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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Mar 18. 2024

장두 이재수의 제주성 입성

신축항쟁 뒷이야기9-미완의 졸고 ‘김초시 이야기’ 中-

중산간(中山間)의 겨울은 눈 오는 날이 많았다. 석례는 김초시와 헤어지고 잠시 그리움에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밤이면 꾸어대던 악몽은 사라진 듯했다. 지난번 꿩사냥에서 잡은 꿩고기로 꿩엿을 만들었다. 김초시가 오면 꿩엿을 먹이고, 엄쟁이로 돌아가는 길에는 선물로 싸서 들려주고 싶었다. 오을돌은 그런 석례를 지켜보면서 안심이 되다가도 걱정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서 밤눈이라도 내릴라치면 석례의 가슴에는 쓸쓸함이 더 몰려오고, 잠시 멈추었던 흉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하였다. 창의군에 제주성이 함락되던 날 참혹했던 살육의 현장은 석례에게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무섭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시가(媤家)인 일도리(一徒里) 일내마을 칠성골에서는 맞은편 관덕정 마당이 훤히 보였다. 신축민란이 터지고 친정아버지 오대현 좌수는 명월진에서 민란의 장두라며 천주교도들에게 잡혀 와 교당에 갇혔다. 석례는 무섭기도 하고 시가에 눈치가 보여 몇 걸음 거리 교당에 갇혀있는 아버지였지만 뵈러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제주성이 민군에 포위되고 성안 부녀자들이 시위가 일어나자 석례도 그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성안 여자들은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든 채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 메고 목관아 앞에서 성문을 열라며 시위를 벌였다. 사람들은 이 거칠고 용감한 여자들을 창의군의 서진과 동진에 빗대어 ‘여진(女陣)’으로 불렀다. 앞에 나선 여인들을 가리키며 저 이는 퇴기(退妓)인 만성춘(滿城春)과 만성월(滿城月)이며, 저기 키 크고 흰옷 입은 여인은 동문 밖 무녀이며, 저 몸집 좋은 이는 서문 밖 돼지 잡는 서푼이 아니냐며 그 수군대는 소리가 석례의 귀에 들렸다.     


아버지 오대현이 성당에 갇혀있는 동안, 창의군(倡義軍)이 동서(東西)로 밀려와 제주성을 포위하고 천주교도들과 날마다 격렬한 사격전을 벌였다. 총싸움에서는 민군(民軍) 측에 명포수들이 많아 성을 지키는 천주교도 열 명이나 쏘아 죽였고, 싸움을 독전하는 구(具)마실 신부의 모자만 쏘아 떨어뜨리는 신기(神技)가 있더란 말이 퍼졌다. 그러나 양쪽은 서로 공방전으로만 시종할 뿐 세력이 백중하여 피차 항복하기만 기다리는 형세였다. 이런 가운데 제주군수 김창수(金昌洙)는 중재의 한 방책으로 성당에 감금된 오대현을 석방하자고 구(具)마실 신부에 제안하여 싸움을 멈추는 조건으로 오대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서문(西門) 밖 ‘한질왓’에 진을 친 장두 이재수는 이런 제의를 거절하고 도리어 성 밖으로 나온 오대현을 동진(東陣)으로 보내어 강우백과 함께 성 동쪽 요지인 ‘가은이마루(加恩旨)’ 고개를 점거하고 동문(東門)을 돌파토록 하였다.   

   

양군 간 매일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성을 둘러싼 총포격이 그친 날이 없었다. 성 밖 창의군 포수들이 쏜 총탄이 가끔 성내 민가에까지 날아들어 성안 사람들은 전전긍긍하였다. 더구나 민군의 철저한 포위전략으로 먹을 것과 지들캐까지 다 떨어지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므로 식량과 땔감 걱정을 하는 성안의 부녀자들이 모여 상의한 후 성문을 열도록 관아(官衙)에 호소하였다. 석례도 신분을 몰래 숨기고 시위하는 부녀자들 틈에 끼어 열심히 돌아다녔다. 머리에 흰 수건을 메고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든 수천 명의 부녀자가 관문으로 몰려오자 관아에서는 구(具)마실 신부를 불러 성안의 성난 민심을 전하였다. 이에 대해 具마실 신부는 3일간만 더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이유는 유배인 교도였던 장윤선을 육지로 몰래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목포주재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주에 천주교 박해의 민요(民擾)가 일어나 교도들이 성 가운데 포위되어 있는데 그중 여섯 명이 살해되었으며 중상을 입은 자도 많고 식량과 땔거리도 떨어졌으니 서울 프랑스 공사관에 급보하여 인천에 정박 중인 프랑스 군함의 출동을 청해 달라’ 이때가 1901년 5월 23일 즈음이었다. 그러므로 구(具)마실 신부는 3일 이내에 반드시 프랑스 군함이 자신들을 구하러 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장윤선(張允先)과 최순형은 제주 유배죄인인 천주교도였는데 교우라는 이유만으로 마음대로 옥문을 열어 석방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최순형은 봉세관의 압잡이 노릇을 하며 섬사람들의 원성을 사 창의군이 노리던 처벌 대상 1호였다.     


