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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은 Jan 15. 2024

영어가 뭐길래

피에트 몬드리안, <파랑과 빨강의 구성> <1929)

모든 게 불확실하고 생각이 복잡할 때면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의 그림을 추천한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차분해지고 복잡한 생각들은 착착 서랍 정리될 것만 같다.

,<파랑과 빨강의 구성> <1929)

무채색과 삼원색의 비율, 사각형들의 크기와 그것들이 놓여진 위치까지 모든 게 딱 적당하고 균형잡힌 그림.

이 모든 것은 작가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의도한 결과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어 사교육 이야기를 꺼내려고 몬드리안까지 소환했다.




나는 현재 15년 차 초등 교사이고, 심지어 아버지는 대형 영어학원 원장님이셨지만, 내 자식 영어 교육만큼은 여전히 ‘노답’이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

엄마표 영어가 유행했고, 동영상과 동요 등 영어 노출 시간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던 시절이었다.

몇 번 시도는 했지만 아이도 나도 ‘노잼’인 것은 꾸준히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이와의 보내는 한정된 저녁 시간에 영어공부는 늘 후순위로 밀려났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학원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대부분의 학원이 맞춘 듯이 레벨테스트와 매일 2시간 이상을 기꺼이 내놓길 요구했고, 단어 외우기, 시험 치기, 숙제하기 3종세트는 마이너스 옵션조차 없었다.


영어가 뭐길래!!


이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집에서까지 숙제를 붙잡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아마 조금 더 부지런했다면 다양한 학원 신세계를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쇼핑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나는 학원 쇼핑도 고민만 하며 6년을 흘려보냈다.

학교 공부를 믿었고, 좋아하는 영어 노래만 같이 열심히 불러댔다.


중학교 입학 즈음엔 영문법이 최대 이슈였다. ‘미리 해야 한다!‘ ’ 가서 해도 충분하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우연히 가입한 사교육 오픈채팅방에서 왕펀치로 크게 한 방 맞고 뻗어버렸다.


Q) 영어 경험이 별로 없는 초등 저학년 대형 영어 학원 입학 가능할까요?

A) 레테 결과 어려울 수도 있어요. 영유 출신이 아니면 어렵죠. 어린 친구들과 하거나…

Q) (영문법) 지금 초4 올라가는데 늦었을까요?

A)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죠.


더 많이!
더 빨리!

학교 밖 교육은 이미 자본과 경쟁의 논리로 전락했다지만, 대쪽 같은 초등교사의 정신으로 아이가 학교 공부에만 충실하면 박수 치고 대견해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무언가를 더 시키지 않았을 뿐인 내 선택으로 아이는 본의 아니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중학교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입이 걸린 문제였다면 정말 억울했을지도.





몬드리안은 점, 선, 면과 삼원색을 세상의 본질로 보고 추상적으로 시각화한 최초의 화가이다.

안정, 균형, 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곡선이나 사선조차 사용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여지를 두는 동료와는 결별할 정도였다고 하니, 마음껏 강박적일 수 있었던 그의 회화 원칙이 오히려 부러워지는 요즘이다.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교육자이지만 그의 라이프 스타일을 한 번 흉내 내 보고 싶어졌다.


몬드리안처럼
교육에서도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것들을 바라보면 어떨까?


임고시절에 수도 없이 외웠던 교육과정의 첫 줄은 각 교과의 교육 목표였다. 예를 들면 국어는 의사소통능력, 수학은 문제 해결 능력과 사고력 함양. 그러니까 영어교육은 목표는 영어로 하는 의사소통능력, 즉 영어로 잘 듣고 읽고 말하고 쓸 줄 아는 것이다.


본질을 고민하기도 전에 부모는 옆집 아이가 얼마나 더 유창한지, 우리 아이 시험 점수가 몇 점인지에 휘청거린다.

모든 공부에는 건강한 스트레스와 적당한 채찍질이 필요하다지만, 어떤 스트레스와 채찍질이 정말 필요한 걸까?

