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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Apr 01. 2024

『매일신문』기사

[신축항쟁 뒷이야기-11]  

1901년 6월 3일 자 
 『매일신문 每日新聞¹』기사 
제주기독교회사(濟州基督敎會史) 발췌

수년 이래 수세관(收稅官)은 잡세를 주구(誅求)²하고 천주교도들과 같이 인민들에게 추궁, 구타, 포박, 강수하며 교도들에게 부질없는 사촉(私囑)³을 하여 그 폐해가 극심했다. 그래서 5월 16일 인민들은 성남(城南) 1리에서 집회를 열고 그 대책을 협의하고 있을 때 불국(佛國) 선교사 2명, 교도 300명을 거느려 창과 엽총을 가지고 내도, 발포하여 1명을 부상시키고 민회(民會)의 거괴(巨魁) 오대현(吳大鉉) 외 5명을 잡아갔으며 이어 제주성에 난입, 군기, 탄약을 빼앗고 발포하여 인민 1명을 죽이고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인민들은 이 폭살(爆殺)을 보고 격분하여 산포수(山砲手)를 불러 모아 교도 8명을 죽이고 성내(城內)로 들어가 구류 당하고 있던 6명을 구원했다. 


교도들은 인민들의 세력이 큼을 보고 산산이 흩어져 불국(佛國) 선교사는 정의군(旌義郡) 군수(郡守) 집에 숨어 무사히 난을 면했다. 인민들은 각 촌에 포고하여 교도들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으며 매일 50여 명이나 살상하고 5월 18일에 이르러 각 촌에 산재했던 교도 250명을 붙잡아 죽였다. 유배죄인인 교도 장윤선은 배를 타 섬을 나가 불국공사(佛國公使)에게 타전하니 얼마 후 불국(佛國) 군함 내도(來島) 상륙, 회민(會民)을 모조리 소탕하겠다고 위협 공갈하였으니 정부 관리가 그 불가(不可)를 설명하여 되돌려 보냈다. 


지금 진위대(鎭衛隊) 2중대가 주둔하고 있다. 천주교도가 불국(佛國) 군병의 힘을 빌어 난폭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으니 조속히 불국공사(佛國公使)에게 조회하여 군병 사용을 중지시켜야 할 것이다. 


<옮긴 이 註>

¹매일신문(每日新聞)-1898년 4월 9일(광무 2년)에 창간된 순 한글 신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일간신문이자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협성회회보가 폐간된 후 양홍, 유영석, 이승만 등에 의해 민족의 대변 기관지로 등장하였다. 3면과 4면에는 외국 소식과 개화 문명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대한제국의 민간신문 발달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²주구(誅求)-관청에서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

³사촉(私囑)-개인의 사사로운 일을 부탁하다.          


<매일신문 아닌, 매일신보 이야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특파원으로 머무르던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 양기탁을 비롯해 민족진영 인사들에게 도움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한 신문으로서 이후 서울신문의 전신인 일제강점기 시대에 매일신보로 바뀌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사장이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었기에 통감부에게 검열받지 않고 항일 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어 일반 민중의 지지도가 높았고 발행 부수도 가장 많았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주요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신채호·박은식 등이 있었다. 양기탁이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주요 논설의 대부분 역시 그에 의해 집필되었다. 신채호와 박은식을 비롯해 애국지사들의 논설도 많이 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을 주도했고 1907년 4월에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했다. 항일 논설을 이용해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며 항일 논조를 견지했으며,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양하여 신교육 및 애국계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자임했고 통감부의 방해에도 1910년 한일병합 이전까지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등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정면으로 저항하자 일제는 창간주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다. 실질적 책임자인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8년 5월 27일부터는 발행인 명의가 영국인 앨프리드 W. 마넘(萬咸(만함), Alfred W. Marnham)으로 바뀌었다.   

  

1909년 5월 1일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 서거하고서 1910년 5월 21일에는 통감부에 매수된 뒤부터 통감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변경되었고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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