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 <작은 리듬이 있는 풍경>(1920)
얼기설기 나눠진 풍경 속 꽃과 나무들. 그것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나무 몇 그루가 여기저기 심어진 그림이다.
아이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법한 이 그림에서 나는 신비한 힘을 느낀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울퉁불퉁한 풍경 속 점과 선과 면들을 천천히 따라가보면, 울렁거리는 화면을 따라 어떤 시공간으로 훌쩍 이동하는 만화 속 한 장면처럼, 나는 집안일로 늘 바빴던 젊은 우리 엄마의 등 뒤에 아이가 되어 서 있다.
늘 정갈하게 정리된 우리집에는 책 읽을 시간도 없어 보였던 엄마가 사모은 새까맣고 두꺼운 커버의 세계문학전집, 명화음악 테이프 세트와 오래된 전축이 있었다. 엄마는 늘 바빴고 그것들은 늘 제자리에 가만히 꽂혀 있었다. 엄마는 언제 그걸 꺼내어 볼까? 바쁜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 그게 늘 궁금했다.
우리 세 자매가 각자의 이유로 치열하고 외로운 사춘기 시절을 보낼 즈음, 엄마의 인생은 다른 이유로 조금 더 바빠졌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영어 학원에 다니며 매일 단어를 외우고, 온갖 종류의 운동을 배우고, 잦은 모임에, 시부모까지 모셨다. 급식 없던 그 시절 매일 4~5개의 도시락을 쌌을 엄마의 반찬은 늘 최고였고, 우리는 아침에 식은 밥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지금 내 나이였을 엄마의 마흔은 참 부지런하고 단단했던 것 같다.
엄마의 따뜻함은 대게 따끈하게 데워진 국과 밥이고, 바지런하게 정돈된 서랍장과 늘 깨끗한 커튼같은 것들이었다.
다시 그림으로 되돌아왔을 땐 조금 공허하고 당황스러웠다.
엄마와 주고 받은 대화나 말랑말랑한 살을 보듬어 본 기억은 어디쯤 있을까?
엄마 등 뒤에 있는 나를 한 번만 돌아봐주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엄마가 숙제처럼 해 낸 '성실한 따뜻함'을 대신할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동심, 어린 시절, 편안함‘ 같은 단어들로 자주 언급되는 화가 파울 클레.
그의 또 다른 작품 <빨간 풍선>에는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모두 제각각인 네모들 사이에서 빨간 풍선 하나가 선명하다.
빨간 풍선이 두둥실 날아올라 이번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가 닿았다.
이제는 더 이상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을 빨간 풍선에 태워본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떠올릴 유년이 이 그림을 닮았으면 한다.
풍선을 타고 마음껏 날아다닌 세상이 조금은 엉뚱하고 재미나길, 삐뚤삐뚤하고, 꽉 차지 않으며, 다정한 모습이길 바란다.
반듯한 직선과 텅 빈 서늘함, 각종 스케쥴과 해야 할 일들과 그것을 확인하는 부모의 뾰족한 말들로 가득하지 않길 바란다.
파울 클레의 그림에 영감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일하는 엄마 대신 아빠가 육아를 전담하며 아들을 직접 키웠다고 하니 참으로 선구적인 아빠가 아닐 수 없다.
분명 클레의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었고,
아이와 함께 춤추는 환희였을 것이다.
내 사랑도 그를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