성안 부녀자들은 구(具)신부의 약속을 믿고 일단 해산하였으나 그 후 성안 부녀들을 격분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성을 지키던 교인들이 제주목관아의 화약고에서 탈취해낸 화약을 햇볕에 말리다가 담뱃불이 잘못 화약에 인화되는 바람에 폭발하여 교도군(敎徒軍)에 많은 중상자가 생겼다. 그런데 교도들이 말하기를 ’성내 부녀자들이 교도들을 반대하여 일부러 화약에 방화하여 폭발케 한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허언(虛言)을 유포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내 부녀자들은 불량교도들의 횡포에 분개하고 있었는데, 이제 또 허무맹랑한 말을 조작하여 소문을 내는 바람에 부녀자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具마실 신부가 성문을 열기로 약속된 날짜에 이르렀다. 성안 부녀 중의 주동 인물인 고오적(高五籍)의 처(妻) 강 씨와 강장군(姜將軍)으로 별명을 부르던 남자의 처 이 씨가 수백 명의 부녀를 인솔하여 목관아의 마당에 들어가서 약속대로 성문을 열기를 독촉하였다. 이 부녀들을 뒤에서 돕던 김남혁 등의 남자들도 함께였다. 프랑스 군함을 기다리는 具마실 신부는 다시 3일을 더 연기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부녀들은 성내의 식량과 땔감이 다 떨어졌을 뿐 아니라 교도들의 거짓말 소행에 격노하고 있었으므로 단연히 이를 거절하였다. 부녀들은 ‘하감상(河監床) 부인’이 선봉이 되어 서문누각(西門樓閣)으로 올라갔다. 성난 부녀들은 교도군(敎徒軍)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빼앗아 성 밖 민군에게 던져주었다. 구경꾼으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김남혁의 지휘 아래 성문을 열어 제겼다. 구(具)마실의 측근자인 박형순을 비롯하여 성을 지키던 천주교도들은 모두 결박당해 관덕정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또 한편 부녀자들은 성문과 포대에 걸린 대포와 총기는 물론 그 밖의 군기(軍器)들을 거두고 성(城) 위에 올라 동서로 기를 휘두르면서 민군의 입성을 독촉하였다. 예상치 못한 부녀자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교도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한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성난 부녀자들을 비롯한 성안의 봉기군에게 잡힌 채 결박을 당하였다.     


서문(西門) 밖에서 성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던 장두 이재수는 선봉으로 민군 몇 명을 성안으로 돌입시켜 정세를 파악하게 하고, 명월진에서 천주교도들에게 납치된 다섯 명의 대정민(大靜民)을 우선 구출토록 하였다. 오대현이 석방된 후에도 그들은 성당 내에 감금되어 있었다. 얼마 후에 정세를 파악한 장두 이재수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무혈입성하였다. 가죽 안장을 얹은 말 위에 올라탄 청년 장두 이재수는 전립에 공작 깃을 꽂고 한 손에는 채찍을 들었으며, 멋을 내느라 두 눈에는 뿔테 안경을 걸치고 왼손에는 서양 우산을 들었다. 이는 모두 성안에서 얻어 온 진기한 것들이었다. 이를 보는 성안 사람들은 이재수는 인물이 영웅답고 큰일을 결단할 만한 능력이 있으며 한라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영웅이라 환호하며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는 고개를 돌리고 그 모양이 우습다며 몰래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관덕정 마루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앉아 교당이 있는 삼도리(三徒里) ‘한짓골’ 유지들을 불러모아 일장 훈시를 하였다. “처음에 너희 성안놈(城內人)들이 교당(敎堂)과 더불어 하나가 되었으므로, 입성일(入城日)에 장차 한가지로 불에 태워 버리려고 했으나, 이제 오늘 일을 보니 곧 우리 무리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로 하여금 아무 노력을 들이지 않고 입성케 하였음을 알았으니 깊이 감사하고 경하한다.“ 군수 채구석의 신임을 받던 대정현의 관노(官奴)답게 문장이 있어 보였다. 벌벌 떨던 한짓골 유지들은 이재수의 사면(赦免)을 받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이재수는 동군으로 사람을 보내어 오대현 형제와 강우백에게 동문(東門) 입성(入城)을 청하였다. 이로써 제주성(濟州城)은 완전히 민군에 장악되었다. 석례는 칠성골 동쪽 산짓골을 몰래 빠져나가 내팍골과 구명골을 지난 후 소로기 동산에서 아버지 오대현을 울면서 상면하였다. 이날이 바로 음력 4월 11일, 양력으로는 1901년 5월 28일이었다. 향장(鄕長)이라 불리던 오대현 좌수는 이곳은 여자가 머물 곳이 못되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며 석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 어두운 얼굴로 당부하였다. “앞으로 어디 가서도 아버지 이름 석자를 꺼내지 말거라. 네 신상에 이롭지 않다.” 석례는 이 당부가 그녀에게 남기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신축민란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관덕정 마당의 목잘린 천주교도 시체들