더 단순해져라!
본질을 고민해라!

레벨 테스트, 단어 시험, 유창해 보이는 회화실력 같이 영어 공부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걷어내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은 시원해진다.


아이는 지금 교과서라는 정제된 텍스트를 읽고 저장하고 반복하며 실력을 쌓아가는, 가장 기본에 충실한 영어 학습법으로 나름 중학교 공부를 잘 헤쳐나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적은 몇 점이냐고?


“학원 안 다녀도 100점 맞아요!”였다면 벌써 인싸가 되어 노하우 전수에 바쁜 나날을 보냈겠지만, 매우 다행히도 아이의 현재 영어실력은 ‘잘해요 ‘와 ’ 앞으로 잘할 거예요’ 그 사이 어디쯤.


꾸준히 하니까 되네!
알고 보니 이거였네!
해 보니 할만하네!


중학교에서 쌓아야 하는 학습 경험이란 게 아직은 이 정도여도 충분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공부에 인생을 걸고 혼신의 힘을 쏟는 아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특출 난 영재가 아닌 우리 집 아이들은 불안감에 선행 학원을 배회하지 않았으면, 공부를 매개로 마음의 힘을 기르고, 자신감을 기르고, 실패하고 또 일어나는 경험을 많이 쌓았으면 한다.

더욱이 존재 자체만으로 힘든 사춘기 시절이 아닌가?


첫째의 경험을 바탕으로  (놀랍게도) 둘째 셋째는 더 천천히 키우고 있다. (제대로 시킨 것도 없지만) 불안함의 희생양이었던 첫째에게 매우 미안할 따름.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여전히 자신할 수 없지만, 뒹굴뒹굴 심심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고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놀았던 그 모든 시간들은 효용을 떠나 다시없을 신비로운 인생의 한 장면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을 테니.

어쩌면 그 시간들이 정말 효용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엄마가 이렇게 철없이 낭만을 논하고 있을 때, 아이는 대입을 향해 점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 급변하는 세상, 계속 달라지는 입시 제도를 보면 사실 엄마는 또다시 원죄를 지은 인류처럼 점점 더 미안하고 자신이 없어지고 만다.

세상은 엄마도 빨리빨리 변하라고 재촉한다.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네모 반듯한 것을 사랑했던 몬드리안은 말년에 네모 반듯한 건물로 가득한 뉴욕에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부기우기라는 재즈에 푹 빠져 매일 같이 뉴욕의 재즈바를 드나들며 여생을 즐겼던 것이다.

‘지금껏 내가 왜 그렇게 엄격하게 살았던가?’하는 후회는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 스타일도 참 그답게 변해갔으니까.

.. Broadway Boogie Woogie (1942 - 1943)

여전히 정제되고 반듯한 그림이지만, 이 선들에서는 흥겨운 소리가 날 것만 같다. 그림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빨간 점, 파란 점, 점들을 따라 고개를 까닥거리며 리듬을 맞추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그의 유작은 미완성처럼 보일 정도다.

victory boogie woogie (1944)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겁게 창조하는 경지, 인생의 끝을 향해 가는 거장의 그림은 오히려 점점 더 가벼워져 날아갈 것만 같다.


우리는 참 쉽게 변화를 말하고 변화를 예찬하고 심지어 변화를 조장하기까지 한다. 연예인들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맨날 똑같은 스타일이냐고 타박을 받기 마련이니까.

세상이 몬드리안의 변화를 예찬하고, 기사화하고, 작품을 고가에 거래하는 동안, 그는 우리에게 이런 한 마디를 남겼다.


나는 이것이
내 예술의 변화가 아니라
완성이라고 생각해.


나만의 완성을 향해가는 삶 앞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변화들에 크게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애초에 내 것이 아닌 아이의 삶이니 조금 더 여유를 가져보라고. .

몬드리안이 불안함에 들썩이는 내 어깨를 가만히 도닥여 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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