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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알렉산드르 블로크

by 김양훈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¹

알렉산드르 블로끄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우리 모두를 숨어 살피는 우연,

우리 위에는 피할 수 없는 어스름.

혹은 신의 얼굴과 광명.

그러나 그대 예술가여, 굳게 믿을지어다

시작과 끝의 존재를, 그대는 알지어다

천국과 지옥이

어디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지를.

그대는 침착한 잣대로

보이는 모든 것을 헤아려야 한다.

우연한 윤곽들을 지우라―

그러면 알게 되리니, 세계는 아름답다는 것을.

어디가 빛인지 알지어다.

그러면 어디가 어둠인지 알게 되리니.

세상의 신성과 세상의 죄악,

그 모든 것이 천천히 지나가게 하라,

영혼의 열기와 이성의 한기를.


[詩評]

블로크의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Жизнь не имеет начала и конца, 1910)는 러시아 은시대² 상징주의 문학의 핵심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시간과 존재, 신성과 인간, 빛과 어둠의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 이 시는 단순한 사건이나 서사보다 영혼과 세계의 구조를 탐사하는 형이상학적 언어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첫 연에서 시인은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우리 모두를 숨어 살피는 우연”이라고 선언하며, 인간의 삶과 시간의 흐름을 무한한 장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우연’은 단순한 무작위가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질서와 운명을 상징하며, 인간 존재가 마주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우리 위에는 피할 수 없는 어스름/혹은 신의 얼굴과 광명”은 빛과 어둠, 신성과 초월적 질서가 인간 삶을 동시에 관장하고 있음을 말한다. 블로크에게 세계는 감각적 현실이 아니라, 직관과 성찰을 통해 체험하는 정신적 구조다.

중반부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그대는 침착한 잣대로 보이는 모든 것을 헤아려야 한다/우연한 윤곽들을 지우라”고 권유한다. 이는 외부 세계의 혼란과 잡다한 형상을 제거하고 내면적 통찰로 세계를 관찰하라는 명령이다. 이러한 정화 과정을 거쳐 독자는 “세계는 아름답다”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며, 빛과 어둠, 신성과 죄악, 영혼의 열기와 이성의 한기 등 상반되는 요소를 분별하게 된다. 이로써 아름다움은 단순한 미적 경험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근본적 질서를 직관하는 체험으로 확장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블로크는 상반된 요소들의 공존을 강조한다. 빛과 어둠, 신성과 죄악, 감정과 이성은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이다. 시적 언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신의 관계를 영혼의 감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블로크는 이를 통해 독자가 시구절에 대한 읽기를 넘어, 세상의 구조와 의미를 사유하고 직관하도록 유도한다.

이 시는 러시아 은시대 시의 특징인 형이상학적 사유, 상징적 언어, 내면적 긴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블로크는 인간과 세계, 신과 영혼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혼의 항해자’로서, 독자에게 세계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통찰을 통해 경험하도록 요구한다. 시적 상징과 병치는 인간 존재의 복합성과 긴장을 드러내며, 은시대가 추구한 초월적 감각과 언어의 윤리적 책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의 시(詩)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블로크 문학의 형이상학적 정수이자, 러시아 은시대 시가 지닌 영혼적 탐구와 윤리적 성찰의 최고 예시라 할 수 있다. 독자는 시를 통해 단순히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삶과 세계, 신과 인간 사이의 근원적 긴장과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된다.


[註]

1) 서사시 「징벌」(Vozmezdie)의 서시(序詩)

2) 러시아 은시대 : 러시아 은시대(Silver Age, 1890년대 후반~1920년대 초)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황금기 푸시킨 이후의 정신적·예술적 전환기로, 상징주의, 아크메이즘, 미래파 등 다양한 시적 흐름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은시대 시인들은 단순한 현실 재현이 아닌, 영혼과 세계,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시적 언어를 추구했다.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블로크는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에서 시간과 삶을 무한한 흐름으로 제시하며, 우연과 신비, 빛과 어둠, 신성과 죄악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병치한다. 그의 시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둘러싼 형이상학적 구조와 내면적 긴장을 독자에게 체험하게 한다. 블로크는 시적 언어를 통해 삶의 무한성과 초월적 질서를 직관하도록 유도하며, 은시대 상징주의의 핵심적 특성을 구현한다.

이에 반해 아크메이즘을 대표하는 아흐마토바는 시에서 맑고 정밀한 언어를 통해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 「레퀴엠」에서 그녀는 스탈린 치하의 억압과 개인적 고통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며, 상징주의적 신비보다는 현실적 정서의 밀도를 강조한다. 만델슈탐 역시 언어의 구조와 리듬, 이미지의 윤리를 중시하며, 시를 통해 역사적, 철학적 의미를 탐구한다. 그의 시는 블로크처럼 형이상학적 사유를 담지만, 아크메이즘적 명료함과 결합되어 언어 자체의 질서와 책임을 드러낸다.

은시대 시인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미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과 세계, 역사와 신의 관계를 탐구했다는 점이다. 블로크의 초월적 이미지, 아흐마토바의 정밀한 현실감, 만델슈탐의 언어 윤리는 각각 다르지만, 모두 인간 존재의 심층과 세계 질서에 대한 사유를 시 속에 담아내며 은시대 시를 철학적·영혼적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Блок, 1880–1921)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러시아 은시대(Silver Age)의 대표적 상징주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러시아 근대시의 형이상학적 탐구를 선도한 인물이다. 상징주의 문학에서 그는 인간 존재와 신성, 사랑과 사회적 혼돈 사이의 관계를 심오하게 탐구했다. 상징주의 운동 속에서 블로크는 언어를 단순한 의사 전달 수단이 아닌, 영혼과 세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로 보았다. 그의 시는 종종 신비적 이미지와 철학적 사유, 정서적 긴장을 동시에 담고 있어, 독자를 단순한 서사적 이해에서 벗어나 존재의 근원적 의미와 대면하게 한다.

블로크는 혁명 전후 러시아 사회의 불안과 변화를 목격하며, 개인적 감정과 시대적 경험을 결합한 시적 언어를 창조했다. 그의 초기 시는 자연과 사랑, 이상향에 대한 낭만적 정서를 담고 있으나, 후기 시에서는 인간 존재와 세계, 신의 역할을 보다 형이상학적·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은시대 문학 속에서 블로크는 상징주의의 신비적 이미지와 아크메이즘의 정밀한 형식미를 결합하며, 러시아 시적 전통을 한층 고도화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대표적 시인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Жизнь не имеет начала и конца, 1910)는 시간, 운명, 인간과 신의 관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Aleksandr Blok and his Wife, Liubov Mendeleev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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