분노와 원한으로 살기에 가득 찬 장두 이재수는 민군 장병들에게 관덕정 광장에 결박되어 있는 교도들을 모두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자리에서 17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의 목이 차례로 잘려나갔다. 이 중에는 이재수가 가장 미워하며 혈안이 되어 찾던 최형순(崔亨淳)도 끼어 있었다. 그는 목사관의 대청마루에 몰래 들어와 지내다 보리밭에 숨은 것을 찾아내 잡아 왔다. 장두 이재수는 칼을 쥐고 앞으로 나와 “최형순(崔亨淳)은 죄를 물을 것도 없다”고 외치며 배를 갈라 창자를 들어냈다. 관덕정 앞마당은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전광석화 같은 이재수의 처형에 놀라고 무서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석례의 눈에 비친 이날의 광경은 지옥도였다.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이 잘린 시신이 꿈속에 나타나곤 하였다.


장두 오대현이 이끄는 동진(東陣)은 혼란의 극에 달한 서진(西陣)과는 다르게 차분하였다. 서진(西陣)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최형순(崔亨淳)의 시신 반쪽을 불에 태워서 돛대 꼭대기에 높이 매달고 포수들이 총 쏘는 과녁 노릇을 하게 하였다. 서진(西陣)이 포진한 관덕정 마당은 소란 속에 밤낮으로 천주교도들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오대현은 교인을 잡아 오면 여러 번 상세히 심문하며 뚜렷한 죄목이 없으면 방면을 반복하였다. 청년 장두 이재수는 이후에도 “양인(洋人)을 토멸하고 성(城)을 회복하라”며 병사를 보내 관사(官舍)를 향해 총을 쏘며 위협을 하였다. 크게 놀란 대정군수(大靜郡守) 채구석이 오대현을 불러 자제할 것을 당부하며 말했다. “관아에는 지켜야 할 율문(律文)이 있는데 어찌하여 무법함이 이와 같은가?” 동진 장두 오대현은 총질을 해대는 포수들을 붙잡아 곤장을 때리면서 물으니 모두 서진 소속이었다. 진영으로 돌아간 포수들이 이재수에게 고했다. “동진 장수가 서진 장수를 죽이려 한다.”며 맞은 분풀이로 없는 고자질을 하였다. 이를 들은 이재수는 동진을 급습하여 오대현을 잡아들였으나 동진 포수들이 일제히 총을 쏘며 반격하자 이재수는 오대현을 도로 놓아주었다. 이에 더 큰 소란을 염려한 목사와 군수 채구식이 중간에 들어 오해를 풀어주고 화해를 시켰다. 그러나 이재수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동진 장두 오대현은 스물넷 나이 젊은 장두 이재수의 과격한 살륙행위에는 반대하였다. 유림 출신인 오대현은 관노 출신 이재수와 방성칠의 난에도 가담했던 화전민 출신 강우백과는 다른 온건한 결말을 원했다. 대정골 좌수(座首)이기도 했던 오대현은 이들과 달리 천주교도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행위에 반대하며 유연한 뒤처리를 주장한 것이다. 또한, 방성칠 난의 진압세력이었던 토착 양반과 유배 중인 양반들에 대한 처벌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험악한 민란의 폭풍 속에서 그런 주장은 여름밤 모기 우는 소리와 같았다.   

   

민란이 진정된 후 6월 9일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이 강화도진위대와 함께 제주에 도착하자 세 장두는 선량한 양민들에게는 해가 가게 할 수 없다며 신축민란의 책임을 지고 자진해 함께 옥에 갇혔다. 그들은 악질 봉세관 강봉헌과 함께 7월 13일 윤선(輪船)을 타고 인천을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어 7월 27일부터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0월 9일 최종 판결이 내려져 다음 날인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석례는 아버지의 처형 소식을 한참 늦은 다음에야 오을돌에게서 들었다. 이후 아버지를 부를 때는 어릴 적 이름인 오을길이라 따로 불렀다. <계속>

제주목관아 소속 관기의 모습
영화 <이재수난>의 스틸 컷
1950-60년대의 가은지마루 고갯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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