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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면 눈길이 머문다

(우리 동네 미술관 ‘이상원 미술관’편을 보고)

by 소금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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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모두 집을 나서고 텅빈 집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진이 다 빠진 아침,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한 방송에서 손이 정지되었다. 국회방송에서 방영되는 〈우리 동네 미술관〉으로 가끔 보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오전에 집을 나서는 날이 많아서 챙겨보지 못했던 방송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TV앞에 앉았다.


〈우리 동네 미술관〉은 신아영 아나운서와 김찬용 도슨트가 쉽고 재미있는 진행으로 전국 방방곡곡 숨은 미술품과 예술명소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우아한 고전부터 난해한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작품에 담긴 의미와 미술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예술 여행을 통해 지역에 있는 미술관을 소개하고 다양한 예술 작품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해주고 있어서 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방송이다.


오늘 아침에는 춘천에 있는 《이상원 미술관》이 나왔다. “오, 이상원이라는 화가 처음 들어보는데!” 어느새 나는 TV에 빨려 들어갈 듯이 화면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상원 미술관이라 춘천에 가면 꼭 들러야지.” 하면서 네이버 메모에 미술관 이름을 기록했다. 이상원 미술관은 춘천시 화악산 자락에 위치한 사립미술관이라고 하는데 화면으로 보아도 초록이 무성한 숲 가운데 있었다. 자연과 예술과 휴식을 누릴 수 있는 문화체험 공간이라고 하는데 미술관 건물 외양도 멋졌다.


이상원 화가는 안중근 의사의 공식 영정 그림을 그렸던 극사실주의 대가라고 한다. 방송을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얼마 전에 별세 했다는 소식이 떴다. 화면에서는 정정한 모습인지라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면 뵐 수 있으려나 했는데 너무 안타깝다. 오늘 방송에서는 이상원 화가의 50년 화업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를 방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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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작가의 50년 화업을 폭넓게 톺아볼 수 있는 작품 5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전시 부제인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이라는 것도 인상깊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그의 특별한 이력이 남달랐는데 그림을 배우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잘 그렸다고 한다. 상업 초상화가였던 그는 영정 작업을 계기로 순수미술가로 변화를 맞았다고 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마대를 확대한 그림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무척 세밀하게 그려서 마치 사진 같았다.


진행자가 그림을 감상하듯 자신들의 느낌을 이야기해주는데 마치 내가 그림 앞에 있는 듯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시간과 공간’, ‘마대의 얼굴’, ‘막’, ‘동해인’ 등 대표적 연작도 화면상이지만 감상해볼 수 있었다. 투박하게 그린 듯 하지만 노동을 하는 보통 사람들의 클로즈업 된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지에 힘을 빼고 툭툭 그린 닭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생동감 있는 닭을 그려야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3부에서는 ‘자연에서 배우고 흙으로 돌아가다’라는 주제로 철모 등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실제로 흙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진행자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오로지 그림을 위해서 50년 외길 인생을 걸었다는 노화가를 보면서 왠지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이제 몇 년 그림 그렸을 뿐인데! 그것도 전부가 아닌 취미로 그렸던 나는 다시금 겸손의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이제야 그림을 좀 알 것 같은 느낌인데 안타깝기도 하고 더 이상은 욕심이라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던 이상원 작가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화면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쉽지만 붓을 들면 캔버스가 회전하는 것 같아서 마음으로만 그림을 그린다는 노 화가의 말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지난 11월 4일까지 2024 이상원미술관 1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는데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지는 아침이다. 오늘 또 이렇게 존경할만한 한 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림을 좋아하다보니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다보니 미술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새롭게 알게 된 미술관은 나중에 가보려고 기록하는데 오늘 알게 된 〈이상원 미술관〉도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방송을 보고 “마음이 가면 눈길이 머무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림과 미술관을 좋아하니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을 품게 된다. 성질 급한 청어가 죽지 못하게 하려고 넣었던 메기처럼 그림과 미술관은 무료한 내 삶을 첨벙첨벙 뛰는 활어처럼 활력이 넘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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