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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은 Jan 01. 2024

원칙을 너무 강조하면 벌어지는 일

파울로 우첼로 <산로마노 전투>

파울로 우첼로 <산로마노전투> (1440년 경)


1400년경은 서양 역사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성경과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회화는 이제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원근법에 평생 심취했던 화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파울로 우첼로. 원근법에 꽂혀 원근법이 최고의 가치라 믿고 일생을 원근법에 의한, 원근법을 위한 그림을 그린 작가.


이 그림이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원근법에 익숙한, 원근법이 파괴된 그림도 얼마든지 훌륭한 회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대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원근법은 얼마나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이었을까?

자다가도 원근법을 외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에게 원근법은 회화의 전부였다. 평생 한 우물만 판 덕분에 서양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독자의 감상이 저마다의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21세기를 사는 덕에 좀 생뚱맞은 한 줄 감상평을 적어보자면 

‘감동보다 원근법만 남은 그림, 아름답지는 않지만 뭔가 굉장히 공들여 그린 듯한 그림’이다.  


이 기묘한 그림을 보며 나는 원칙에 사로잡혀 아이들에게 줄 마음의 여유와 웃음 한 스푼을 잃어버린 근엄한 내 표정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지만 웃지 않는 엄마, 에너지가 탈탈 털려도 열심히 내 방식을 고집할 때의 내 표정이 딱 오버랩 되었다.


사실 매일 반복되는 삼남매의 일상을 잘 유지하려면 회화의 원근법 같은 기본 원칙이 필요한 법.

-무엇을 하든 끝은 정리정돈이다.

-주어진 시간과 돈을 다 쓰면 빌려쓰지 않는다.

-매일 스스로 해야할 일과 책임을 다한다.   

같은 것들.


하지만 살다보면 점점 원칙은 세분화된다. 아침에는 휴대폰 영상을 시청 하지 말아야 하고, 식탁에는 휴대폰을 들고오면 안되고, 자기 전에는 잠을 쫓는 만화책을 보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열이 37.5도가 넘지 않으면 수영은 꼭 가야한다는 규칙까지 생길뻔했다.


나름 인생을 살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생긴 양육 철학이지만, 철학을 넘어 원칙에 매몰되면 항상 내 표정은 딱딱해지고 경직된다. 안되는 것부터 눈에 들어오고, 그걸 내 눈앞에서 하도록 하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다.

어느덧 나는 목표로 했던 소중한 가치를 상실한 채, 아이들과 실랑이하는 그냥 짜증 잘 내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이 그림을 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정말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인가?


파울로 우첼로가 먼 훗날 고흐나 앙리 마티스, 피카소와 앙리 루소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았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원근법만이 최선은 아니었네요.
하나의 원칙에 매몰되면 
작품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겠군요.


박제된 그림 한 점에 나름대로 확고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기준들을 통째로 흔들리기도 한다.

일상과 원칙이라는 속임수에 빠져 소중한 것들을 놓칠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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