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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은 Jan 08. 2024

소녀와 딸

타마라 드 템페라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

초상화의 시작은 옆모습이었다.

회화사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초상화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고, 정면을 당돌하게 응시하는 ‘여성’을 그리는 데에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은 화가들이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그림, 고객들의 집에 걸어두고 싶은 빛나는 한 때라면 아무래도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들의 초상이지 않을까?

발그레한 볼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살짝 몸을 돌려 독서를 하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다소곳이 앉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들.


소녀 감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화가가 있다. 바로 오귀스트 르누아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


아름다운 것만 보고 그려도 부족한 인생이라고 했을 만큼 추구하는 바가 분명했던 화가 르누아르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으로 남기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림 속 자매와는 사뭇 다르지만, 우리 집에도 자매가 있다. 나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매우 사랑하지만 그저 현실 속 딸들은 독서보다 독설이, 피아노보다 막춤이 더 어울릴 뿐.

그녀들이 자라 어느덧 엄마와 어깨가 나란해졌고, 매사에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소녀가 되었다.

딸이 소녀를 닮았다면 차라리 이 그림에 가깝다.

구스타브 클림트 <메다 프리마베시> (1912)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구스타브 클림트. 후원가의 9살 자녀를 의뢰받아 그린 것인데, 그림 속 소녀는 9살이라기에는 조금 더 시크하고 성숙해 보인다..


모든 것을 ‘클림트화’ 시켜버리는 이 천재적인 화가는 소녀를 보랏빛으로 물든 배경과 꽃잎으로 넘실거리는 바닥 위에 세워두었다.

부모의 뒷목을 잡게 만들 것 같은 당돌함이 눈빛에 아른거리지만, 소녀다움이라는 화가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느낌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녀의 초상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작품이다.

타마라 드 렘피카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 (1927)

살짝 비딱한 시선, 약간 볼멘 입술과 턱, 흐트러진 머리카락, 조금은 엉성한 몸매와 자세.

지금 이 소녀가 바라보고 있는 화가는 다름 아닌 소녀의 엄마다. 이제야 납득이 되지 않는가?

나 지금 불만 있거든!
내 마음 안 보여?


하듯 매사에 엄마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춘기 소녀말이다.

관찰만 하기엔 너무 가깝고, 다 받아주기엔 멀리하고픈 시기. 소녀와 딸, 그 사이 어디쯤에서 이 그림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그녀의 화풍은 20세기 초 미국이 떠오를 만큼 선명하고, 10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대적이다.

아르데코, 위대한 개츠비, 미국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더 매력적일테지만, 오늘은 철저히 화가 엄마로서 템페라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화면을 장악하는 아이의 당돌한 눈빛, 그에 비해 엉거주춤한 두 손, 통통하고 예쁜 허벅지 살, 시원하게 넘실거리는 커튼과 낯선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메리제인 구두와 살짝 꺾인 오른쪽 발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세상에, 심쿵이다!


인생 외모 그래프에서 바닥을 치기 마련인 사춘기 소녀의 온 몸뚱아리가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다니!

엄마와 딸의 바람 잘날 없는 일상 속에서 애써 찾은 매력 포인트일까? 그저 아이의 오랜 습관이었을까?

엄마는 알겠지. 좋은 작품은 설명하지 않는다.


오늘은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그녀들을 오래도록 바라봐야겠다. 딸들의 예쁜 구석을 고운 눈길로 훑어가며 머릿속에 찬찬히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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