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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지평선

한강의 장편소설『바람이 분다, 가라』 中

by 김양훈 Mar 27. 2025

거실 구석구석을 방향 없이 서성거리다가 나는 입술을 물고 책상 앞에 앉는다. 책장에 꽂았던 책을 다시 펼친다. 오래전 밑줄을 그어 놓은 부분들을 찾아, 삼킬 듯 빠르게 읽어내려간다.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우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천체들의 나이로 미루어 약 150억 년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에는 수십만 개의 별들이 공처럼 뭉친 구상성단들이 있는데, 이들의 나이는 모두 100억 년이 넘는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에는 수십만 개의 별들이 공처럼 뭉친 구상성단들이 있는데, 이들이 나이는 모두 100억 년이 넘는다. 그러나 150억 년보다 더 늙은 천체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우주 공간이 무한하다 해도,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도 유한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나온 빛을 느껴 안다는 것이다. 이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빛이 150억 년간 달려온 거리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별을 볼 수 없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는 약 390억 광년으로 한정된다. 이것이 우주의 지평선이다. 그 너머의 별들이 낸 빛은 미래에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천체물리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이 같은 것을 말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은 오랜 과거의 별이며,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일 수도 있다. 더 멀리 볼수록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주의 지평선은 그렇게 우리가 멀리 볼 수 있는 한계,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한계다. 그것이 없다면 우주가 태어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열여섯 살의 가을이었다. 이 책을 비롯해 삼촌의 서가에서 빌려 간 여러 권의 책을 홀린 듯 읽은 뒤, 여남은 개의 질문들을 쪽지에 적어가 삼촌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혹시…… 이 우주의 물질은 원래 하나인 거예요? 같은 중성자가 어떻게 양자와 결합했느냐에 따라 수소, 탄소…… 그런 게 되는 거예요? 이 종이랑 담벼락이랑 사람의 몸이랑 물이랑…… 이 모든 게?  

  

그렇지 .     

삼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같은 구술을 이렇게 묶느냐 저렇게 묶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그 순간 나는 아득해졌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몸과 그의 몸이 같은 물질, 같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알갱이는 거의 비어 있다고, 이 책에는……

그렇지.


그러니까, E=mc²이란 말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네가 말한 건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등식이니까.     


수증기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물이 되고 얼음이 되는 것처럼요?

적절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해.     


그러니까, 여러 조건들, 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 세상은…… 한 점인 거네요. 빅뱅 이전의 한 점, 아니, 점도 아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우리가 본다는 건……     


그는 웃음을 거두고 내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풍화되는 대지와 마르는 강물, 폭발하는 별들이 스쳐간 것을.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의 격렬함을 경험한 것을, 슬픔도 고통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그 순간을.     


그날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당신이 내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 손의 원소가 내 손의 원소와 같다는 것을 간절하게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아니,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 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처럼.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컬러사진들이 모여 있는 화보 페이지에 얼굴을 묻는다. 폭발하는 초신성의 불꽃들을 들여다본다. 당신의 그림을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단 하나, 당신의 그림과 닮은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내 눈물을 믿지 않는다고.

내 진실을 믿지 않는다고.

내 기억을, 고통을 믿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는 순간, 모든 것이 허깨비가 되는 순간, 세계 전체가 하나의 얇은 껍데기, 계란 흰자를 싸고 있는 하얗고 불투명한 막(膜) 같은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 나는 믿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는다. 어떤 의미도. 어떤 진실도. 어떤 투명함도. 당신마저도. 그렇다. 덜덜 떨리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백해야만 한다. 당신의 존재마저도, 당신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바람이 분다, 가라 60~64쪽)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을 받은 인주는 정희에게 말한다.

“난 말이지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살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 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바람이 분다, 가라 52쪽)                     


바람이 분다, 
가라

통증은 모든 곳에 있다. 격렬하다. 존재의 통각(痛覺)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깊은 심연으로부터 절실하다. 존재의 고통과 불안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나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웅숭깊다. 나약하지만 눈 밝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달이 뒷면을 보고, 처음의 빛을 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격렬한 혼돈 속에서 빚어지는 처음의 빛은 너무나 환해서 그것을 보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 막히게 하기 십상이다. 긴장감 넘치는 숨결로 작가 한강은 질문한다. 우리 과연 숨 쉴만 한가. 우리 정녕 안녕한가. 우리 진정 진실한가. 세속과 세속적 이야기의 타락을 거슬러, 한강은 오로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그래서 가장 감동적인 소설 한 편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21세기에도 진정한 소설의 바람이 분다. 

(평론가 우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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