜 음식으로 인한 피곤은 우리들 그리스챤들에게서 모든 힘을 앗아갔습니다. 한편 폭도들은 점점 더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더욱이 일본인들 즉 이 섬의 패낭도¹¹들은 폭도들에게 무기와 군수품, 탄약, 식량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음력 3월 28일에 제주목사는 폭도들이 성문들을 점령할 때에 이 제주성내(濟州城內)를 떠났습니다. 그는 매우 악한 처지에 놓여있는 백성들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신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출발의 방해 때문에 그의 종들이 마련한 배 위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같은 날 목사는 나에게 내가 원한다면, 이 성내(城內)를 방어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목사가 떠나가 버렸을 때 나는 성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자리를 배치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대포와 무기를 꺼내어 손질했고, 아마도 화약고까지 열었을 것입니다.    

 

음력 4월 1일¹²에 60명의 사람들이 우리의 힘에 합세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을 나의 집에서 돌보았고 식량도 나눠 먹였으나, 그 누구도 갚을만한 무엇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챤들을 통하여 형제적 위로를 나의 집에서 대접받았던 것입니다.     


목사는 음력 4월 2일 다음 날에 성내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가 들어오면서 그는 성내의 백성을 불러 말하기를 “폭도들이 이 성내에 들어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에는 모든 그리스챤들은 학살될 것이고 너희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적어도 너희들은 스스로 그리스챤들과 함께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내 각처에서 불리하였던 우리 그리스챤들의 공과 용기를 부과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일이 그런 식으로 되어서 못사는 폭도들이 성내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와 함께 지냈고, 우리는 모든 이를 도왔으며, 우리들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들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일이 아닌 것들이 우리들에게 섞여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분열은 복합적이 되었습니다.    

 

우선 그 주인을 잘 알고 있는 목사의 한 추종자는 성내의 민간인들에게 폭도들에 의하여 쓰여진 폭도에의 한 당이 되게 하는 편지를 가져오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말하자면 음 4월 3일에는 날마다 증가하게 되어있는 성내의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정신이 상승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전날부터 서울에다 현재의 실정에 대한 전보를 보내려고 시도했지만,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실패했습니다. 나는 그래서 모든 이를 구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유배자¹³에게 간청했습니다. 그 유배자는 대담하고 능란하고 무보수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음력 4월 3일에 배를 타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계속>     


<옮긴이 註>

¹현익호(顯益號)-1900년 이완용의 형인 이운용에 의해 인천에 설립한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가 대한제국 궁내부로부터 15만 원에 이 배를 사들여 국내 연안항로인 인천, 군산, 목포, 제주, 부산, 북관 간을 운행했다.

²봉세관(封稅官)의 새로운 것들-궁내부에서 내려온 봉세관 강봉헌은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물렸는데, 이미 오래전 폐지되었던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가옥, 수목, 가축, 어장, 어망, 소금, 노위(蘆葦·갈대) 등의 세금은 물론 심지어 잡초에까지 세금을 매겨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세금을 거두는데 동원한 인력이 천주교인들이었다.

³상무사(商務社)-부패한 관리와 불량한 천주교도들의 불법 행위에 대항할 집단으로써 제주 대정군(大靜郡) 내 유지들이 모여 조직한 단체다. 상무사의 대표로는 당시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이고, 위원으로는 이성교, 송희수, 오대현, 강우백, 강백, 강철호 등이 맡았다. 설립 취지에 찬동한 대정군내 향색 선비와 백성이 상무사에 대거 참여하면서, 이들은 봉세관의 토색과 남징(濫徵) 행위에 대해 폭로하고 규탄했으며, 교인들의 비행과 폭력에 대해서도 완력으로 맞서게 되었다. 이는 양측의 잦은 마찰과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⁴김창수(金昌洙)-제주민에게 사사로이 세금을 남발하여 재산을 챙겨 파직된 탐관 목사인 이상규(李庠珪)를 대리한 정의현 군수(㫌義縣 郡守).

