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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봉이 Nov 29. 2023

나무늘보

쉬운 삶은 없다

태고적에는 식물도 동물처럼 움직였어.

아니다, 동물도 식물처럼 움직였어. 식물이 먼저 있었거든.

밤새 숲이 사라지고 생기고, 산이 옮겨가고 하는 이야기들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지. 그런데 왜 식물(나무)들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까. 사실은 지금도 움직이긴 해. 너무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지.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켜면 하늘나라를 휘저어 놓는 키 큰 나무, 걸음마다 땅을 쪼개고 흔들어 놓는 뿌리 깊은 나무, 팔을 둘러 온 세상을 껴안는 나무, 온갖 새와 짐승들을 태우고 바다를 성큼성큼 건너는 나무,...


기고만장한 나무들은 급기야 전쟁을 일으켰어. 나무들의 기세는 참으로 대단했어. 콩나무 따위가 하늘나라를 공격할 정도였으니 말이야. 생각해 봐. 팔다리를 잘라도 죽지도 않고 금방 새 팔과 다리가 자라는 나무들을 누가 이길 수 있겠어.


세상의 만물을 만든 조물주가 신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열었어. 손오공도 손바닥 안에 가둔 부처님이 말했어.


"죽일 수 없다면 가둬놓으면 됩니다"


"부처님의 손이 아무리 커도 저 큰 나무들은 무리입니다"


"가둔다는 것이 반드시 담이나 울타리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히 갇힌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무들은 다른 데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지. 갇힌 나무들은 격렬히 저항하기 시작했어. 이동은 못해도 팔을 들어 하늘나라를 마구 휘젓는 거야. 이에 조물주가 한 동물에게 임무를 줬어.


"너의 종족들은 지금 당장 땅으로 가서 나무들이 팔을 못 움직이게 하여라"


이 종족들은 너무도 빠르고 은밀하여 그 신출귀몰하기가 갓 연인들 방구 감추듯 하였어. 조물주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미 나무들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어.


나무의 팔을 붙잡고 늘어져 있는 이 동물을 본 사람들은 '나무늘보'라고 불렀어. 나무가 워낙에 천천히 움직이니까 나무늘보들도 빨라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어서 점점 느려지게 되었지. 나무늘보 팔자 늘어지게 쉰다고 하는데 사실 나무늘보는 임무를 수행 중인 것이지. 


그런데 임무가 너무 힘들어서 멸종위기에 처했대. 그냥 나무를 붙잡고 매달려 있기만 하면 되는데 무엇이 그리 힘들까. 나무가 움직인다는 것을 잊은 세상이 나무늘보의 임무도 잊었기 때문이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거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열일하는 나무늘보. 너무 멋지지 않니.



※ 힘든 삶에 지쳐 '다시 태어나면 나무늘보로 태어나겠다'는 친구를 위해 끄적여 보았습니다.

#제목이있는글 #제목글 #나무늘보 #창작동화 #동화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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