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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은 Jan 01. 2024

뭉크식 위로

에드바르드 뭉크, 절규 (1893)

미술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그림은 정말 강렬하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고 본인이 말했을 정도니까.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나는 뭉크의 이 유명한 그림 <절규>를 온몸으로 이해한다.

물론 미친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실재했다.

절규 (1893)


공부만 잘하면 되었던 청소년 시절,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봤던 대학시절, 임용고시도 한 번에 합격해서 교사가 되었고, 남편도 스스로 골라 결혼했다.

무려 세 아이의 부모가 된 것은 유일하게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부모가 되어서도 한참 동안 아이들을 내 뜻대로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참 오만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내 뜻대로 되기를 기대했다가는 자칫 멀쩡했던 온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어 일그러질 수 있다.


2023년은 나에게 <절규>이다.





올 초에 나는 열심히 준비해서 합격했던 소중한 만학의 기회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시간적으론 2년, 금전적으로는 수천만 원의 손실쯤 될 거다. 원인은 참 어이없게도 미루기 습관이었다.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가족들에게 문제가 빵빵 터지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첫째의 본격 사춘기 막장 드라마와 트라우마에 시달려 하루하루가 불안한 남편을 돌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되었다.

‘죽고 싶다, 죽어야 돼, 죽을 거야’ 3종 세트를 매일마다 이야기하는 아이와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내다가 말랑해진 틈을 타 아이보다 더 깊고 강하게 우울해하는 남편. 그들과 조금이라도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피차 이성을 잃어버리고 싸움이 되었다.

조언이랍시고 뾰족한 말들을 쏟아내고, 위로랍시고 내 생각을 강요하며 한심해했다. 믿어주고 기다려주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있는 말이지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제 나에게 이 그림은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이다. 끔찍한 하루의 끝에 눈을 감으면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나는 그 물렁해진 땅을 파고 끝도 없이 들어갈 것 같았다.

누워도 자는 게 아니오
웃어도 괜찮은 게 아니오
먹어도 소화되는 게 아니오


나는 분명 <절규> 같은 세상에서 한동안 살고 있었다.


고통받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뭉크의 그림이 있다.

이별 (1896)

남자는 피가 흘러내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있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하얀 드레스 자락의 여인은 바람같이 스쳐 지나간다. 온 세상이 그에게 말하는 듯하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래?


우리는 이 남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고통을 자기화할 수는 없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힘든 시간을 보내며 참 수도 없이 읽고 썼다. 적고 읽고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내 슬픔을 스스로 위로하는 안정제였고, 고통을 객관화시켜 주는 의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뭉크의 그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위로한다. 그는 고통의 순간과 느낌을 객관화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를 이미지로 담아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위대한 화가인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뭉크의 인생은 유년시절부터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와 누나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차례로 지켜보았고, 여성들과의 연애에서 번번이 실패하며 여성 혐오증까지 앓았으며, 알코올 중독과 대인 기피증으로 생전에 유명한 화가가 되었음에도 말년에는 은둔해 살았다.


그의 정신적 병약함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회고한다.

 나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

-지식백과 중-


삶이란 참 묘하다. 뭉크의 고통은 한 점의 그림이 되어 동방에 사는 미지의 한 아줌마의 삶을 위로하고 있으니.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붙잡고 있으면 고통이 되고, 다른 사람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어긋날 뿐이라는 것.


2024년에는 더 지혜로워지길.

모든 것들이 잘 흘러가고 제자리를 찾도록 ‘평온의 기도‘로 시작하는 2024년.


저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앤서니 피렐리-


이는 불우한 성장 환경에서도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낸 미국의 한 자수성가 사업가의 매일 기도문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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