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양훈 Jul 26. 2024

나탈리아 곤차로바

푸시킨에게 그녀는 행운이었나 불운이었나?

칼 브률로프가 그린 나탈리아 곤차로바
그리고 <때가 왔네 때가 나의 벗이여!>

푸시킨은 1828년 12월 무도회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소녀는 열여섯 살, 시인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낭랑 18세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황제의 연인’으로 소문이 났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1829년 봄, 그는 소녀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푸시킨은 나탈리아의 어머니에게 결혼 허락을 얻지 못한다. 슬픔에 빠진 푸시킨은 코카서스로 떠났다.     


다음 해 1830년 겨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우리의 푸시킨은, 곤차로바를 잊지 못해 다시 청혼하고 이번에는 허락을 받는다. 만인의 꽃, 미인을 사랑해 아내로 독차지한 죄는 대가를 치른다 하지 않던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초상으로는, 푸시킨과 나이가 같았던 러시아 화가 칼 브률로프(Karl Brullov 1799년~1852년)의 그림이 유명하다.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푸시키나-란스카야(Nataliya Nikolaevna Pushkina-Lanskaya·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Пушкина-Ланская, 1812년 9월 8일~1863년 11월 26일)의 결혼 전 이름은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이다.     


미모의 귀족 여성이었던 그녀는 1831년 18세의 나이에 푸시킨과 결혼하였다. 곤차로바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푸시킨의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4명의 자녀(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딸 마리아, 나탈리야)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은 문란하였고, 한때 그녀의 미모에 눈독을 들였던 차르 니콜라이 1세와 불륜관계를 맺기도 했다. 1837년에는 궁정의 귀족들 사이에 그녀의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소문이 돌았고 프랑스 귀족 조르주 당테스와 내연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곤차로바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교계의 스캔들이었을 뿐 뚜렷한 증거는 없었다. 이에 분노한 푸시킨은 아내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당테스와 결투를 벌였다가 총상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곤차로바에 얽힌 사교계의 궁정 스캔들과 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푸시킨은 모욕적인 시종보 직위를 퇴직하고 미하일롭쓰끼 촌(村)으로 떠날 것을 갈망했다. 이때 아내 곤차로바에게 쓴 시가 <때가 왔네 때가 나의 벗이여>이다. 백석이 번역한 이 詩를 아래 소개한다. 번민과 고뇌에 찬 푸시킨의 고달픈 삶이 느껴진다.    


때가 왔네 때가 나의 벗이여!

이 마음 안식을 바라노니

하루하루는 살같이 흘러가고

생명은 시각마다 조각조각 떨어져 가누나.


나는 그대와 함께 단둘이 살려 했더라

그러나 보라, 눈앞에는 벌써 죽음이 닥쳐오누나.

지상엔 행복은 없어도 쉬임과 자유는 있는 것,

나는 오래전부터 히떠운¹ 운명을 꿈꾸어 왔노니


고달픈 종, 나는 일찍부터 생각했었네,

노동과 고요한 즐거움을 맛볼

먼 안식처로 도망가리라고. (1834년, 35세)     


푸시킨의 사후 나탈리야가 니콜라이 1세의 애첩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녀는 1844년 군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란스코이(Petr Petrovich Lanskoy)와 재혼했다. 란스코이와의 사이에서는 두 딸이 태어났다.   


[註] 히떠운¹(히떱다)-실속은 없어도 마음이 넓고 씀씀이가 후하고 크다(generous; broad mind).

매거진의 이전글 도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