⁵음력 3월 23일-양력 1901년 5월 11일(토요일)

⁵⁻¹<6월 3일 자, 매일신문> 기사 ‘수년 이래 수세관(收稅官)은 잡세룰 주구(誅求)하고 천주교도들과 같이 인민들에게 추궁, 구타, 포박, 강수하며 교도들에게 부질없는 사촉(私囑)을 하여 그 폐해가 극심했다. 그래서 5월 16일 인민들은 성남(城南) 1리에서 집회를 열고 그 대책을 협의하고 있을 때 불국(佛國) 선교사 2명, 교도 300명을 거느려 창과 엽총을 가지고 내도, 발포하여 1명을 부상시키고 민회(民會)의 거괴(巨魁) 오대현(오대현(吳大鉉) 외 5명을 잡아 갔으며 이어 제주성에 난입, 군기, 탄약을 빼앗고 발포하여 인민 1명을 죽이고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인민들은 이 폭살(爆殺)을 보고 격분하여 산포수(山砲手)를 불러 모아 교도 8명을 죽이고 성내(城內)로 들어가 구류 당하고 있던 6명을 구원했다. 교도들은 인민들의 세력이 큼을 보고 산산이 흩어져 불국(佛國) 선교사는 정의군(旌義郡) 군수(郡守) 집에 숨어 무사히 난을 면했다. 인민들은 각 촌에 포고하여 교도들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으며 매일 50여 명이나 살상하고 5월 18일에 이르러 각 촌에 산재했던 교도 250명을 붙잡아 죽였다. 유배죄인인 교도 장윤선은 배를 타 섬을 나가 불국공사(佛國公使)에게 타전하니 얼마 후 불국(佛國) 군함 내도(來島) 상륙, 회민(會民 )을 모조리 소탕하겠다고 위협 공갈하였으니 정부 관리가 그 불가(不可)를 설명하여 되돌려 보냈다. 지금 진위대(鎭衛隊) 2중대가 주둔하고 있다. 천주교도가 불국(佛國) 군병의 힘을 빌어 난폭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으니 조속히 불국공사(佛國公使)에게 조회하여 군병 사용을 중지시켜야 할 것이다.’

⁶호조(護照-1886년 6월 한불통상우호조약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들에게 호조(護照)가 발급되고, 고종은 더불어 <그들을 나처럼 대하라>는 ‘여아대(如我待)’의 신표를 내렸다.

⁷음력 3월 26일-양력 5월 14일

⁸오을굴(吳乙屈)-오을길(吳乙吉)의 오기이며, 서진(西陣)을 지휘했던 서귀포 예래동(猊來洞) 출신의 대정현 좌수 오대현(吳大鉉)을 말함. 

⁹선교사일 뿐인 천주교 신부들이 무슨 권리로 제주 목사에게 명령하여 제주도민을 함부로 감옥에 넣으라고 말 할 수 있는지 모르겠음.

¹⁰음력 3월 27일-양력 5월 15일

¹¹패낭도(佩囊刀)-허리에 차는 칼인 패도(佩刀)와 주머니 속에 넣는 낭도(囊刀)를 찬 왜구를 말하나, 여기에서는 제주에 진출했던 일본인 수산업자들을 낮추어 말함.

¹²음력 4월 1일-양력 5월 18일

¹³유배자-천주교도 였던 장윤선을 말함.

구마실(具瑪瑟)신부는 1871년 5월 8일 프랑스의 바욘느(Bayonne) 교구의 보르드(Bordes)에서 태어나 1890년 9월 16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본명은 마르셀 라쿠르(P. Marcal Lacrouts)이고, 구마실(具瑪瑟)은 그의 한국 이름이다.     


사제로 서품을 받고 1894년 8월 29일 한국 선교를 위해 출발, 한국에 도착하자 조선교구장 뮤텔(Mutel, Gustave Charles Marie·閔德孝)주교는 구마실 신부를 전라도로 파견했다.     


구마실 신부는 전라도 일대에서 5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한 후, 1900년 6월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의 후임으로 한국인 김원영 신부와 함께 제주도에 파견됐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15만 명쯤이고 구 신부는 제주 성내와 산남 서홍리에 천주교 선교 본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1년 4월 신축민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구신부는 서울에 피정(避靜)을 가고 없었다. 피정을 마치고 뭇세(Mousset·文濟萬) 신부와 함께 이 섬에 들어왔을 때는 온 섬이 난리로 뒤집히고 제주성(濟州城)은 거의 포위된 상태였다.

김옥희 수녀가 쓴 <제주도 신축년 교난사>, 천주교 입장에서 바라본 신축년 민중항쟁 기록

具마실 신부가 서울에 있는 조선교구장인 뮤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의 불어 원문.

제주도 최초의 사제관-1898년 배神父(Pr. Pynet)가 매입한 건물인데 현 제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성당 자리에 있었다. 사진 속 왼쪽 두 인물은 구마실 신부와 엄다제 신부다. 자신들이 만들어 준 나무공으로 공놀이를 하는 아동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1914년 6월, 具마실 신부의 송별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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